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소수자노동권과 소수자감수성의 상관성 -
일생을 80년으로 잡고 시간표로 만들어 수치화할 경우 잠자는 시간은 26년, 일하는 데 21년, 밥 먹는 데 6년이 든다고 한다. 대개 이런 류의 통계는 ‘웃는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으니 많이 웃고 살자’는 식의, 다소 체념조의 싱거운 교훈을 전하기 위한 긴 서두로 그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데 있다. 바로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시간의 상당부분이 일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의 노동환경이 인생의 지표를 좌우한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그렇다면 인생에 점수를 매겨볼 때 우리는 만족할 만한 점수를 줄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감점사항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 것일까.
사람들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몇몇의 감점요인은 겹치기 마련이다. 가령 저임금, 감봉, 사원혜택 감소, 비정규직, 동료 간 불화 및 기타 등등의 항목들이 그 예이다. 더불어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이라는 사회적 소수자의 항목들 또한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단지 ‘요인’이나 ‘항목’ 따위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삶의 시간들은 간단하게 수치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부딪히는 제약과 차별들은 추상적인 문제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활 곳곳에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일어난다. 또한 문제는 한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들에 복잡하게 얽히면서 찾아온다. 그렇기에 노동권은 제 문제만 따로 떼어놓고 다뤄질 수 없다. 현실을 살아가며 시간을 안배하고 경제적인 상황이 개입되는 과정은 나의 생활양식과 감수성까지 좌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성소수자 노동권과 관련된 성소수자 자신들의 감수성에 관한 문제이다.
1.
가정, 학교나 직장, 군대와 같이 사람들과 관계하는 집단 속에서 많은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성정체성 또는 성적 지향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을 가로막는 제약들을 감수하면 별 탈 없이 상황들을 모면하거나 눈총 받지 않고 편한 생활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숨김과 부정의 태도들이 반복되어 어느 정도 인이 박혔다면 자신이 이반임을 감추는 건 별 어려움 없이 해결된다. 본인은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결혼은 안하고 이성관에 대해서도 집착이 없어 보이니 외부의 시선으로는 그저 ‘쿨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간혹 몇몇의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공적으로 드러낸다. 사방의 눈총을 받으며 다소 삐걱거릴 인간관계를 감수하더라도 속이는 것보다는 편하리란 판단이 선 것이다. 하지만 커밍아웃의 여부를 떠나 일단 아웃팅이 되었다면, 이들의 직장생활이 평탄치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성소수자의 꼬리표는 어디서든 눈에 띈다. 같은 만큼의 실적을 세웠다고 할 때, 성소수자라는 ‘옵션’이 보다 당신을 돋보이게 만들 런지는 모르겠지만, 실적이 아닌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을 경우라면 성소수자임이 확실히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자명한 바, 어쩌면 당신의 이름을 구조조정 일순위에 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에는 친 LGBT를 지향하는 글로벌기업들이 한국의 성소수자에게도 구애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조합조차 성소수자 권익보호와 관련된 사항을 제대로 명시해놓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 노동자들은 여전히 회사의 많은 혜택들로부터 배제됨은 물론이요, 입장을 피력하는 것조차 주변의 시선과 압력에 쉽지 않다.
나의 존재를 숨기고 드러냄에 상관없이, 성소수자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집단의 혜택과 규칙들이 이성애적 가족주의의 카테고리 안에서 이뤄짐을 감수해야 한다. 이성애 가족모델에 편중된 휴가, 경조사, 주택과 보험 제도들. 그리고 직무와는 상관없이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요구하는 성별이분법의 모델처럼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는 예의 상황들은 동료와 상사의 짓궂은 농담과 스킨십 등의 가벼운 해프닝에서 제도적 불이익으로, 협박과 해고의 위험으로부터 수치심을 유발하고 생존을 위협하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친다. 또한 성적 지향과 정체성, 더불어 다양한 감수성을 갖는 성소수자들 개개인이 체감하는 정도 역시 다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에 따른 부당성을 느끼고, 불만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은 이내 몸을 낮추고 체념한다. 현실의 제약들이란 대개는 심각하지 않은 일상생활 속에서 번다하게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것들이 태반일 것이며, 경제적 안정과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면 감수하는 것이 낫겠다는 손익계산이 끝났기 때문이다.
국익과 경제성장, 화목한 가정과 사내분위기라는 추상적이고 선전적인 캐치프레이즈의 이면에는 ‘대의’에 비해 보잘 것 없어 보이고 그리 중요해보이지도 않는, 하지만 분명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차별과 배제의 기제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소한 것들은 성소수자 노동자들의 존재감을 위축시키며, 불시에 우리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2.
