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벗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모든 인간의 평등함과 각 개인이 지닌 인격의 고유성, 그리고 이로서 갖는 존엄과 권리가 명문화되어 있는 헌법이라지만, 그것을 읽어나가다 보면 나의 존재는 그 낱말들 사이로 크게 빗겨나가곤 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말은 오래 전부터 헌법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그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서 발견하는 존엄과 인간성은 헌법의 언어로 구성된 그것과 세월의 온도차가 느껴졌다. 1987년 9차 개정을 끝으로 30년 넘게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헌법은 급격히 변화하는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를 1987년 체제에 끼워 맞추도록 종용하는 것 같다.

 

성소수자이자 대학생, 아르바이트 노동자 등 내가 가진 수많은 정체성들에 대하여 국가는 나를 온전히 인정하고 존중하며 받아들여 왔을까? 현재의 구체적 삶을 사는 내게 헌법은 내가 그 삶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차별과 혐오들에 맞서 방패가 되기도 했지만, 칼날로서 돌아오기도 했다. 세월 속 다변하는 나이, 직업,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 등 오늘까지의 내가 있기까지의 정체성들을 모두 아우르지 못하는 1987년에 머무르는 헌법은 그 나열된 언어들 속 공백에 나를 끼워 넣어 숨길을 주물렀다.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이 현재를 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할 때, 그 헌법은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 혹은 여성만이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온전히 자리할 수 있으며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시작이 1 혹은 2, 3 혹은 4만이 존재하며 그것으로 성별을 구분해내는 이 사회 안에서, 1과 2 그리고 3과 4 사이 그 불명확한 자리에 놓여 있는 나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존재와 그 목소리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자체로 부정되어 가고 있지 않는가? 헌법에 규정된 ‘국민’ 안에 나라는 인간은 성소수자로서의 나의 존재를 드러낼 때 반쪽짜리 국민이자 인간이 된다.

 

어릴 적 내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한 이후, ‘왜 나는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나는 스스로가 틀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사회엔 이미 정답이 존재해 있었다. 성별과 나이에 맞게 정해진 패턴들이 많았고, 그 패턴을 따르는 게 곧 도리였다. 이 이야기가 나는 헌법과 전혀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헌법에 아동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의사의 표현과 결정에의 참여 등에 관한 권리를 갖는다는 정도의 조문이 명시되어 있었더라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내가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에 지금은 결여되어 있는 아동에 대한 권리 등이 갖추어졌었더라면, 나는 이 ‘왜’라는 질문들을 수치심과 함께 던질 필요가 없었는지도, 심지어 이 글을 쓰지 않고 그럭저럭 잘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부정적 편견으로부터 야기된 수치심을 내재화하면서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검열하고 억압해왔던 것 같다.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외로이 방황할 수밖에 없었음에, 내가 일찍이 나를 더 탐색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기회를 박탈당했음에, 미진한 헌법의 책임도 한몫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저 나의 개인적인 억울함을 탓하기 위한 대상화일 뿐인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지금의 헌법을 좋아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 속한 국민으로서 나의 존엄과 권리를 여전히 말은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정체화한 ‘나’라는 인간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의 헌법에 애증을 느낀다.

 

헌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워본 게 언제일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금 읽어도 지루하기만 한 헌법조문을 과거 중고등학교 당시에 배웠어도 지금까지 기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간단하게나마 법 위의 법으로 이해되는 헌법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저 시험공부의 일환으로서 개념을 배워 익히고는 이내 잊어버렸을지 모른다. 물론 그저 딱딱한 문자들이 나열되어 어렵게만 여겨지는 헌법에 관심을 던지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기도 하다. 그럼 적어도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가치들에 대해서 우리는 학교 안에서 제대로 배워본 적은 있었을까? 인권? 성평등? 그 가치가 담긴 교육을 난 만난 적이 없었다. 헌법에 담긴 인권의 차원에서 교육이 먼저 행해졌더라면 이를 명문화시킨 헌법에 대해 부족한 관심이 조금은 생기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심각한 문제였다. 헌법이 추구하는 존엄성, 평등, 정의 등의 자연법적 가치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의무교육 안에서 제대로 접해보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다만 학교라는 곳은 인권, 평등이라는 가치가 발 딛을 틈 없이 오히려 입시준비라는 조류에 휩쓸려 매일 경쟁하고 평가받고 점수가 매겨지던 삭막한 공동체였을 뿐이었다.

