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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이갈리아의 딸들을 통해 본 성소수자 운동

by 행성인 2015. 7. 18.

 

마롱(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지난 6월 28일 개최되었던 퀴어 문화축제와 7월 5일 열렸던 대구 퀴어 문화축제는 모두 극우 기독교 세력과의 충돌이 있었음에도 성공적이었다. 미국의 동성혼 합법화와 한국에서의 김조광수 · 김승환 부부 동성혼 소송 심리 등으로 인해 성소수자 문제는 가시화되며 대중의 관심을 받고있다. 하지만 성소수자 운동에 대한 비판과 비난 역시 눈에 띈다. 현재의 성소수자 운동과 그에 반하는 비판을 <이갈리아의 딸들(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이라는 책을 통해 다루고자 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가부장 세계의 남성과 여성이 누리는 지위가 뒤바뀐 가상의 세계관에서 맨움(생물학적 남성)이 사회와 가정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투쟁을 그리고 있다. 소설 내에서 맨움은 가부장 사회의 여성만큼이나 오랫동안 억압당해왔던 성별이지만 맨움 해방운동에 대한 기록이나 전례는 터무니없을 만큼 적다. 그 결과 맨움들은 사회가 불공평하고 느끼지만 이에 어떻게 저항해야하는지, 저항이 효과적이었던 적이 있는지, 저항함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몰라 사회에 순응하게 된다. 하지만 맨움 해방주의자들은 맨움 해방운동의 전례를 찾아가며 사회에 저항한다. 그들은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연대하여 투쟁한다. 결국 이갈리아와 이갈리아에 종속되어 살아가던 맨움들은 천천히 변화해 간다. 하지만 이 소설의 초점이 지나치게 맨움 해방운동에 맞춰진 나머지 그 중요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성소수자가 주인공인 동시에 맨움 해방 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움 애인과 결별하고 맨움 해방주의자 동료와 사랑에 빠진다. 주인공의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맨움 해방주의자들의 운동 방향은 전혀 성소수자의 인권과 엮여있지 않다. 소설 내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는 폐쇄적으로 그려지는 커뮤니티 안에서만 드러날 뿐, 맨움 해방주의자 이외의 성소수자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갈리아의 성소수자들은 커뮤니티 내에서만 목소리를 낼 수 있기에 커뮤니티 밖의 사람들에게는 가시화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이갈리아의 성소수자들은 목소리를 얻지 못한다.

 

위에 썼듯이, 소설 내의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동성애자를 부정적으로 일컫는 단어인 팔루리안은 성소수자의 다양성을 뭉뚱그리고 성소수자 전체를 왜곡된 이미지 속으로 밀어넣는다. 흐릿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려진 성소수자들은 그들에게 적대적인 사회와의 소통을 포기하고 폐쇄적인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성소수자들은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고 폐쇄적인 커뮤니티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사회로부터 이중으로 차단된다. 사회에 나갈 기회를 박탈당한 맨움들과 사회로부터 차단당한 성소수자들은 비슷한 처지임에도 연대하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이갈리아는 극단적인 성별 이분법을 구성원 모두에게 강요하는 사회다. 월경을 하는 존재를 움, 월경을 하지 않는 존재를 맨움이라 명명하는 것은 생물학적 성별에서 벗어나는 성적 정체성을 갖지 못하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를 압박한다. 사회가 나서서 성 역할을 강요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사회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 굳게 뿌리내린 성 역할이 사회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갈리아와 같은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무너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강요하는 성 역할에서 벗어난 개인은 ‘변태’ 혹은 ‘팔루리안’이라 낙인찍히며 사회에서 배척당한다. 배척당한 성소수자들은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 밖에서는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처럼 가장한다. 이것이 아마 맨움 해방주의자들이 성소수자들과 연대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다수자들에게 가시화되지 못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내보이지 못하는 소수자들은 사회에 저항하지도, 편입되지도 못한다. 이에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성소수자들은 소설 속 맨움 해방주의자들의 선례를 따라 연대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성소수자들은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목소리가 없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도 잊게 되는 유령 같은 존재였던 소수자들은 연대함으로써 다수자 앞에서 목소리를 내게 된다. 억압에 대항하여 연대하고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다수자 중심적인 시스템에 저항하는 좋은 방식인 셈이다.

