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용(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역대 폭염 속에서 죽어가던 중 어느 날, 핸드폰에 연락이 왔습니다. <행성인 인권캠프 안내>. 그제야 저는 녹아내리는 머리로 멍하게 기억했습니다. 아 맞다. 나 행성인 캠프 신청했었지… 행성인이 아직 동인련이던 시절 마지막으로 간 엠티를 끝으로 한동안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아 오랜만에 얼굴도 비추고 활동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신청했었는데, 날씨 탓인지 반쯤 망각하고 있던 것이죠. 분명 신청할 때는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결국 저는 출발하는 아침에 늦잠을 자고 모든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야 맙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때 고생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어린 사과를 전합니다.
 
결론적으로 <행성인 인권캠프 ‘인권, 몬GO?!’>는 제 기대를 절대 저버리지 않고 (그리고 망각과 지각이 정말 정말 죄송해질 정도로) 즐겁고 알찼답니다. 버스에서 내내 좀비처럼 졸다 내린 수련원은 평화롭고 넓더군요. 서울의 빽빽한 건물들 속에서 폭염을 나다가 수련원으로 오니 왠지 날씨도 덜 더운 것 같기도 하고.
 

수련원에서 바라본 풍경


식사를 마친 후 중강당으로 이동해 오프닝 프로그램을 들었습니다. 조별로 동그랗게 모여앉아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약속’을 함께 나누는 과정이었답니다. 단체 모임이나 행사에 처음 나갔을 때, 별 것 아니면서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 게 자기소개인데 행성인에서 열 가지의 소개 선택지를 주어서 참 좋았습니다. 각자의 관심 분야나 싫어하는 것, 정체성, 자기 전에 하는 일을 골라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약속’에서는 즐거운 인권캠프, 나아가 즐거운 행성인 활동을 위해 무엇을 지키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기본적으로 서로 존댓말을 나눌 것, 타인의 정체성을 존중할 것, 소수자 비하적인 언어를 조심할 것과 같은 약속을 함께 읽어보고 이 항목에 관련된 개인의 경험담도 이야기했답니다. 그 외에도 추가되어야 하는 항목들도 제시했었는데, 저희 조는 외국에서 온 분이 계셔서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노력하기’ 가 들어갔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영어를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을. 그래도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다른 조에서는 ‘상대가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은 하지 않기’ 와 같이 우리가 깜박했던 중요한 항목도 제시했더라고요.


 

함께 논의하여 추가 반영된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약속'

 
이후 이어진 메인 세션에서는 ‘2016 한국 사회와 인권 그리고 성소수자’를 주제로 이야기했어요. 나에게 인권은 어떤 것인가 포스트잇을 통해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이신 명숙님의 강의를 듣는 시간이었답니다. 최근에 한국 사회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일본 장애인살해, 미국 성소수자 클럽 테러와 같은 외부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나갈 수 있을까 함께 생각했어요. 포스트잇을 통해 회원들 각자의 생각을 수렴해주시고 함께 대화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답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선택 섹션이 있었습니다. 혼인평등과 여성주의, HIV/AIDS, 차별금지법 넷 중 하나를 골라 이야기를 듣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저는 인간이 분신술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오래 고통스러워하다가 중강당에서 진행되는 여성주의를 골랐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이틀 동안 중강당 안에서만 놀았네요.) 진행은 ‘언니네트워크’ 활동가이신 더지님께서 해주셨어요. 작년 메갈리아가 처음 생겼을 때 그 활동을 지지하다가 이후 게이 논쟁이 이어지며 어딘지 모를 불편한 감정이 생긴 상태였는데, 선택 세션에서는 왜 이런 논쟁이 생겼는지 미러링과 관련시켜 차근하게 설명해주어서 좋았어요. 메갈리아는 곧 저항의 언어이기 때문에 이것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었고요. 이런 대화가 당장에 어떤 것을 바꿀 수 없다고 해도 저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되돌아볼 수 있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인가? 그래도 좋았답니다.

