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에서의 크리스마스

박선용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내가 어른이 되기 전에 맞는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 눈이 온다. 맞으면 마음속까지 치덕치덕해지는 싸락눈이 온다. 얼마 입지도 않았는데, 동물의 가죽을 엉성하게 뜯은 것처럼 낡아빠진 코트가 그나마 그 더럽고 미묘한 기분을 그나마 막아준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벗고 싶다. 눈이 코트 위에 앉아 녹으면 녹을수록 무거워져서 어서 벗고 싶다. 안 된다. 내가 가려고 하는 곳까지는 벗을 수 없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나름 힘들여서 다림질한 셔츠를 입었으니까. 마지막 순간이나마 깔끔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던 마음으로 다림질한 하얀 셔츠니까.

방금 여자 친구에게 헤어지잔 말을 했다. 그 애는 뭔가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예전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죄다 검게 입고 날 만났다. 그리고 카페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했는데, 그냥 집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역 앞에서 보자고 했던 걸 보니… 추측이 아니고 확실했다. 걔는 이미 각오를 하고 온 것이다. 사실, 검은 옷만 입은 것은 며칠 전부터 그랬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나의 요새 행동과 우울함이 그런 옷을 찾게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과학적으로 검은 옷이 밝은 옷에 비해 열 흡수를 더 잘하니 입은…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근처 벤치에 앉아 몇 분 정도 아무 말 없다가 긴말 안 하고 우리 그만 만나자는 말만 했다. 걔는 단순히 끄덕끄덕만 거리고 집으로 갔다. 난 그 애가 침을 튀겨가며 욕을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힘없이 작은 미소를 보여주며 뒤돌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난 그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비록 내가 19살 소년이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둘은 끝났다. 그렇게.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고 나중에 톡을 보냈지만, 지금까지도 아무런 답이 없다. 우리 둘은 가끔 영화에서 나오는 이별장면처럼. 조용히 끝났다. 아마 예전에 그랬다면 둘 중 한 명은 빌거나 못할 말을 다했겠지.

적적한 기분에 혼자 걷고 싶은데다가 내가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있어서 지금 다리 위를 걷고 있다. 바람이 꽤 차고 세다. 난생 태어나 처음으로 왁스로 꾸민 머리가 금세 개판이 되어버렸다. 깔끔하게 하려고 한 시간이 걸렸는데 지금은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상관은 없다. 오늘 볼 사람이 딱 한 사람 남았으니까.

그 애는 뭘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을 자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은 다른 사람이랑 있을까? 그 애 생각이 난다. 오늘 헤어지자고 한 애 말고 다른 애. 내가 오늘에야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게 해준 그 애. 그 애와 만나기 전에 내 모습이 생각이 난다.


 

난 많은 질문을 머리 안에 담고 있었다.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지? 앞으로 뭘 하고 살지? 와 같은 그 놈의 씨발 같은 교과서에서 잘도 나오는 청소년기에 하게 되는 질문들로부터 단순한 단어들, 예를 들어 연필이라는 한 단어에 희한하고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나오는 질문들까지 많은 질문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것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고 나중에는 글도 쓰고 그랬다. 덕분에 생각을 좀 더 신중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글 실력을 꽤나 인정을 받기도 했고.

그런 내게 글 쓰는 거라든지 공부라든지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준 남자애가 있었다. 동갑이고 무슨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내내 같은 반이었다. 착하고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게다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키가 큰 편이 아니고, 얼굴도 그렇게 잘 생긴 편이 아닌데도, 솔직히 키 크고 잘 생긴 건 나… 이건 그냥 넘어가자 어쨌든 그 목소리 하나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중저음으로 가끔 부르는 노래가 정말 환상적이었으니까.

나와 그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3월부터 짝이 되고 나서부터 친해졌다. 옆에서 내가 뭔가 적는 걸 보고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장난으로 귀에 바람을 넣은 게 시작이었지. 그 때 걔가 처음 한 소리가 '어흥흥흥'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괴상하고 재미있다 '어흥흥흥'이라니. 그 소릴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다. 서로 변태냐면서 막 툭툭 치고 그랬지….

그렇게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먼저, 그 애가 뮤지컬을 하고 싶어 한 것. 노래를 잘하는 만큼 춤도 꽤나 잘 추었고 더 나아가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잘 하였다. 물론 지금 이게 당사자가 난 이런 사람이야 식으로 직접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정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런 저런 능력을 토대로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뮤지컬을 특히 하고 싶어 했다. 정확히 계기가 있냐고 물어봤더니 얼버무리긴 했지만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확실했다. 그리고 혼자 살고 있었다. 부모님 두분 다 지금 미국과 프랑스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순간 잘 살겠구나 생각을 했지만, 두 분 다 힘들게 힘을 하고 계셔서 가끔 돈을 조금 받고 거의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삶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지금이 편하다고. 적어도 노래하는 데에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참 좋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애가 힘들게 말을 꺼낸 것이지만 자신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을 했다. 그런데 이미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있어서, 충격보다는 오히려 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던 질문들 중에 하나와 연결이 되어있으니까.

