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최근 설 연휴주간동안 <미디어펜>은 ‘동성애운동과 에이즈를 다시 생각한다’를 표제로 세 번에 걸쳐 염안섭 수동연세요양병원 원장·목사의 칼럼을 게재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 창달과 법치주의에 입각한 미디어 비평 인터넷 정론지를 표방하는 <미디어펜>은 조우석 KBS이사가 주필로 있는 언론사다. (한숨)

 

조우석과 염안섭이라니. 고백컨대 재차 상대하기 싫은 글이다. 다루자니 굳이 홍보하는 것 같아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증상들, 반복되는 논리 사이에 선동과 선전의 기운이 망울져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 연속기고를 통해 그는 에이즈환자에 지원하는 복지와 의료서비스가 ‘공산주의적 복지의 절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동성애와 좌파의 더러운 커넥션’이라는 뜬구름 잡는 얘기에 실례를 이렇게 가져다 아귀를 맞추는가 싶다.

 

 

위험한 사명


그는 말기 암환자를 대상으로 요양병원사업을 시작하다가 우연찮게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에이즈환자를 기꺼이 들였다고 말한다. 속내야 어떻든 그의 아름다운 의도 자체에 굳이 생채기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사명으로 받아들인 에이즈환자에 그는 노상 ‘비참’, ‘불행’ 등의 수식을 갖다 붙인다. 그걸로 모자라 ‘항문성교’와 ‘강간’ 등 편협한 관점으로 추호의 망설임 없이 에이즈환자를 낙인찍는다. 사명감을 단단히 하기 위한 전술일까. 그의 언어는 사명을 앞세워 에이즈환자의 존엄을 벗겨낸다. 에이즈환자의 맨살 위에, 간병인의 맨몸에 불명예를 붙인다. 그의 사명에 타인의 존엄은 찾을 수 없다.

 

이제는 사명에 명분을 구하려는 듯 족보를 찾는다. 연재 중 그는 왕왕 독립군 국가유공자였던 자신의 조부를 소환한다. 보기에 다소 뜬금 없는 접근이다. 에이즈보다 애국자가 중요하다 굳이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가? 나라 찾아 목숨 바친 할아버지와 목숨 걸고 국가 전복하는 무리들을 드라마틱하게 대비시키고 싶었던 건가? 같은 남성 간 관계 위에 동성 성애와 부자삼대를 경합시킨 데에는 어떤 저의가 있는지. 오이디푸스 삼각형으로 난잡하게 작도하고픈 마음 굴뚝같지만, 그가 내세운 족보의 의미를 집안 과시로만 보기에는 심상치가 않다.

 

문장을 인용하면 이렇다. ‘국가유공자 등 이 나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했던 분들보다 남성간의 항문성관계에 중독이 되어 에이즈에 이환된 분들에게 더 귀한 대접을 하고 있는 게 과연 정상인가?’ 국가유공자와 에이즈환자를 병치시키는 그의 문장은 단순한 ‘애국 비지니스’로 평가할 수 없다. 국가유공자와 아버지가 가리키고 있는 표층집단이 누구인지 상상해보라. 그의 언급은 재향군인회, 어버이연합 등 보수우익 행동대의 버튼을 고의로 누르는 다분히 선동적이며 위험한 레토릭이다. 뿌리까지 따져가며 혐오선동을 부추기려는 전략이다. 폭력적이고 그 자체 폭력인 문장이다. 그의 선전선동이 먹혀 들어간 이후 발생 가능한 그림들은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다.

 

 

사명의 정반합

 

그는 계속해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자신의 조부는 국가에서 지정해준 병원을 군말 없이 다녔는데, 에이즈환자는 지정병원을 거부하더라는 말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동안 염원장의 논지는 엄연히 에이즈환자에게도 지정 병원(수동연세요양병원, 그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이다)이 있는데, ‘동성애에이즈 운동가’들이 굳이 개입하여 지정병원을 철회하고 국공립병원을 만들라고 국가에 협박한다는 것이었다. 한데 이번엔 논조가 바뀌었다. 칼럼에서 그는 민간요양병원에 에이즈환자가 들어가면 ‘옆에 계신 면역력이 약한 노인환자에게 감염될 수도 있’으니 ‘아무래도 전국에 산재한 국공립요양병원 23개소를 지정하여 에이즈환자들을 돌보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 보인다’고 완전히 반대의 제스처를 취한다.

 

어쩌다 입장을 선회한 걸까. 연재를 시작하기 한달여 전, 2015년 12월 23일 (보건복지부령 제 375호) 의료법 시행규칙(이하 의료법)이 일부 개정된 바 있다. 개정된 내용은 전국 민간요양병원에 에이즈환자가 입원을 원할 경우, 병원이 이를 거부하면 진료거부로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미디어펜> ‘편집자 주’가 밝히듯 애초 연속기고의 동기도 의료법 개정이다.