 

소수자 운동이 지향해야 하는 바는 목소리를 갖는 것, 수면으로 올라오는 것, 가시화되는 것이다. 근래의 성소수자 운동은 다방면으로 성소수자의 존재와 요구를 드러내어 왔다. 그에 답하여 최근 미국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 교황이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등 사회는 성소수자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런 만큼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향해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급진적이라는 비판 또한 나오고 있는데 이 비판을 다시 <이갈리아의 딸들> 통해 다루어 보겠다.

 

이갈리아에는 맨움 해방운동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맨움 해방주의자들은 주석이나 행간을 읽음으로써 맨움 해방운동의 역사를 읽어낸다. 그렇게 읽어낸 사건들 중 하나는 부당한 부성 할당에 저항한 부성 반대 캠페인이다. 이갈리아의 맨움들은 움이 그를 아이의 아버지라고 지목하면 아무런 조사 없이 아기를 떠맡아야 하는데 부성 반대 캠페인은 이러한 부조리에 저항한 운동이었다. 이런 부당한 부성 할당에 반대한 맨움들은 부성국 밖에 아기를 버리고 가버림으로 그에 저항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은 사회로부터 비난받았을 뿐 아니라 맨움들 사이에서도 야만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아이들을 학대했다는 혐의로 부성 할당에 저항한 맨움들은 광산으로 추방당했다.

 

부성 반대 캠페인에 대한 비난과 맨움 내부에서의 분열은 '노출이 과하다'며 퀴어 문화축제를 반대하거나 '너무 이르다'며 동성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성소수자 운동에 대한 비난 속에 논리성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보통 '지금의 성소수자 운동은 너무 극단적이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극단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다수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여주고 익숙하지 않은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극단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는 없다. 게다가 끊임없이 기존 사회의 구성원에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면 소수자는 망각되고 말 것이다. 잊혀진 소수자가 어떻게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물론 부성 할당제를 거부한 맨움들의 운동은 비난받아 마땅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은 극단성이 아닌 약자에 대한 폭력에 있다. 사회가 사회적 약자인 맨움에게 가한 폭력을 아기들을 내던짐으로써 저항하고자 하는 것은, 맨움보다도 약자인 아기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아기를 버린 맨움들은 누군가 아기를 데려가지 않으면 아기들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기들의 목숨을 맨움 전체의 권리와 교환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아기의 목숨을 내던질 권리가 없다.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가 가한 것과 같은 폭력을 약자에게 가해서는 안된다.

 

부성 반대 캠페인에 참여한 맨움들을 비난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약자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것일 뿐, 극단성과는 상관이 없다. 운동의 극단성을 정하는 것은 기존 사회의 다수자들이며, 소수자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상대 역시 다수자들이 만들어놓은 편견과 억압이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은 사회 운동은 존재할 수 없다.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얌전하게 움직여서는 사회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운동의 목적은 소수자들이 다수자들에게 불편함을 주어 그들의 주의를 끄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지를 얻어내기보다 먼저 그들이 소수자의 요구를 듣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기할 수조차 없다.

 

유명 인사들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고, 실제 정치가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만큼 성소수자의 인권과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에 반대하는 세력 역시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나는 그 이유를 성소수자들이 그만큼 가시화되었다는 데에서 찾는다. 다수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며, 사회를 바꿀 만한 힘을 갖지 못한 소수자들은 탄압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퀴어 문화축제를 막고자 하던 극우 기독교 세력의 개입이 폭력적이고 절박했던 이유는 근래의 성소수자 운동이 그만큼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시선과 지지를 모으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기득권을 가진 극우 세력이 가하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소수자 운동이 더 이상 소수자 내부에서만 맴도는 목소리가 아니라 사회를 귀 기울이게 만들 영향력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극우 기독교 세력의 불안한 반발은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증명이다.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소수자 운동은 실제로 세상을 바꾼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맨움 해방주의자들이, 미국 전역에서의 동성혼 합법화를 얻어낸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들이,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다수자 중심적인 사회로부터 반발을 끌어내고, 반발을 넘어선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소수자들은 연대하고 투쟁한다. 연대하여 존재를 증명하고 우리의 불편함을 내보이며 권리 증진을 요구하는 것, <이갈리아의 딸들>은 이것이 소수자 운동이 계속해서 나아가야 할 길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