아직 그 친구에게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나 또한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다만 그 친구가 느낌표를 마음에 담고 말한 것과는 달리 물음표를 달고 있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지 여자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둘 다 좋아하는 건지, 성적으로 아무에게도 끌리지 않는 건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가장 마지막의 것은 아닌 듯 했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남자에게도 끌리고 여자에게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였지만 둘 다 싫을 때도 있고.. 복잡한 심정 때문에 그럴까? 이런 심정이 질문을 꽤 오랫동안 끌게 했다. 그리고 이 질문이 걔 때문에 시작되었다는 걸 말할 수 없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짓을 했다. 먼저 평소에 궁금한 걸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찾아보았듯이 성소수자들에 대해서 막 찾아보았다. 책이든 인터넷이든. 생각해보니 내가 무슨 책이나 글에 잡혀 사는 고루한 사슴벌레 유충 같이 보이긴 한다. 하긴 내가 확실히 독특하다는 소리를 많이도 듣고 아주 가끔은 고지식하다고 까지 소리를 들으니까 하하… 아니 뭐 내가 왜 이런 걸 생각하는 거지.... 어쨌든 찾으면서 역사 속에서 그들이 받은 수모에 대한 내용,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는 활동들에 대한 내용과 호모포비아라는 것도 알고, 어떤 특수한 어플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를 해보기도 하고… 그리고…부모님과도 얘기를 해보고.

물론 내가 부모님께 내가 성소수자라고 직접적으로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 하냐는 식으로 말씀을 드렸다. 작년 겨울 저녁에 말씀을 드렸다. 아빠가 꽤나 엄격하신 편이라 에이 그럴 리가 없다는 식으로 짜증 섞인 반응을 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오히려 어머니가 역정을 내셨다. 그런 사람은 쳐다보기도 싫다는 둥, 역겹다는 둥, 그런 사람들은 지옥에 가게 된다는 둥의 반응 그리고 너는 그럴 리가 없다는 반응. 그래서는 안 된다는 반응…. 마지막으로, 태어나서 몇 번 밖에 안 들은 종교에 관한 설교. 어머니가 믿고 있는 종교 쪽에서 성소수자들에 대해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좋지 않은 반응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질문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이나마 어떤 상황인지는 파악하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종교를 가지지 않고 지내는 나에게도 그걸 강요하지 않고 진심으로 봉사도 많이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은 소리를 많이 듣는 엄만데 그런 반응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내 생각이지만 사람들이 믿는 존재를 엄마는 잘 따르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엄마는 진짜 그 존재를 믿는 걸까 아니면 사람들이 만들어낸 존재를 믿는 걸까? 진짜 사랑을 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이 내 머리 속에 돌았다. 그래서 엄마와는 얘기를 더 이상할 수가 없었다. 반응 속에는 마치 무거운 자재들로 탑을 겨우 겨우 쌓아낸 것처럼 나에 대한 어떤 믿음이 힘들게, 힘들게 쌓여 있었던 듯해서 그랬다. 엄마가 믿는 종교가 그 탑의 뼈 부분이고. 지금 그걸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 무거운 것들이 나를 깔아 뭉개버릴 것 같았다. 그걸 받아 쳐낼 힘이 없었다.

아빠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좋게 보았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 듯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표정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나는 아빠의 반응에 더 충격을 받았다. 아니, 충격이라 하기 보다는 내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내가 만약 그랬다면 어떨까를 상상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 대답할 가치도 없어서 그런 건지 아무 말을 않으셨다. 결국에는 화제를 돌려 내 성적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고 했다. 마침 2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서 그런 것이었다. 저번보다는 훨씬 잘 본 것 같다고 말씀드려서 아버지가 웃기는 하셨지만 진짜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빠가 생각보다 가면을 잘 쓰시는 듯 했다.

그래도 지금 마음을 굳게 먹은 상태라 예전의 두 분 반응에 대해서 그나마 덤덤하게 생각할 수 있는 듯하다. 예전이었다면 무슨 멍청이처럼 어디 구석에 박혀서 혼자 막 생각하고 그럴 텐데. 뭐 사실 실제로 그랬고.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상황을 공감할 수 있는 소수자 친구나 걔가 아니면 말하기가 조금 모호했으니까. 솔직히 상담사들에게도 말하기 조금 두려웠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 내가 아는 사람한테 막말할 거 같은 이상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자주 하다가는 다른 내 친구들의 시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적어도 여기에서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질 않아서 참으로 고요하다. 이 다리는 차가 많이 다녀서 사고가 잘 나기로 다린데, 다들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지 집에 가서 쉬고 있는지 조용하다.

찌직.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깜박이는 가로등. 곧 눈을 감을 가로등이 힘없는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저 가로등에 기대고 싶어졌다. 벌레처럼, 아주 큰 벌레처럼. 기대보니 머릿속이 흐려진다. 검고 하얀 바닥이 자꾸 번갈아서 나타난다. 어지럽다. 떨어져서 보니 하얀 순간은 정말로 하얗다. 내 주변에 어떤 까만 흔적도 없다. 아까부터 눈 좀 더 세게 내리던데 그래서 그런가 보다. 가로등의 그림자만 조금 검을 뿐이다. 이제 다시 걷자.

아까 했던 생각을 다시 해보니 예전의 두 사람이 생각난다. 한 명은 나와 절교를 했고 또 한 명은 절친이 되었고. 둘 다 이런 고민에 대해서 내 입을 통해 들은 친구들이다. 먼저 절교를 한 친구… 평소에 남자애들하고 나한테까지 스킨십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을 자주 하고 여러 가지로 오픈 마인드를 가진 느낌의 친구라 얘기를 했는데 엄청나게 얼굴을 찌푸렸다. 더럽다면서. 그런 고민 하지 말라면서.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야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면서. 그 이후로 그 친구는 나에게 말을 거의 걸지 않았고 예전처럼 볼을 잡아당기거나 하는 걸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 친구에게 잘 말해보자 마음을 먹었을 때는 나하고 눈도 맞추려 하지 않았고, 톡이니 전화번호니 죄다 차단하고 지운 상태였다. 희한한 게 생각보다 예외적인 게 많다. 뭔가 나와 비슷할 것 같은 느낌이 든 사람이 오히려 나를 자주 하는 사람이라니… 사람이라는 게 참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선입견이라는 것이 무섭다. 나 자신에게 가진 것도 그렇고 걔가 나에게 가진 것도 그렇고.