논지를 다듬고자 그는 노골적으로 소설을 쓴다. 그에 따르면 의료법 시행규칙이 개정된 데에는 ‘동성애에이즈단체의 집요한 압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차피 국민혈세로 죽을 때까지 에이즈환자의 노후를 보장하게 되었는데, ‘국립요양병원을 에이즈지정병원으로 정해 그곳에서만 입원하게 하면 환자입장에서는 지정병원 중에서만 골라 가야 되니 선택권이 제한되어 인권침해’라고 주장한다는 이야기다.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에이즈환자는 병원을 선택하지 못해 불만을 가질 정도로 여유 있고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상황은 정반대다. 열악한 시설과 인권침해로 사망사건이 뒤늦게 드러나고 수동연세요양병원의 지정병원을 철회한 직후, 에이즈환자를 받아주는 요양병원은 국공립과 민간병원을 통틀어 어디에도 없었다. 에이즈 환자와 가족들은 이들 앞에서 콧대를 높이는 병원 눈치를 보며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입원 거부로 가시화된 질병의 편견과 혐오 앞에 당사자들의 생존은 길바닥으로 내팽겨쳐졌다. 이에 HIV/AIDS인권단체와 감염인커뮤니티는 에이즈환자의 건강권과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립요양병원 설립을 주장했다. 지리한 추문과 공방 끝에 보건복지부는 국립요양병원을 설립하는 대신 의료법을 개정했다.


염안섭원장의 주장처럼 국가는 일개 ‘동성애에이즈단체’의 압력으로 좌우될 상대가 아니다. 외려 의료법 개정에 대해서는 국가가 요양병원 책임의 무게를 민간요양병원으로 넘긴 데 의도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설득력 있다. 대한노인요양병원협회 총무이사를 겸하고 있는 그로선 민간 요양병원의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 없기에, 민간요양병원이 책임을 떠안느니 차라리 국공립요양병원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자충수가 그리 이상한 처지도 아닌 셈이다.

 

한편으로 그의 태도변화는 민간병원사업에 국가가 조금이라도 개입하는 것이 저들에게 어떤 압력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그만큼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며,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는데 있어 의제를 선점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의료법이 개정되었을지라도 국가의 지속적인 관리와 모니터링이 없다면 에이즈환자를 기꺼이 받아줄 민간병원은 없을 것임이 불 보듯 뻔하다. 국가의 모르쇠 속에 민간요양병원의 에이즈환자 배제가, 동성애-HIV/AIDS혐오가 득세한다.

 

 

선동하는 사명

 

칼럼이 겨냥하는 타깃은 HIV/AIDS와 남성동성애자 프레임을 넘어선다. 그는 요양병원 너머 에이즈감염인의 장애인 지정 논의와 성전환수술 비용과 호르몬치료의 보험적용 논의까지 끌어온다. 그 결과 성소수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국민 세금을 종합세트로 좀먹는 난봉꾼으로 치부된다.

 

‘물론 에이즈환우들을 향해 적절한 지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염안섭원장은 일말의 인정을 베푼다. 그러나 곧바로 남성동성애자가 에이즈 걸릴 확률이 750배라는 이상한 수치를 들며 치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이라는 주장으로 급히 논지의 균열을 봉합한다. 에이즈는 남성동성애자의 질병이라느니, 동성애는 후천이라느니 장광설을 쏟아내고, 그를 비난한 ‘동성애인권운동가’를 싸잡아 공산주의자로 매도한다. 다시금 우리의 동료활동가 ‘곽ㅇㅇ씨’와 ‘정ㅇㅇ씨’의 프로필이 복기된다.

 

속세에서 에이즈혐오는 더 이상 도덕으로만 승부내기 어려운 질병이 되었다. 의학이 발전하고 치료접근권이 넓어지면서 질병혐오에 대한 명분은 장식으로 남는다. 하지만 허울뿐인 혐오의 명분에 규범과 자본권력이 결합한다. 도덕규범과 자본의 싱크로는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혐오를 시대정신으로 실체화한다.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제기할 자리에 열패감으로 점철된 '역차별'과 ‘무임승차 논리’가 들어선다. 이들에게 성소수자 시민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성소수자는 현재 한국사회에 적용되는 제도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위의 관점에서 비시민으로서 성소수자가 요구하는 정책들은 혈세낭비이자 공산주의 정책일 뿐이다. 한발 더 나아가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일말의 정책들은 필사적으로 삭제되어야 하고, 성소수자를 언급하는 인권은 그 자체로 부정됨이 마땅해진다. 예의 관점 하에 ‘국내에서 치료비, 입원비 전액에 간병비까지 지원받는 병은 에이즈밖에 없’으며, ‘본인이 에이즈환자인 간병사’들은 ‘환우 1인당 180만원의 현찰이 간병비로 지급되고 있고, 이것은 모두 국민의 혈세’라는 논지가 힘을 얻는다. 의료민영화의 수순을 밟고 있는 공중보건은 혐오 비지니스에 취약하며, 그 안에 성소수자는 들어설 수 없다. 성소수자도 엄연히 세금을 내고 의무를 다하지만, 이들의 고려사항이 아니다.

