* 이 글은 동인련 조정위원회에서 그간의 경험을 회원들과 나누기 위하여 쓴 글입니다.

 

이경(동성애자인권연대)

 

 

‘동성애자’인권연대라는 단체 이름 때문일까요? 이성애자를 포함해서 다른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지닌 분들이 우리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지 가끔 질문합니다. 회원 중에 동성애자 비율이 높지만 여러 정체성을 지닌 회원들이 두루 어울려 활동하고 있기에 동인련이 동성애자들만 활동하는 곳으로 보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동인련은 10대 활동원칙을 통해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성전환자, 양성애자 그리고 모든 유형의 성적 불평등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며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이성애자들과도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활동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다양성이 충분히 존중되려면 이를 받아들이는 환경은 물론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동인련은 운영위원회와 각 팀, 모임의 운영자들을 선출할 때 다양한 정체성의 회원들이 포함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정체성을 형식적으로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활동에 제약 없이 참여하며 동등한 자격을 지니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운영회원 및 모임 운영자 중에 점차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이성애자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은 좋은 변화입니다. 여성 성소수자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게 하자는 여성 회원들의 의견을 받아 홍대 쪽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을 선택하여 이동권을 확보하는 것,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참석할 수 있는 뒤풀이를 위해 사무실을 개방하는 것 또한 그러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처음에는 ‘노력’ 즉, ‘힘’이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어느 새 많은 회원들의 의식과 실천 속에 자연스레 자리잡은 부분도 생겼습니다.

 

작년 말 동인련 회원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추상적으로만 다양성을 생각하다가 부분적이나마 회원들의 실체를 접하니 많은 고민이 들더군요. 이성애자 회원 비중도 컸습니다. 동인련은 적극적인 이성애자 회원들이 성소수자지지 그룹을 만들거나 함께 활동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면서 이성애자 회원 가입을 권장하는 여러 방법을 의논했고, 회원가입란에 이성애자들이 주저하지 않고 가입할 수 있도록 환영 문구를 다는 등의 방법을 적용했습니다.

 

회원들은 동인련이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또는 동인련이 다양한 회원들과 함께 활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많은 회원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설명한 글을 읽고 교육에 참여합니다. 무궁무진한 정체성의 세계 속에서 다시금 자신을 위치시켜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단체 속의 이성애자 회원들에 대해서는 저도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다양성을 충분히 존중하고 구현하고 있다고 착각해온 셈이죠. 간혹 이성애자 회원들이 성소수자 단체에서 활동하는 어려움을 토로하면 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의 어려움을 불현듯 깨달았다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지요. 한마디로 이성애자 회원의 가입은 강조했지만 어떻게 함께 할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불균형을 보며 나 역시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에 머무르며 정작 이 칸막이를 넘으려 시도한 이들에 관심을 갖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정위원회가 다루었던 사건을 통해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만한 것들을 나누겠습니다.

 

이성애자로 자신을 소개해 온 한 회원인 효진(가명)은 동성애자인 절친한 회원인 인성(가명)에게 최근 자신이 동성친구인 은경(가명)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인성은 이성애자로 살아온 효진의 정체성 고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효진의 정체성이 잠시 흔들리는 것이라는 견해를 타인에게 쉽게 이야기했고 효진은 여러모로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있는 사회에서 성소수자로 자신을 커밍아웃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많은 동성애자들의 ‘데뷔 경험’은 언제 들어도 흥미롭습니다. 성소수자의 삶과 경험이 쉽게 지워지는 사회에서 공통점을 지닌 사람들이 만나 서로가 지닌 엇비슷한 경험을 나눌 때면 풍진 세상에 위안이 되기도 하죠.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이 바닥’에 대한 연대감이 상당한 동시에 꽤나 폐쇄적이기도 합니다. 더한 차별 속에 있는 여성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가입 시에 이성애자나 남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성소수자임을 고백하고 신상 정보를 과하게 제공하는 절차를 요구합니다. 레즈비언들이 폐쇄적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지만 적어도 우리 단체에서는 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바이섹슈얼 여성이라면 여자랑 사귀면 레즈비언, 남자랑 사귀면 이성애자 아닌가 하는 말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저 또한 은연중에 남성과 사귀고 있는 바이섹슈얼 여성은 이제 이성애자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성애자들은 성정체성 고민을 크게 안 해봤을 테니 내 경험은 그들과 겹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성애자가 특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그들이 성소수자 고민을 나눌 수 없으리라는 벽을 만듭니다. 그만큼 이성애와 동성애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폐쇄성 때문에 이성애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동성을 좋아하는 것은 한번 의심해볼 일이 됩니다. 더불어 이 바닥으로 넘어오려면 이런 저런 경험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판단이 생겨납니다. 이는 동성애자의 성정체성 고민을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유보하거나 부정하는 사회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이섹슈얼을 이처럼 단정해버리는 것은 동성만 좋아하는 자신의 경험에서 조금도 벗어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욕망,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탐색은 오로지 자신의 머릿 속에서만 탄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는지 생각하면서 사회 속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성정체성은 한 사람의 삶의 총체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성애가 아닌 다른 것을 자신의 삶 속에 들여놓고 탐색해볼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맺을 기회가 없습니다. 이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다시금 탐색하는 과정에 두려움을 싹틔웁니다. 성적 지향은 꼭 일관될 필요가 없으며 확정적이거나 가변적인 것 모두 나를 구성하는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될 일입니다. 동성애/이성애 이분법으로만 한정한다면 우리는 너무 많은 설명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이성애자로 살아온 사람들이 새로이 성정체성 탐색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거나 어떤 인생의 경험도 없는 사람들로 치부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에 새로운 결단에 이르는 경로는 저마다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나의 경험을 통해 내 정체성을 구성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만큼,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경험하는 것도 똑같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동행인이자 조언자, 지지자는 될 수 있어도 그들의 성정체성을 판단하는 법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판단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의 경험을 토대로 내 경험을 납득할 수 있도록 대화하십시오. 내 경험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그가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가르치려 하는 사람을 두고 ‘꼰대’라고 하지요. 상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도 자신의 경험치를 유일한 근거로 여기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습니다. 민주적인 소통과 대화는 서로가 동등할 때 가능합니다. 차별에 맞서는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실천을 이어가야 할까요? 연대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입장을 지니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이야기는 바로 일상 속에서 연대를 연습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의 연대를 상상합니다.

