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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국내 인권소식

무지와 망각에 저항하는 성소수자 생애읽기- 2014 LGBT 인권포럼 <당신의 궤적> 성소수자 생애연구 발표 세션 후기

by 행성인 2014. 4. 1.

호림 (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 인권팀)


 


 

지난 2월 15일, 2014 LGBT 인권포럼에서 “당신의 궤적-성소수자 생애연구 발표”라는 제목으로 2013년에 진행된 두 연구의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가 있었다. 하나는 아름다운 재단의 지원으로 동인련 HIV/AIDS 인권 팀이 진행한 “40-60대 남성 동성애자 HIV/AIDS 감염인 생애사 인터뷰 프로젝트(‘40-60대 게이 감염인 연구’)”였으며, 다른 하나는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의 지원으로 Team DAY(Diversity Among Youths)가 진행한 “10-20대 트랜스젠더 생애사 연구(‘청소년 트랜스젠더 연구’)”였다. 두 연구는 ‘성소수자’의 삶을 ‘생애서사 인터뷰 기법’으로 수집하고 기록하여 분석했다는 공통점 아래 한 세션으로 묶였다. 두 연구 모두에 연구자로 참여한 나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자 값진 기회였다. 한편으로는 발표자 혹은 관계자로 참여하여 오가는 의견과 질문들을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봐야 할 세션이 하나뿐이라 다행이기도 했다. 발표를 준비하고 포럼 참여자들의 의견을 들으며 질문에 답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 생애연구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값진 기회였다.

 

 

“청소년기에도 트랜스젠더가 되나요?” 라는 질문에 답하기

 

‘청소년 트랜스젠더 연구’의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한 면접 자리에서 면접관이 우리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청소년기에도 트랜스젠더가 되나요?”라는 것이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존재 자체가 생경했을 면접관에게 트랜스젠더란 성전환 수술을 모두 마친 사람(아마도 ‘트랜스 여성’)인 듯 싶었고, 아마도 ‘그렇게 이른 시기에 수술을 하느냐’는 게 질문의 요지인 듯 했다. 질문에 정확히 뭐라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면접관과 크게 다르지 않을 사람들에게 청소년 트랜스젠더의 생애서사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은 연구를 마친 지금까지도 여전히 고민으로 남아있다.

 

여전히 성소수자의 가시성이 낮은 한국 사회에서 구술 생애사를 포함한 성소수자 연구의 가장 큰 의의는 ‘드러내기’에 있다. 청소년기, 아니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는’ 성별정체성에 위화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막연한 다름을 인식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성전환 수술’을 포함한 의료적 조치를 원하기도, 원치 않기도 하기에 사회의 성별화된 규범과 환경이 이들의 삶을 제약하거나 부정적인 생애 경험을 만들어 낸다. 게다가 남/여로 구분된 성별과 주민등록번호의 표지는 모두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기록하고, 우리의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를 해석하여 전달하는 것은 성소수자의 ‘다르지 않음’과 ‘다름’을 알리는 통로의 하나로써 성소수자 연구가 가지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구술생애사의 특별함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 자신들의 목소리로 전달하고, 그 다양한 이야기들에서 공통의 경험을 발견하며 기저에 놓인 의미를 해석하고 끌어내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구술 생애사는 통계자료의 숫자가 담아낼 수 없는 개개인의 삶의 고유한 맥락과 개별성을 삭제하지 않고 전달할 수 있다. “제 청춘이 아깝지 않아요?”라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자신의 청춘에 대한 연구 참여자의 발언은 ‘트랜스젠더 청소년은 성별정정 과정의 경제적, 사회적 부담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라는 연구자의 해석보다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그렇기에 구술 생애사는 개인의 목소리이자 집단의 목소리로서 당사자의 이야기를 생생히 드러내고 전달할 수 있으며, 아직 해야 할 이야기, 들어야 할 이야기가 무수한 성소수자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 기록하기


동인련 HIV/AIDS 인권팀이 생애사 인터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들의 이야기가 술자리의 안주거리처럼 우리의 주변만 맴돌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연구자로서 필자는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이들, HIV/AIDS라는 낙인찍힌 질병으로 인해 삶의 큰 흔들림을 경험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4-60대 감염인 생애사 연구의 경우 남성 동성애자 감염인이 많은 한국의 질병 역학과 ‘HIV/AIDS=동성애, 동성애=HIV/AIDS’라는 질병에 대한 낙인이 높은 한국의 사회적 맥락에서 이들의 성적지향과 질병이 삶에 미친 영향과 이들의 삶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이는 이중의 낙인을 지닌 채 한국사회를 살아내고 있는 소수자의 이야기이자,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구술 생애사는 사회의 공식적 역사로 다루거나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생애 경험과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이라는 ‘민중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를 기억과 망각의 투쟁을 통해 구성되는 사회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이라고 한다면, ‘민중사’는 보편사의 망각에 대항하여 평범한 민중의 이야기, 혹은 소수자의 억압된 기억을 역사라는 집단적 기억으로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다. 성소수자 구술 생애사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도 바로 여기, 성소수자의 생애를 ‘기록하기’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뉴스나 신문기사, 혹은 일부 연구에서 비쳐지는 성소수자의 모습은 단편적이고 정형화되어있다. HIV/AIDS 감염인의 경우, 감염인의 삶은 그들이 감염사실을 확인한 순간 시작되지만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그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감염사실을 확인한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오히려 이들의 성적지향과 질병사실은 성소수자의 낙인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용’될 뿐, 성소수자의 삶과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성소수자의 구술 생애사는 이러한 사회의 선택적 기억과 망각에 저항하며, 성소수자 개개인의 구체적 삶을 집단적 기억, 역사의 일부로 기억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는 아직 해야 할 이야기,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전달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