어쨌든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 다행이면서 불안도 하다. 어떤 여자애가 레즈비언인 걸 학교에서 어떤 다른 학생에 의해 아웃팅 당한 적이 있는데, 친구들이 갑자기 이상하게 대하는 걸 보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더니 그 학생은 내가 말했고 너 역겹다고 했다고 한다. 결국, 화가 치밀었는지 말한 학생을 넘어뜨리고 의자를 들고는 다리 부분으로 여러 번 눈을 찍어서 실명시킨 적이 있었다. 거의 죽일 뻔했지. 여학생은 결국 경찰서에 끌려가고 학교에서 다시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무섭기도 했지만, 처지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두 기분이 든 이유는 적어도 그놈이 다른 사람에게 말은 하지 않아 나에게도 분노나 침울함을 가져오게 하지는 않아서 그런 것이 다행이었고 혹시나 나중에라도 말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이다. 물론 걱정은 조금 덜하기는 하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모두 이제 각자 다른 곳 다른 학교로 가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절친이 된 친구… 예전부터 친한 여자애였다. 얌전한데다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가끔은 굉장히 당찬 행동을 보여줘서 반전의 묘미가 있는 독특한 친구였다. 나름의 판단으로 얘기를 잘 들어줄 거라고 생각을 하고 내 고민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더니 약간 당황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침착한 표정으로 다른 자기 친구도 그런 고민을 했던 애가 있다면서, 내 얘길 차근차근 들어주었다. 아마 속 시원한 순간들을 뽑자면 이때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비록 그 친구의 입장에서 공감 못 할 부분은 있었겠지만, 최대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모습에 나는 아주 기뻤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연락하면서 지내고 있다.

다리 난간을 보니 뭔가 쓰여 있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둥 나의 영화가 시작된다는 둥… 기운 차는 말들이다. 이 다리가 어떤 사람에게 고통을 끝내는 길이 아니었으면 이런 문구들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 길의 양쪽 낭떠러지로 떨어지려는 사람이 내가 안 보는 곳에서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유가 다양하겠지. 빚이 너무 많아서, 이유 없이 우울해서, 애인과 헤어져서, 성적이 떨어져서, 가난해서,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마음이 너무 허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통 받아서…많은 사람이 흐릿하게 꾸물꾸물 대는 물살 속으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물살이 마음속 고통을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씻겨주길 바랐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냥 단순히 끝내길 바랐겠지. 그 누구도 욕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나름의 고통이다. 지금 당장 공감할 수 없더라도 나름의 고통이다. 나에게는 살짝 긁혀서 금방 나을 상처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생살을 썩게 하는 것일 수 있다.

다르다는 이유로 여기서 뛰어내린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다시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들 중에서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도 있었겠지. 영혼이 진짜로 있다면 그들과 얘기하고 싶다. 고민을 다시 얘기하고 싶다는 건 아니다. 그들이 달라서 행복했던 그리고 즐거웠던 순간들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다.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하고도 이 얘기는 정말 소중한 얘기인데 다른 곳으로 간 사람에게는 소중한 걸 넘어 자기 자신일 지도 모르겠다. 그 이야기가 자기 자신인 거지. 먹먹해진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나 자신이 기특하다. 난 분명 아직 어린데 아냐 이제 나도 어른이다. 어리지 않아.

적을 때 쓸 물건이 없어서 아쉽지만, 손가락으로나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유명인들의 말을 다리 난간에 새긴 것처럼 적었다. 다리 안쪽 난간과 바깥쪽 하나씩. 물로 돌아간 사람에게도 남기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 ‘다리 저편에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안아줄게요. ‘ 라고 적었다.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해석의 문제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고통이라는 단어를 계속 생각을 하다 보니 굉장한 모욕을 당한 기억이 생각이 났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 당한 모욕이었다. 한창 대자보에 대한 이슈가 많을 때 이야기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고. 대학교에서 시작된 그것이 조금씩 번져 고등학교에까지 이어졌다. 우리 학교에서도 게시판에 대자보가 세 개 정도 붙여졌었다. 하나는 대한민국 교육 현실에 대하여 이래서는 안 된 다의 식으로 학생이 붙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근 교사들의 권리가 바닥을 치고 있다는 말로 시작해서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피해가 가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어떤 한 선생님이 붙이신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좀 달랐다. 청소년이면서 사회적 소수자들인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장애가 있는 학생, 탈북 청소년 등등 차별 그리고 학교의 현실 등에 대한 것이 담긴 석 장에 걸친 꽤 긴 대자보였다.

성 소수자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그때 내용이 너무나도 길고 어려워서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결론이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차별함으로써 깎아내리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다. 나 혼자 혹은 너 혼자가 인간이 아니다.’이었던 듯하다. 나는 그걸 전부 다 읽고는 멍하니 그 앞에 서 있었다. 첫 페이지 가장 앞에 언급되어서 알았지만 나와 같은 1학년 학생이었고 자기 자신은 성 소수자라고 당당히 썼다. 정말 대단했다. 그 대자보를 쓴 학생을 만나고 싶었다. 얘깃거리가 온종일이라도 나올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떤 연락처도 없었다.

다음 날 그 대자보가 어찌 되었을까 수업이 모두 끝나고 갔다. 분명 글자가 있는 부분 말고는 깔끔한 대자보였는데 굉장히 시꺼멓고 걸레처럼 변해있었다. 어떤 내용인가 싶어서 가까이 갔다.