 

선택세션 - 여성주의 강연을 하고 계신 더지님 선택세션 - HIV/AIDS 강연을 하고 계신 정욜님

 

뒤풀이를 하면서 다시 조별로 퀴즈시간이 있었어요. 행성인 인권캠프에서 나누어준 책자와 프로그램에 관한 퀴즈를 풀고, 가장 많이 맞춘 조대로 술과 안주를 고를 수 있었답니다. 쉬울 것이라고 천진하게 생각하고 안주를 뭘 골라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문제들이 너무 예상 바깥이라 당황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김조광수 감독의 결혼식 날짜를 맞출 수 있는 것인지, 대체 이갈리아의 딸들 작가의 이름은 무엇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 조원들은 이 문제를 맞추는 것인지. 정말이지 행성인 회원분들의 기억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저 혼자였다면 단 하나도 맞추지 못했을 텐데, 역시 집단지성이란 위대해요. 사케는 참 맛있었고, 옆 조에서 받아온 와사비콩과 안주들도 훌륭했답니다.

 

이후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신나게 놀고 마시고, 처음 만난 분들에게도 열심히 친한 척 하며 대화했습니다. 행성인에 얼굴을 비춘 지가 너무 오래되어 어색하고 민망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도 처음 뵙는 분들도 친절하게 잘 받아주셔서 감사했어요. 낮부터 열심히 인권 프로그램을 들어서 간만에 공부를 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는 했는데, 과연 밤에도 잘 놀 수 있을까 했던 제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즐거웠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떠나기 전,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젯밤 같이 놀던 사람들 상당수가 피곤해보였습니다. 일단 저부터 마무리 프로그램 직전까지 쓰러져 있었네요. 음, 스탭들이 아직 방에 누워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생각했던 기억도 나고. 행성인 인권캠프의 소감을 나누고, 내가 이 캠프에서 무엇을 기대했는지 어떤 것이 기억에 남는지, 앞으로 행성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다함께 이야기했어요. 행성인 인권캠프의 이벤트, 인권몬 마스터! 도 있었고요. 행성인 인권캠프의 이름이 <인권몬 Go?!>였던 만큼 수련회장 곳곳에 메타몽으로 위장한 혐오몬과 혐오몬으로 위장한 인권몬이 숨어있었답니다. 혐오/차별몬 일곱 마리를 먼저 찾아 사진으로 보내주는 선착순 다섯 명에게 선물을 주는 이벤트였는데, 대체 이것을 어떻게 숨기신 것인지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찾으신 것인지 저는 아직도 감탄할 뿐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셔서 딱 네 마리 찾았어요. 공중전화부스 아래에 붙어있거나 자판기 뒤(앞도 아니고)에 숨어있는 혐오몬을 보며 저는 스탭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라 힘드실 법도 했는데, 여기저기 다니시며 프로그램을 챙기시고 사람들도 챙겨주셔서 감사했어요. 수련회 측 잘못으로 갑작스럽게 수영장을 쓸 수 없게 되었는데, 끝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신 것도 감사했고요.

 

혐오몬 - 의도치 않게 차별과 혐오를 담고 있는 말들을 한다 인권몬 - 인권을 생각하는 몬스터!

인권몬 가슴에만 하트가 그려져 있는데,

결국 아무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해 '인권몬 마스터' 기획자가 서운해 했다는 후문.

 

동인련이 행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가본 캠프였는데,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학교에 다니고 일을 하느라 활동이 매우 뜸했었는데 앞으로 더 행성인에 자주 나와야겠다 생각도 했고요. <행성인 인권캠프 ‘인권몬 GO?!’>를 기획해주신 분들, 스탭분들, 후원해주신 분들, 저와 함께 놀아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제가 감사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나요? 하지만 정말 고마웠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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