 

나는 그 결여된 공동체성을 종교 집단에서 그나마 채울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닌 나의 경우에는 규범으로서 한국의 법체계보다 교리(敎理)가 더욱 크게 작용했다. 인류의 시초라 일컫는 아담과 하와가 남성과 여성으로서 서로 결합하여 혼인관계를 맺고 그 자녀를 낳아 민족을 꾸려나가는 창조설,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신의 아들인 예수 이 셋이 이룬 성가정 공동체, …. 서구의 창조설화와 성가정의 개념 등은 내게 믿음으로 매개하여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부여하고 그것을 공고화하였다. 그렇게 혼인의 개념에는 이성간의 결합만이 유일한 표지였다. 동성에게만 성적 이끌림을 경험한 나는 교리가 곧 진리인줄로만 알고 정상성에서 벗어난 내 감정들을 모조리 부정했다. 신앙으로부터 기인함으로써 그것은 구체적으로 논의될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맹목적인 자기혐오로 일관되게끔 만들었다. 나는 교리라는 교회의 시각을 내게 투사시켜 스스로를 검열하고 진단하는 도구로 이용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보편적 인권의 개념에 앞서 교회의 언어인 교리를 삶의 최고 규범으로 두고 살았다. 인권과 성평등 교육이 결여된 학습능력 중심의 의무교육과 전통적 관념으로서의 이성간의 혼인만을 인정하는 교회 안에서, 나는 그 편협한 내용의 일방적인 은행저금식 정보 주입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 스스로를 탐구하고 알고 학습할 기회조차 받아보지 못했다. 그저 미숙하고 어리기만 한 아이는 반(半)인간으로서 주체성을 박탈당한 채 많은 것들이 강요되었을 뿐이었다.

 

각 사회와 집단에 따라 풍습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혼인 형태(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다부일처제)가 존재하였지만, 관념적으로 혼인은 남성과 여성간의 결합이 일반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이에는 종교문화적인 영향이 다분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사회는 깊이 뿌리내린 유교적 심성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성별, 신분, 지위 등에 따른 제 고유한 위치와 역할이 나의 일상 속 기저에 또한 분명하게 깔려 있어서 나는 그로부터 지금까지도 자유롭지 못하다. 성별로 따져 간단한 예를 들자면 남성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주도하는 고유한 헤게모니가 주어진 양의 존재였고, 여성은 그 역할이 철저히 가정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음의 존재였다. 이처럼 음양오행 등과 같은 남녀 간의 결합에 충분한 근거로 작용하는 그 가르침들은 과거로부터 거슬러 올라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쳐왔다. 때문에 한국사회 안에서 에로스적 사랑과 동성 간 결합은 상당히 터부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유교 자체를 악마화하고 싶다는 건 아니다. (굳이 탓하자면 유교를 가부장적 제도를 도의적으로 성화하고 합리화해온 틀로 이용해온 권력에 위치했던 조상들일 것이다.) 그러나 성별이분법적으로, 혹은 성급히 일반화를 하게끔 빌미를 제공해온 그 종교문화적 특성에 대하여 책망을 아니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문제는 이 보수적인 심성이 고유하게 간직된 채로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여져 일부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서 토착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에 대해서는 미국 보수 개신교의 한국 토착화 과정 속 개신교가 한국 사회 안에서 정치적으로 어떻게 유의미한 권한을 행사해왔는지에 대한 이해관계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부족한 지면에는 따로 담지 못했음에 양해를 구한다.) 이는 곧 일부 보수적인 심성을 지닌 그리스도교가 한국사회에 공고히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문제는 성경은 그 전체가 문자 그대로 잠언(箴言)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전인 동시에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할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문자 그대로 쉽게 해석해 내버리는 근본주의적 행태에, 마찬가지로 그 언어들은 자체적으로 무오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일부 보수 개신교 집단의 혐오발언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다. 그렇게 문자들 사이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존재들은 정죄되어야 할, 지옥에 가야 하는 대상이 된다. 이 유효한 현상으로 많은 이들이 꺼내 들고 있는 것 중 하나가 ‘Homosexuality is sin’이라는 문구가 아닌가.