욕이었다. 훼손 자체가 나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힘내라는 말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건 하나도 없고 된소리가 사방에 널려있었다. 그리고 무슨 옛날 사람처럼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말도 있었고, 남자 둘이 섹스 하는 걸 낙서로 해 놓고서는 정말 추잡하다는 욕을 쓴 것도 있었다. 성 소수자만 욕한 건 아니었다. 국사 교과서에서 언급된 반공교육인가 그걸 지금 와서 또 받은 건지 빨갱이 새끼들이란 말도 있었고, 눈깔 병신들이란 말도 있었다. 난 정말 모두 다 욕만 하고 싶었던 건지, 그런 사람들을 많은 사람이 혐오하는 건지… 처음에 본 것처럼 서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기분을 가지고 다른 시간에 서 있었다. 게시를 한 사람이 이걸 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내가 그걸 발견한 건 7교시 쉬는 시간이었다. 보았을 것이다. 분명히. 보지 않았다면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같은 대자보를 계속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엄청난 모욕이었다. 그건 올린 사람에 대한 모욕이었고, 나에 대한 모욕이었고, 다른 소수자들에 대한 모욕, 어쩌면 자기들이 자기들 스스로 하는 모욕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적은 사람들에게 하는 모욕인 줄 알았는데 지금 다시 생각을 해보니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행동이었다. 기분이 정말 좋지 않다. 그리고 그 사건이… 아직 바뀔 것이 너무나도 많은 걸 말하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해가 갈수록 대자보에 욕이라든가 칼로 찢긴 흔적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멀리서 보면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정도로 그나마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아직 인듯하다.

그러고 보니 내 예전 여자 친구가 잘 들어갔는지 걱정이 된다. 울고 있지는 않으려나. 그 애의 마지막 미소가 너무나도 신경이 쓰인다. 비웃는 미소는 전혀 아니었다. 그럴 애도 아니고. 아니면 알고 있어서 그럴지도…모르겠다.

그 애 얘기를 하자면, 옆 반 여자 반에 있었고 여러 가지로 잘 챙겨주던 친구였다. 가끔 수업 과제 같은 거 까먹은 거 없느냐 느니 뭐 안 가져온 거 없냐 느니 그런 식으로 어벙한 사람 챙겨주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꾸준히 주던 친구였다. 나중에는 나한테 고백까지 하고 얼떨결에 나는 받아들이고. 뭔가 순식간에 휙 지나간 일 같아서 뭐라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이 있기는 있었던 듯하다. 그래도 짝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나오는 행복은 있었다. 서로 사랑스러운 말도 주고받고. 하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나의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여자를 정말 좋아하는 것일까? 성적으로? 아니면 그냥 친구처럼? 대체 난 뭐지?

몇몇 어른에게 말했다간 귀를 찌르는 욕을 할지도 모르고 친구들에게 말하면 소문이 날까 봐 말을 하지 않았지만, 여자 친구가 있을 때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한 짓이 있다. 개인적으로 진짜 못 된 짓이다. 이제 애 취급 받고 싶지 않지만 뭐 어쨌든 섹스를 했다. 남자랑. 처음이었다. 물론 어떠냐는 호기심도 있었기도 했다. 흠…. 그냥 호기심이라 하자. 모르겠다. 그때는 19살 3월 때였다. 스마트폰으로 24살의 형과 통을 하다가 섹스 얘기가 나왔다. 솔직히 평소에 그런 말이야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심심하면 하는 말들이니 큰 거리낌이나 놀라움은 없었지만, 남자들끼리 하는 것에 관해 얘기하는 건 처음…. 아니 솔직히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얘기라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참으로 신이 나서 그 형과 막 즐겁게 얘기를 하다가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나는 대화방 밖에서만 보고 머뭇거렸다. ‘뭐야 저 형.’,’나랑 하려고 지금까지 얘기한 건가?’, ‘으아’, ‘해도 되는 건가?’ 그리고 ‘아니 뭐 요새 애들이 제기랄 섹스를 많이 빨리한다고는 하는데 뭐 아우 뭐야 이거’와 같은 당황스러운 생각과 ‘궁금하기는 하다.’, ‘한 번이야 뭐 어때서’, ‘그냥 해볼까?’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한 시간을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빠른 애들은 그냥 하겠지. 근데 나는 그게 아니었다. 나름 희한한 판타지도 가지고 있었고 두려움과 부끄러움도 있었으니까. 그놈의 어른들이 성인이 돼서야 그런 걸 할 수 있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 하고만 해야 한다는 어디 교과서에 나올 얘기들이 은근히 머릿속에 박혀있기도 했으니까.

역시 이 생각은 흥미로워서 길게 이어진다. 몸도 조금씩 달아오른다. 더운 날씨도 아닌데 조금 덥다. 흠... 생각만 그런 건가? 애매하기는 하다. 더운 건지 추운 건지.

일단 나와 형은 카페에서 만나서 얘기를 좀 하다가. 나를 자기네 집으로 데려갔다. 정확히는 자취방으로 데려갔다. 남자 혼자 사는 곳이라 좀 지저분할 줄 알았는데 굉장히 깔끔했다. 결벽증 걸렸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옷도 정말 깔끔하게 잘 개어져 있었다. 입 벌려 놀랄 정도였다. 그런 모습이 귀여웠다 보다. 뒤에서 껴안기를 하고는 욕실로 같이 들어갔다.

욕실에서 형을 보니 꽤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나보다 키 크고 잘 생겼는데 몸까지 좋으니 부러웠다. 더불어 이유 없는 성질도 났고. 부러움이 질투가 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몸을 만들었느냐고 묻자 군대에서 운동도 하고 그랬다고 했다. 그놈의 군대. 언제든 그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났다. 다행히도 그 기분을 얼굴에 꺼내지는 않았다.