 

첫째, 연대를 할 때 우리가 동질적이라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관점입니다. 모두가 같다는 것은 가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이 출발점에서는 모두가 포함되는 것이 아닌 누군가 배제되고 마는 결과로 나아가고 맙니다. 하나의 정체성을 가정하고 모인 우리 단체에도 해당되는 것이죠.

 

둘째, 모두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출발하는 상대적인 관점입니다. 그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도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 중심을 잡을 수 없는 상황도 생깁니다. 오로지 상대적이고 모든 것을 해체한 사회는 현실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내가 진지하게 고민한 것들을 어디에 위치시켜야할지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며 연대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뿌리내리기’와 ‘옮기기’라는 대화의 방식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정체성 속에 나의 중심을 뿌리내립니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정체성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의 삶으로 옮겨갑니다. 서로가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서로 다른 정체성과 경험을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자기 관점을 버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완전히 같다고 생각하면 나 자신의 뿌리는 뽑힐 것입니다. 뿌리를 달리 내리면서도 자신과 양립할 수 있는 가치와 목표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뿌리를 달리 내렸지만 함께 하고 있는 많은 실천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에이즈 비감염인 여성성소수자이지만, 에이즈 낙인을 공유하는 정체성으로 뿌리내린 회원들이 있습니다. 다양성을 옹호하고 진보운동을 지지하는 평소의 실천 속에서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직장동료가 있는 이성애자로서, 성소수자이슈를 자신의 운동으로 삼고 이 단체에 뿌리내린 회원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달라야만 하는 것도, 같아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네요. 동인련에서는 회원 간 조정 및 징계에 대한 판단을 요하는 사건이 생길 경우 조정위원회가 개입합니다. 명백한 징계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징계여부와 상관없이 장기적인 해결을 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동인련이 표명한 활동원칙을 성실히 따르면서 어떻게 하면 회원 간 민주적 대화와 참여가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됩니다.

 

다시 한 번, 동인련의 활동 원칙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의, 또는 성소수자가 아닌 회원의 동등한 참여는 어떻게 보장되어야 할까요? 연대와 존중을 배우는 과정이 그것입니다.

 

이 과정은 우리 중 일부를 비난하거나 또는 서로의 행동을 제약하고 검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는 사회에 분노한 사람들, 이성애와 동성애 칸막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 동시에 억압적 사회 속에서도 자신의 성소수자 정체성을 드러내며 존중받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끊임없이 대화하며 실천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을 때 경험은 죽어버립니다. 검열하는 사람은 “내가 이렇게 쓰면/말하면 비난받겠지?”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찰하고 대화하려는 사람은 “내가 이렇게 하면 그에게 상처가 되거나 부당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내가 그라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완전히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옮겨가야 합니다. 나와는 다른 경험을 쌓아온 사람의 입장에서 뿌리내리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정체성을 탐색하고 확인하며 선언하는 과정을 온전히 존중하고 지지합시다.

2. 우리와 함께 활동하는 이성애자 회원들은 어쩌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뿌리내리기와 옮겨가기를 실천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3. 다양한 성정체성을 지닌 우리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함께 하면서 경험을 공유하고 사랑과 분노, 슬픔을 나눠 갖습니다. 동인련은 사회연대와 실천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단체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탈색시키지 않고도, 나의 입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 잘 배울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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