 

 

사명, 사실무근


이 모든 이야기들이 ‘사명’으로 꿰어진다. 사명이 객관적으로 수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연구자료들이 따라오기 마련인데, 활용자료의 내용부터 인용방식까지 바람직한 지점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단적으로 국내에서 처방되는 항바이러스제의 가격이 한 달에 600만원이 든다는 사실들이 일반화된다. 하지만 환자와 감염인마다 몸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는 불가능하다. 감염내과 의사를 통해 평균비용을 전해들었다고 하지만 공식적인 근거일 수 없으며, 일반적인 평균치라 증명할 길도 없다. 이는 앞서 ‘남성 동성애자가 에이즈에 걸릴 확률은 남성 이성애자에 비해 약 750배 높다’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통계의 인용으로 반복된다.[각주:1] 그런가 하면 에이즈환자의 조기 사망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전체 국민진료비 8%를 차지한다는 연구결과가 ‘에이즈 비용은 전체 국민진료비의 8%를 차지한다는 식으로 둔갑한다.[각주:2] 에이즈환자가 발병 후 3.6년 이내 사망한다고 추정할 경우 잃게 되는 기회비용으로서 ‘총 생산가능액’이 ‘에이즈비용’이라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악용되는 것이다.

 

수치만으로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것 자체에도 맹점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치료와 의약품 지원에 드는 예산이 세금으로 편성되는 것을 문제 삼을 수 있을까? 감염인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국민혈세를 쏟아붓는 '무임승차'라 폄하할 수 있을까? 질병에 대한 혐오가 질병당사자의 사회참여와 생계활동을 단절시키는 상황에서, 국가의 지원은 국민의 건강과 질병예방을 위해 당연히 이뤄져야 한다. 국민이라면 생존권을 보호받아야 하고, 의료접근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문장이 굳이 강조되어야 하는 상황이 개탄스럽다. 인권감수성이 퇴보하고 혐오가 횡행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정책을 축소하는 것은 사회적 소수자가 생존하는데 지속적인 위기를 방관하고 조장하며 이들의 존재를 삭제한다. 여기에 헛된 사명은 고착된 불평등 위에 위선을 뿌린다.

 

 

2014년 김무명씨 추모제 '나 여기 있소' 중. 사진출처: KBS 2TV 추적 60분, '얼굴 없는 사람들 - AIDS 환자의 눈물'

 

 

 

타인의 존재를 밟고 올라온 사명은 오명일 수밖에 없다. 그의 연재에서 동성애 에이즈 활동가들이 ‘시체팔이’ 한다는 표현이 붙었다. ‘성소수자에이즈단체가...살아있던 김ㅇㅇ님이 이용가치가 없었더라도 이미 죽은 김ㅇㅇ은 활용할 가치가 있었다고 판단했는지’ 에이즈 요양병원을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그의 비아냥은 사실 여부를 떠나 듣는 이로 하여금 불쾌와 모욕을 준다. 성소수자는 여느 계층과 소속집단에 비해 자살률이 높다. 떠난 이를 기억하고 이들의 죽음으로부터 사회의 혐오와 차별을 문제 삼는 시도들은 성소수자 운동 역사에서 반복되는 슬픔의 한 축이다. 이를 ‘시체팔이’라 일컬으며 비아냥대던 저열함은 기실 차별선동가들의 단골메뉴였다. 이는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존재의 정동을 짓밟는 표현이다. 저들의 표현 아래 에이즈환자는 비참하고 불쌍할지 모르지만,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자리를 요구하면 곧장 더러운 난봉꾼으로, 체제 전복세력, 공산주의자로 치부한다.

 

가끔 생각한다. 차라리 사명의 훈장을 떼고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것이 보다 솔직하지 않을까? 나는 종교지향적인 사람이 아닌지라 사명의 깊이가 무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명이 타인에게 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오명을 착취하여 획득한 사명은 뱀의 혀와 같다.

 

<미디어펜> 연재를 통해 염안섭 원장은 에이즈와 동성애 뿐 아니라 성소수자의 인권과 의료복지제도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불쾌한 글이지만, 덕분에 차별선동의 칼날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더듬어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김ㅇㅇ님의 죽음을 문제 삼아야 할 명분이 더 두터워졌다. 감염인의 죽음마저도 시체팔이로 매도해버린 ‘사명’의 무게에 우리는 끊임없이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혐오의 악어눈물이 아닌, 혐오와 낙인 아래 바닥에서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이들이 응당 누려야할 권리다.

 

 

 

 

 

 

  1. 호림, <과학은 우리의 편입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 ‘랑’, 2015. 8. 25. 참고. http://lgbtpride.tistory.com/1051 [본문으로]
  2. <에이즈 비용 전체 진료비 8% 해당> 병원신문, 2001. 11. 11. 기사제목은 내용과 달리 추상적이고 오해하기 쉽다. 염원장은 기사 카피를 악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http://www.kh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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