형 몸 앞쪽을 닦아 주면서 내 몸을 보고 그 형이 흥분한 듯했다. 뭔가 따뜻하고 딱딱한 게 아랫배 쪽을 막 찌르고 있었다. 덩달아 몸이 달아오르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형을 안았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라 어쩔 줄 몰랐다. 그 형도 마찬가지로 꼭 안고는 날 들고 침대로 데려갔다. 힘도 참 강해…. 흠… 어쨌든 날 눕히고는 내 몸을 막 빨고 핥았다. 몸이 막 뒤틀렸다. 내가 이렇게 민감한 편이었다. 그러다가 입을 맞추기도 하고. 그 순간 내 것도 점점 커졌다. 내가 처음 하는 것을 알았는지 은근히 더 귀엽다는 말을 하면서 내 걸 막 빨다가 되게 크다고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 날 야릇하게 쳐다도 보고. 흐뭇하면서도 웃겼다. 뭐가 웃긴지 서로 막 웃어댔다. 물장난하는 두 꼬마들처럼. 어떻게 보면 웃는 표정으로 서로 물어 뜯으려고 하는 연인 같기도 했다. 희한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그 형이 침대 밑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나는 콘돔이었고 또 하나는 무슨 핸드크림처럼 생겼는데 투명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러브젤이라고 윤활제 같은 것이었다. 어쨌든 콘돔을 내 거에 씌우고 젤을 형의 엉덩이와 내 거에 바른 후에 눕거니 박아달라고 했다. 그 전에 손가락으로 뭔가 했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흠… 아 엉덩이 쪽을 손으로 풀었지… 흠… 어쨌든 그 후에 순간 어색했지만 일단 형 말대로 했다. 처음이라 그런지 자꾸 미끄러지기만 했다. 들어가야 할 곳엔 들어가지도 않고. 내 거는 달아오르기만 하고. 욕이 나올 뻔했지만, 다시 해보니 성공을 했다.

느낌이 오묘했다. 뭔가 꽉 잡는 느낌과 동시에 따뜻했다. 온몸을 욕조에 푹 담글 때 편안함보다도 더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는 몸을 흔들었다. 확실한 건 나 혼자 언젠가는 누군가가 풀어주기 바랐던 욕망을 나 자신을 위로하듯 풀 때와는 확실히 다른 기분이었다. 입에서 나와 그 형의 숨소리가 더 야릇한 기분을 들게 하였다. 어쨌든 그 형과 잘 지냈다. 내가 그 형을 안아서 하기도 하고 식탁을 잡아서 하기도 하고. 막 움직였다. 한 시간 정도 했을까. 내가 써내는 걸 보고는 형도 하고 싶었는지 자신의 것에 새 콘돔을 씌우고 했다. 내가 당하는 건 기분이 좀 달랐다. 처음이라 그런지 뭔지는 몰라도 너무나도 아팠다. 뭉툭한 쇠막대기로 막 쑤셔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흥을 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뭔가 기분이 좋아졌다. 형이 나를 감싸주는 느낌 그러면서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자극하는 느낌도 들었다. 더는 표현은 못 하겠다. 글로 표현하는 건 확실히 한계가 있으니까.

그게 끝난 후에 서로 손을 잡고 양옆에 누웠다. 지금은 기억에서 꽤 흐려졌지만 격렬했던지 둘 다 너무나도 지쳤다. 좀 쉬다가 형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하는 말. 나보고 사랑한다고.

발로 신경을 하나하나 밟아대는 것 같은 두통이 몰려왔다. 사랑한다고? 믿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어이가 없었다. 이게 어른에게서 나오는 감정인가 의심도 들었다. 단 한 번, 한 번 만났을 뿐인데 나보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다니. 나는 그의 속이 궁금해졌다. 화가 났지만, 기분을 나쁘게는 하지 않으려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웃는 마스크를 쓰고는 형 물건을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며 내 어디가 사랑스러우냐고 물어봤다. 전부 다 사랑스럽다고. 소름이 끼쳤다.

혼란스러웠다. 그 형이 싫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많이 배려해주려고 했고. 눈빛도 꽤 사랑스럽게 비쳤고….

형은 하루 자고 가라고 했지만 난 집에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지하철이 끊긴 시간이었지만 걸어서 돌아갔다. 택시라도 탈 돈은 있었지만 걸어갔다. 생각을 좀 할 필요가 있었다. 저 형의 감정이 진짜일까? 아니면 순간의 감정으로 그러는 걸까? 그러면서 나오는 하나의 질문. 다른 사람도 저럴까?

내 친구가 보고 싶어졌다. 내 짝꿍이었던 친구. 그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받지 않았다. 받지 않는 게 당연했다. 새벽 두 시였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계속 전화를 했다. 그 친구를 꼭 안고 싶었다. 그냥 그랬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내 여자 친구에게 더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 서로 공부를 해야 해서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쉬는 시간에도 옆 반에 찾아가지도 않았고 쉬는 시간마다 연락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항상 그 애가 찾아왔다. 싸늘해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눈빛 하나하나에서 그게 드러났나 보다. 오는 빈도가 줄었다.

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지금은 알 듯하다. 서로의 추억은 있지만, 텅 빈 느낌이었다. 내가 진짜 저 친구를 좋아해서 사귀는 게 맞는지 정말 얼떨결에 한 것인지 의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형과 연락이 끊겼다. 이유를 모르겠다. 자기 혼자 연락을 끊었다. 곧 시험기간이라 연락을 누구한테도 잘 안 하긴 했는데, 그 형이 그것에 상처를 받은 것인가? 그냥 끊겼다. 가벼운 사람이었던 걸까?

