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올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담론이 크게 존재하지 않는 폴리아모리에 대한 글은 오로지 저의 생각으로만 쓰였다는 것을 알립니다. 다른 폴리아모리스트들을 포함하지 않으며, 논리상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폴리아모리는 아직 저도 계속 생각해 나가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연애 정상성: 나는 폴리아모리를 지향한다

 

"연애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나와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것' '무슨 일이 있을 때 연락할 것', '갑자기 연락이 끊기지 말 것', 그리고 '나 이외에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지 말 것' 등 "연애하자!"라는 말로 이 수많은 약속을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연애에 정상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리아모리에 대한 글이기 때문에 연애 정상성 중 하나인 ‘1:1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랑 사귀고 있는 것은 아닌데 썸을 타는 사이에 데이팅 어플을 통해 메시지가 왔다. 그리고 그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싫지는 않다. 하지만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내가 썸을 타고 있을 때 이 사람들의 연락을 받아선 안 되는 것일까?’ 이런 압박을 느끼는 것은 썸을 타는 사람과는 연애를 바라보고 있고, 연애는 1:1로 해야 한다는 정상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친구는 “나는 한 사람만 사랑하지 않고, 누구랑 사귈 때 다른 사람이 좋아지기도 하는데, 이런 내가 너무 미워”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자신 때문에 자신을 혐오하는 것은 분명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애인에게 ‘다자연애’를 제안해보라고도 말하지만 “어떻게 그래? 미쳤어?”라고 말할 정도로 사회에서 다자간 사랑을 인정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연애는 ‘당연히’ 1:1로 해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아직도 누군가는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을 혐오하거나, 애인을 속이고 바람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사랑은 항상 다방면으로 존재했다. 여기서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하다. 나에게 사랑이란 행복한 감정을 주는 존재에게 느끼는 두근거림이다. 이런 나의 사랑의 관점으로 보면 나는 '인간'만을 사랑하지 않는다. 때로는 인간보다 비인간 생명체에게 더 큰 사랑을 느끼곤 한다. 한 나무를 사랑하기도, 집에 있는 바퀴벌레를 사랑하기도 한다. 이런 나의 사랑은 당연히 여러 존재에게 흐른다. 나무를 사랑하면서 바퀴벌레를 사랑한다. 인간을 사랑할 때도 같다. 저 남자를 사랑하면서 저 여자를 사랑한다. 이때 들려오는 말은 대부분 일관된다. "A를 사랑하고 있을 때 B도 사랑하게 되면, A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 아니야?" 아니다. 나무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해서 바퀴벌레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해서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 이외에 다양한 존재를 사랑했기 때문인지, 사람을 순위적으로 사랑하거나 한 존재만 사랑하는 것으로 사고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 매우 어색했다. 그래서 여러 과정을 거쳤고, 언어와 논리를 획득했으며 그것이 폴리아모리라는 것을 알았다.

 


 


 

질투

 

처음 연애를 할 때 날 당황하게 한 것은, 질투를 사랑의 한 표현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애인은 질투가 없었던 나에게 계속 질투를 요구했다. “나 오늘 엄청 잘생긴 사람 봤어”라는 말을 할 때, 내가 질투하지 않은 건 애인을 서운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 대한 사랑이 없어지지 않을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으므로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질투심’이 왜 생기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냥 나에게는 없던 감정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일은 나도 행복한 일이었다.
 

 

사랑은 순위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은 순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1위로 사랑하는 것과 2위로 사랑하는 것. 이런 식의 사고는 ‘감정을 논리로 풀어내고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언어로 표현하고 논리로 만들어내기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나는 사랑이 시간과 공간 속에 유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랑을 상상할 때는, 내가 가운데 있고 그 공간에 거미줄처럼 사람들과의 관계가 존재하고 그 관계를 사랑이라고 판단해낸다. 거미줄 같은 사랑의 형태에서 순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저 사람과도 저 나무와도 저 공간과도 사랑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사랑을 정량화하는 사고

 

비트윈’이라는 연애하는 사람 간에 사용하는 어플은 사랑을 수치화한다. 애인과 하루 동안 메시지를 주고받은 양, 전화한 양, 데이트한 양의 수치화. 나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 사람과 보내는 시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정량화할 수 있다는 전제 속에 어느새 감정도 정량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다. “A가 좋아? B가 좋아?” 둘 다 좋다. 그리고 그 사랑은 A에게 더 많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B에게 더 많은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랑은 그냥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며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뇌와 뉴런 프로세스로 받아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독점성의 선물

 

친밀도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만 흐르면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부분을 애인이 모두 채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사이에 다름이 존재한다. 그 다름은 연애를 할 때 마찰을 불러오기도 한다. 카톡을 잘 안 하는 사람과 카톡을 계속하는 사람의 연애 관계가 생겨나고, 이런 다름 때문에 사이가 악화되는 케이스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폴리아모리 연애에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기 수월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카톡을 자주하며 사랑을 나누는 사람의 경우 다른 사람과 카톡을 하면 된다. 그리고 카톡을 잘 안 하는 애인과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면 그뿐이다. 다름이 존재하기 때문에 관계가 악화된 경험들을 볼 때 나는 폴리아모리가 비독점성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1:1 연애를 하는 폴리아모리스트

 

폴리아모리(polyamory)는 다자연애라고 주로 번역되지만 정확한 뜻은, 다자간 "사랑"이다. 다자연애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다자를 사랑하는 것, 그게 폴리아모리라면 폴리아모리는 나에게 있어서 굉장히 당연한 것이다. 나는 당연히 다자를 사랑한다. 논리적으로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존재하는 나의 일부분이다. 이런 생각에 근간을 두면, 결론적으로 다자연애로 합의 보지 않고, 1:1 연애로 합의를 보았다고 해도 폴리아모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자를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고, 질투심을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1:1 연애를 할 수 있다. (그것도 매우 로맨틱하게). 폴리아모리스트는 1:1 연애의 정상성을 부순다. 그러므로 서로가 생각하는 연애에 대해서 합의를 본다. 그 안에는 1:1 연애를 할지 다자연애를 할지가 포함된다. 따라서 더욱 다양한 형태의 연애가 생겨날 수 있다. 
 

폴리아모리. '바람 피우는 것 아니야?"라고 사회적 혐오 받기 일쑤지만, 우리는 합의를 보고 다자간의 사랑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한 명하고만 해야 한다는 정상성에 갇힌 언어를 다시 한번 고민해보고, 폴리아모리의 존재를 지우고 있지는 않을까 고민하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그냥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말기"일 뿐이다.

 

(한 명과도 연애를 못 하는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자괴감들고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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