 

그들의 언어는 헌법을 통해서도 탄력을 받는다. 혼인의 개념에 대한 현재의 헌법상 규정도 사실 ‘양성’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둔다는 내용일 뿐 동성 간의 혼인에 대한 염두는 일절 없기에 그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을 두고 이성간 결합, 동성간 결합 사이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는 모양새가 어색하다. 하지만 ‘자녀의 출산’, ‘모성’의 관점에서 차이가 생긴다. 그 관점은 헌법 상 혼인 개념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일치하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자녀를 갖지 못하는 동성 커플에게 혼인의 기회를 박탈하는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 종교의 자유가 함께 명시된 헌법이기에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해당 종교에 속한 일부 사람들에게 한정되는 사정이라고 말하며 무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권을 언어화하여 국가 안에서 최고 규범으로 작용하는 헌법은 보편적이다. 헌법에 자신들만의 종교적 윤리적 규범을 적용시켜 다른 존재를 지우려는 작태를 일삼는 이들의 목소리가 유효하게 반영되는 작금의 현실이 개탄스럽기만 하다.

 

한국사회가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원불교, 천도교 등 종교 백화점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 이전에 헌법이 그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특정 종교가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일삼는 소수자를 향한 폭력은 정당화되고 있다. 게다가 헌법상 정교분립의 원칙이 천명되고 있음에도 특정 정당과 교계들은 결탁하여 소수자를 표적삼아 자신들의 존재를 공고히 다지는 중이다. ‘자유’가 소수자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에 이미 헌법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종교의 자유는 폭력을 동반하며 소수자들을 향해 휘둘러진다. 그렇게 일부 보수 개신교 집단은 헌법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며 개헌을 저지 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소수 당사자인 나는 막상 그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역시 헌법은 나를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보호해주지 않는다. 헌법 제7조에 나온 ‘봉사자’와 ‘책임’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오히려 정부기관은 나를 보호는커녕 가해 집단의 폭력을 제지하지 않고, 방관하고 침묵하며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정황 속에 그 국가기관을 나에 대해 ‘책임’지는 ‘봉사자’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나는 헌법상 종교의 자유만이 나의 자유를 저격하고 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1987년에 머물고 있는 헌법의 속에 부재한, 혹은 편협한 조항들과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그것이 사회의 기득권자들을 더 대변하고 옹호하는 도구로서 이용되는 일례로 ‘종교의 자유’라는 조항이 어떻게 작동되었을까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의 헌법의 언어들이 어떻게 사회의 기득권층, 특히 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강자들의 이해를 실현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만큼 오늘날까지 발전해온 인권의 내용을 헌법에 담기지 못했기 때문에, 권력 관계의 경험치를 쌓아온 일부 집단의 ‘자유’가 기본권을 지키는 것이 아닌, 타인의 기본권을 해치는 폭력의 당위로서 이용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더 이상 자유와 인권의 개념이 그들의 폭력을 합리화할 수 있는 기제로서 활용되지 않길 바란다.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해 개헌은 정말 중요한 의제가 아닐까. 개헌의 가능성을 당장 내다볼 수는 없는 일이지만, 개헌은 그 개념을 나와 우리를 그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온전히 권리를 보장하는 안전망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로도 이미 충분하기에 개헌 논의가 이루어지는 지금 내겐 그에 대한 경각심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많은 기대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당장 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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