이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쌍놈으로 불려도 될 정도로 나빴던 것 같다. 내 자신의 모습이 욕이 나온다.

진동이다. 호주머니에서 약하게 울리는 진동. 예전 여자 친구다. 잘 들어갔다고 연락이 왔다. 예전에 장난스럽게 붙이던 ㅋㅋ나 ㅎㅎ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만 말끝에 덩그러니 찍혀있었다. 이렇게도 많이 멀어졌구나. 이젠 정말 끝나는구나.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보내고는 호주머니에 다시 휴대전화기를 넣었다. 정말로 미안하다. 너는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사랑 받을 자격이 있지만 내가 사랑할 사람은 아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다리의 끝이 보인다. 아직 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거의 끝이 보인다. 내가 가야 할 곳에 가까워 진다.

그러고 보니 난 내 짝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앞에서 계속 말한 그놈. 여러 생각을 하느라 그걸 잊다니 바보 같다. 지금까지 그놈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 전에 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었기에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놈을 많이 그리워하게 만든 일이 여럿 있었다. 솔직히 그 애를 만날 때부터 기분이 독특하긴 했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린 형제들처럼 손잡고 다니며 미친놈들처럼 공원을 뛰어다닌 추억도 있었고, 목욕탕에 가서 서로 걸 막 자랑하다가 내가 넘어져서 두 시간 정도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고, 겨울에 눈을 막 던지면서 놀다가 돌을 던져서 그 애 팔에 상처 난 적도 있었고… 그 친구 앞에서는 내가 더 어린 애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행복했다.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같이 지낼수록 나는 더 가까이 있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고, 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볼 때 눈을 자주 보는 내가 그 친구 눈을 계속 봐도 알 수 없었다. 행복하지만 아픈 눈빛이었다. 아니, 슬펐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물을 안에 숨기고 있었다. 나랑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강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나를 떠나보내고 싶어 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다 놀고 돌아갈 때마다 한 번 악수하고 한 번 포옹하고 갔으니까. 다시 만날 수 있는데 그러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했지만 지금 눈빛을 다시 생각하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한 아이와 아빠 그리고 엄마가 뒤에 빛나는 도시를 등지고 사진을 찍고 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는 걸 알려주는 건지 아이의 옷과 모자가 모두 빨간색, 초록색이었다. 마치 아기 산타 같았다. 거기에다가 루돌프 뿔 장식을 머리에 하고 있으니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아이 아빠가 그 모습에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는지 ‘이렇게만 자라달라고.’ 말을 했다. ‘이렇게만 자라 달라’

아빠, 나의 아빠. 사실 우리 가족이 나의 고민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앞으로 가지고 싶지도 않은 줄 알았다. 그래서 가족에게 굉장한 실망을 했었다. 그러다가 수능시험이 끝난 후에 아버지와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술집에서. 아직 나이는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독특한 말솜씨로 내 나이가 21살까지 늘어났다. 하필 그때 내 머리가 짧을 때라 그걸 이용해 군대 휴가 나온 것처럼 말을 했다. 덕분에 그 순간은 2살 더 늙고 군대에 절은 일등병이 된 기분이었다. 그만큼 황당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내 첫 마디가 ‘아아 인생무상 허허공공’일까. 아버지는 일단 맥주와 비싼 양주, 소주 그리고 소시지 안주를 시키고 수능 얘기부터 시작했다. 모의고사 보다는 잘 나온 듯하다고 말하자 고비 하나는 넘겼다는 듯이 숨을 크게 푹 쉬고 내 잔에 맥주를 따라 주셨다. 예전에도 아버지와 같이 집에서 술을 조금은 마신 적은 있지만 그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다 따르자 맥주잔을 들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컵을 눈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 눈의 명령을 따랐고.

한번 건배를 하고 마신 후에 아빠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때의 고민을 지금도 하고 있냐고. 나는 거의 끝난 것 같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끊긴 대화. 20분 동안 조용히 술을 서로 건네받으면서 마시기만 했다. 결국 내가 말을 꺼냈다.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상관이 없냐고. 1시간 정도 다시 술의 침묵이 이어졌다. 소주, 맥주, 양주가 나와 아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입을 열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러지를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실지 알 수 없었다. 말에 칼을 달아 쏟아낼지도 모르고 저번처럼 무시하면서 계속 서로 술만 마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침묵을 깨고 아빠가 한 얘기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을 한건 우스운 것이었다. 무뚝뚝한 아빠에게서 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였다. 말투와 표정 그리고 말하는 소리 크기까지 기억이 난다. 술을 많이 드셨던 상태라 입이 꼬이시기도 했었다.

‘흠… 아빠는 그게 아이고 크게 신경 안 써 솔직히.  네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든 간에 그 사람이 큰 잘못을 하지 않는 한 네가 사랑하는 사랑, 사.. 사람이니까. 엄마는 모르겠지만 너 행복이 와따니까. 다만 아빠는 앞으로 네가 부딪힐 것들 때문에 걱정이 되는 거야. 어떤 거냐면 네가 적어도 이 한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받을 고통. 그런 거지. 뭐 솔직히 요새 막 그.. 뭐냐 극 같은 거 아 드라마 그거 드라마 드라마에서도 막 나오고 영화에서도 나오고 그러긴 하잖아? 그 정도로 많이 열리긴 했지 예전보다는. 근데 아직은 아빠가 봤을 때 편견에 푹 빠졌어.. 푹.. 그 놈의 프언겨언. 솔직히 말이야. 아빠가 너 같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남자를 좋아했지. 남자로서. 그리고 십냔… 십년 전에 그 사실을 그 친구가 말했지 술 퍼 마시면서 토해도 계속 마셨지 그래. 그때 그 친구가 나한테 그런 걸 말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야? 응? 뭐 쨌든 말이야. 그 친구가 자살 했어 자살을. 다리에서 뛰어내렸다고. 눈 더럽게 프엉 프엉 오는 날에 말이야. 응? 그냥 뛰어서 뒈졌다고. 혹시나 안 뒈질까 봐 시발 어디서 구했는지 먹으면 그냥 훅 가는 걸 입에 물고 뛰어 내렸아…. 아…. 흐…흐윽…. 그 친구는 말이야. 날 살려준 친구라고…. 하교...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쭉 날 도와준 친구라고…. 그리고 얼마나 똑똑한데 뭐 그냥 아인슈타인이야 시발. 얼마나 잘난 새낀데!