비정규직의 성소수자라면 상황은 좀 더 심각하다. 대다수가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고사하고 회사의 혜택 ‘기준’에도 들지 못하며 시간제의 저임금수당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은 (‘비정규’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일터와 그리 깊게 관계 맺지 못하는 실정이다. 많은 것들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너무도 하찮아 보이기에 책임감이나 자부심 같은 건 느낄 수 없다. 하물며 이성애적 성별모델을 강요하는 환경 속에서 성소수자라는 나의 존재방식마저 드러낼 수 없다면 비정규직 성소수자들은 이중벽에 고립된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사회에 발을 두고 있는 다수의 성소수자들은 학생이 아니라면 비정규직이거나 계약직, 이도저도 아니라면 무직이나 취업준비자에 머무른다. 예의 환경들 속에서 ‘돈보갈’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기에 이른다. 부족한 프로필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수위에서의 지출을 일삼으며, 때로는 상대방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은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회자되면서 ‘이쪽 사람들은 코만 높지 실상은 알맹이가 없다’는 식의 희화화로 점철된다. 하지만 커뮤니티 내부에 돌고 있는 이 비난조의 자조 섞인 뉘앙스에 쉽게 동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변변찮은 경제수단을 가지고 있음에도 예쁜 옷을 입거나 비싼 취미를 가지며, 젊은 나이와 반반한 외모로 자존심을 바짝 세운다는 것, 굳이 저런 것들처럼 한시적이고 과시적인 성향이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부각시켜 출처 없는 자신감으로 도배하는 것이 성소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너무나 도도한 나머지 다른 사람이 안중에도 없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 ‘자신감’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삶을 버틸 수 있을까.
위와 비슷한 예를 TV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 종영한 ‘하이킥’에서 정음은 현실적인 측면에 있어 시트콤 속 여느 대학생들과는 조금 다른 캐릭터를 가졌다. 그녀는 구두와 옷가지를 사 입기 위해 카드빚도 마다하지 않았다. 통장잔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맘에 드는 것이라면 뭐든 가져야 직성이 풀렸던 그녀의 취향은 앞서 이야기했던 ‘코만 높은’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바닥을 드러낸 통장과 어정쩡한 스펙을 그대로 드러내며 졸업 이후 곧바로 맞아야 했던 취업난은 집안의 악재와 겹쳐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을 모두 내다팔도록 떠밀었으며, 부끄러운 자신의 처지는 남자친구와의 관계마저 끊게 만들었다. 시트콤답지 않은 현실 속에서 애교보다 눈물이 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갑자기 청승맞아진 그녀에게 냉랭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나마 정음에게는 넉넉하지 않아도 꾸준히 응원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헤어졌음에도 결국에는 그녀에게 돌아가려는 번듯하고 든든한 애인이 있었다. 베일에 싸여있던 스토리의 끝은 황당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지만, 하이킥은 정음에게 어엿한 부팀장의 자리를 ‘보상’해주며 그를 추억할 수 있도록 해줬다.
흔히 인생을 한편의 드라마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잘 짜여진 한편의 극일 뿐, 우리에겐 고통에 합당한 보상을 덥석 해줄 수 있는 운명의 연출자나 작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처절한 현실이다. 특히 일상생활 속 어디에도 쉽게 나의 존재를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성소수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의 돌파구를 찾기란 그리 녹녹치 않다. 데이트 상대 내지 웃고 즐기는 술친구들만 많아지기 쉬운 한정된 커뮤니티 속에서 성소수자들은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날수록 성소수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접고 현실에 타협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결혼과 안정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이겨내야 한다. 하물며 안정된 직장마저 갖지 못하는 상태까지 겹쳐 사소해질 대로 사소해진 존재감은 당사자들을 자괴감과 우울로 빠뜨리기 쉽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개인 각자를 한없이 작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그나마 사적으로 향유하고 만족하고자 하는 생활마저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나이를 먹을수록 사방에서 들어오는 압력과 불안정한 생활환경으로 말미암은 무력감을 견디지 못해 히스테릭하게, 혹은 방어적으로 변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기본적인 생활권마저 위협당하는 비정규직의 연령수위가 높아지는 현실에도 어김없이 ‘돈버는 배움’ 따위의 사회초년생 다독이는듯한 수식이나 ‘친서민 정책’과 ‘일자리 창출’을 약속하며 수만 개의 비정규직을 양산해내는 기만적인 뉴스거리는 우습게만 들린다. 이렇게 학을 떼고 나니 남는 건 기갈뿐이라는 언니들의 말이 틀린 이야기도 아니리라는 생각 속에서 우리에게는 많이 남지 않은 이쪽 선배들의 롤모델이, 그리고 ‘이 바닥’에서는 그렇게도 만들기 어렵다는 친구와 애인이라는 동반자와 공동체가 그토록 절실한 건지도 모르겠다.
변변찮은 경제력으로 커피는 전문점만 찾고, 사치품은 물론 화장품과 핸드폰 등의 일상생필품까지 브랜드를 고집하는 소위 ‘된장근성’이라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대개 분수도 모른 채 주제 넘는 취향으로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단정 짓는 것에 만족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일삼았던 소비의 방식을 반성하고, 대안적인 실천들을 만들어보자는 식의 다소 현실적응식의 결론을 내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당신의 존재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분에 넘쳐 보이는 듯한 취향들은 어쩌면 사소해진 우리들의 마지막 남은 분수를 고수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인지도 모른다.
結.
우리는 스스로를 사소하게 만들어버리게끔 하는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차별사항들에 대한 묵인으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소하게 취급된다. 아니, 살면서 응당 누려야 하는 사소한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만다. 물론 여기에는 체감하는 데 있어 각각이 갖는 정도차가 있다. 하지만 나의 형편이 다른 이들보다 낫다는 데에 위안을 삼으며 자위하는 것으로 그치는 태도는 스스로가 자신을 사소하게 만드는 현실에 타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소수자노동권의 쟁취는 단순한 손익계산의 싸움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성소수자노동권의 확보는 성소수자로서의 자존심회복을 위해, 존재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기 위한 문화적 실천과도 결부된 본질적인 투쟁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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