나중에 편지가 하나 왔더라고, 써진 걸 보니까 유언장이야 그냥 유언장. 나한테 제 재산 다 싹 준다는 내복하고 여러 가지 제 하고 싶은 얘기 다 한 다음에 한 마지막 두 말이 뭔 줄 알아? ‘슬프다’ 하고 ‘고맙다.’ 야 시발… 으흑… 그 새끼는 말이야. 많은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었지. 나도 그 사람들 만나봤어. 몇 사람은 술까지 맥여 가면서 어떤 사람인가 알아봤지. 진짜 제대로 된 사람들이야. 근데 시발. 그 사람들 다 그 새끼랑 절교했어. 절교. 나중에 보니까 왜 했는지 알겠더라고. 그 새끼랑 술 먹을 때 이 말을 하더라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를 하면 그놈들이 다 자기를 버린대. 진짜 대가리짝을 찢어버리고 싶은 개 같은 말을 많이 퍼부으면서. 아니면 이해하는 척하고 뒤돌아서면서 지는 그러려니 이해를 했대. 그런데 말이야. 나중에 보니까는 자기 얘기를 들어주고 자기가 이렇다는 걸 이해해주는 새끼가 없다는 거야. 그리고 이딴 세상에서 적은 사람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많은 놈들이 지금은 자기와 같은 상황 일 거 같아서 슬프다는 거야 진심으로. 그래서 나한테 이 말 한 거지. 고맙다는 건 마지막 친구가 넌데 네가 나를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어서 고맙다 시발 슬프다는 건 자기도 그렇고 자기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이 혼자 이겨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에 슬프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에 슬프다는 거야. 흐…흐윽… 너를 보면서 같은 상황에 있는 애들이 있을 것이라는 게 슬프다. 어휴… 너도 그랬겠지만, 무엇보다 너를 여는 것에 가장 큰 관문은 나 같은 부모지… 어쩌면 애들을 위해 어른들이 바뀌어야 할 필요도 있을 텐데…

지금은 상황이 그나마 여전히 별로지만 그나마 나아져서 다행이야… 관련해서 힘든 일 있으면 말해라….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자라다오. 이렇게 나와 술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고맙게 자라주었으니....’

많이 취하시긴 하셨는지 안 쓰시던 욕도 많이 쓰시고 횡설수설도 많이 하시고 말도 중간 중간 끊으셨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빠는 나를 존중하려 한다. 아빠는 나를 나 그대로 보려고 하신다. 아빠는 나의 행복을 바라신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그냥 원래 그랬던 것처럼 가까운 사람이 진짜 나를 인정해주는 것… 마치 내 절친이 날 이해해 준 것처럼.

이제 거의 다 왔다. 다리 끝에. 가로등 밑은 내가 서 있든 말든 항상 하얗지만, 밑에 흐르는 물소리와 위에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조금씩 줄어든다. 내가 지금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 대한 길도 점점 줄어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그 집이 보인다. 그 친구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설마 집에 없고 밖에서 놀고 있을까? 다행히도 집에 있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마침 혼자 살고 있으니 야동을 줄기차게 보고 있을까? 뭘 해도 상관이 없다. 난 그 친구… 아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을 뿐이다. 내가 술자리에서 아빠에게 말하려던 것은 이것이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성별은 문제가 될 것이 될 게 아니었다. 물론 그게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지 여자를 좋아하는지를 정확히 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나는 작은 가수를, 내 친구를 사랑하고 싶다. 더불어서 나중에 일도 하고 싶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일. 힘들겠지만 보람찬 일.

이제 코트를 벗자. 질문으로 힘들었던 내 예전 모습에서 벗어나듯 코트를 벗자. 그렇게 춥지도 않네.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소파에서 자주 보던 그 뒷모습, 주방에서 항상 보던 뒷모습, 쓸쓸한 웃음이 가져다준 뒷모습, 마지막으로 내가 꽉 안아주고 싶은 뒷모습.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다. 이상하다. 왜 넷이 같이 있는 거지? 아빠, 엄마, 내 예전 여자친구, 그리고 그놈. 왜 같이 있는 거지. 그럴 리가 없다. 엄마, 아빠는 두 사람을 모른다. 그럴 수가 없다고! 당장 무슨 일인지 물어보자.

“무슨 일이야, 다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반응이 없다.

“왜들 그래?? 무섭게 시리…. 야, 너가 말해봐 무슨 일이야?”

뭐야 이거, 왜 건들 수가 없지? 무슨 일이야 이거. 그럴리가 없잖아? 뭐야 이거!

“크리스마스다. 정확히 12시야. 이제 정확히 2년이나 지났어요. 그렇죠 여보?”

“그래요…2년…2년이 지났네요. 지금은 뭐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품에 있으면 좋으련만… 제발… ”

“아주머니, 울지 마세요. 여기 손수건으로 닦으셔요.”

“적어도 지옥에 있지는 않겠지? 그러겠지??”

“무슨 말씀이세요.걱정 마세요. 착한 애니까… 어딘가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을 거에요. “

“……”

“넌 이번에도 아무 말도 없구나… 아무 말이라도 하렴. 어딘가에서 들을지도 모르잖니.”

“하아… 지금도 그 애가 그 선택을 한 게 믿기지 않아요… 믿고 싶지 않아요. 혹시 그 친구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계신가요? 아마 수능 성적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믿고 계실 거예요. 틀린 말이 아니에요. 충분히 많이 괴로워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선택의 진짜 이유가 있어요. 작년까지는 말씀 못 드렸지만…”

“무슨 말이야 진짜 이유…라니?”

“충격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남자를 좋아했어요. “

“ㅁ…뭐라고? 우리 애가??”

“네. 그랬어요. 그 친구가 결국 제가 이렇게 말한 걸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어요. 이 근처에서 듣고 있을지도 모르죠. 어쨌든 말을 계속 할게요. 사실 저는 걔와 사귀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이런 것이 밝혀질까 봐 두려웠지만 행복했어요. 같이 있다는 거 자체가. 그러던 와중에 걔는 아웃팅을 당했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자기 정체성을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까발리는거. 학교에서. 한 여자애가 걔 폰으로 장난치려다가 저와 뽀뽀를 하고 있는 사진 그리고 안고 있는 사진 몇 개를 발견하고는 친구들한테 말을 했나 봐요. 그 사진들 속에 저는 후드를 쓴 모습이었던지라 누군지 분간이 힘들었지만 남자라는 건 알 수 있었고 걔 얼굴은 정말 또렷하게 나왔었죠.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어요. 그럴 리가 없다면서 걔는 대꾸를 했죠. 하지만 헛수고였어요. 그 년이 어느 샌가 그 사진을 자기 폰으로 옮겨놓았으니까. 그 이후로 정말 좋지 않은 일을 많이 당했어요.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애들이 걔를 많이 괴롭혔죠.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한다던가, 물건을 부숴놓는다던가, 흉터가 날 정도로 심하게 때린다던가… 왕따나 다름없었죠.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라고 전 했지만 그 애는 그럴 수 없다면서, 지금 자기 상황을 말하면 또 자기가 이런걸 알게 되는 꼴이 아니냐면서 가만히 있었죠. 게다가 그게 다른 애들 부모님에게도 퍼졌나봐요. 이상하게 두 분에게는 아무런 소식도 들어가지 않았지만요. 그 부모님들이 학교에 와서 교무실에 막 항의를 했고, 그 애에게 직접 가서 욕을 하면서 퍼붓기도 했죠.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이런 것이 이어졌어요. 제대로 쉬거나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건 그나마 작은 고통이에요. 정신적으로 걔에게 문제가 생겼죠. 걔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건 알고 계시죠? 나중에 저랑 있을 때마다 글을 썼었어요. 질문에 대한 글이었어요. 성정체성에 대한 질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한 행동들, 모욕적인 일들, 여자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는 일, 아버님하고 술을 마신 일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사랑을 말하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 일이 담긴 글이었죠. 처음에는 평소처럼 항상 그랬던 것처럼 즐겁게 글을 썼죠. 마치 그 글이 탈출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점점 그 애는 그것이 진짜라고 믿기 시작했죠. 그 글의 주인공이 자기인 것처럼. 분명 저와 걔는 사귀고 있었는데도, 어느 순간 무슨 소리냐고 우리는 사귄 적이 없다고 말을 하고, 지금 옆에 있는 이 친구하고 사귀고 있다고 했던 데다가, 아무도 붙인 적이 없는 대자보 얘기를 자꾸 진짜처럼 하고 있었죠. 무엇보다도 자기가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부정하려고 했죠. 여자를 좋아해야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무슨 말인가하면 자기가 계속 그런 것에 대한 질문을 찾고 있다고, 그리고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거예요. 물론 그 말은 맞았지만, 그 애는 게이였어요. 미치기 전부터 자기 입으로 자기는 게이라고 말을 했고, 이건 변할 일이 없을 거라고 말을 했는데… 그렇게 바뀌었죠. 자기 자신을 부정할 정도로 심각했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상담사에게든, 정신과 의사에게든, 부모님에게든, 선생님에게든 말씀을 드리자고 해도 걔는 자기 미친 거 아니라면서, 힘들게 아니라면서, 괜찮다고 했죠. 또 자기가 드러나는 게 아니냐고 이번에는 저에게 욕까지 퍼부으면서. 걔가 하는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분명히 데려갔어야 했는데 병신같이 왜 그랬을 까요… “

“그런데 이상하다 얘야… 미쳤었더라면 분명히 티가 났을 텐데…”

“신기하게도 저와 있지 않을 때는 정상인 척했죠. 그래서 그 때 수능까지 다 봤으니까요. “

“미…믿고 싶지 않아… 아…아냐…”

“어머니 진정하세요…”

“그…그럼. 너는… 너는 그 애랑 무슨 관계인거니”

“저는 그 친구 절친이었어요. 그 친구가 어떤 친구인지 전부 알고 있었어요. 말 못해서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그래서… 더 말해줄 수 있니… 내 아들에 대해서. 내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말씀드릴게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케이크를 사서 제 집에서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집 안을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전화가 왔어요. 영상통화였죠. 팔을 쭉 뻗어 통화를 하고 있었는지 몸 전체가 보였어요. 새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어요. 한 팔에는 꽤나 헐은 코트를 걸치고. 평소에는 입지 않던 특이한 복장이었죠. 전 빨리 오라고 보고 싶다고 했죠. 알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자기는 나를 지금까지 사랑했다고, 나랑 사귀어줄수 있냐고 하면서 웃다가 살려달라고 죽을 것 같다고 하면서 울었죠. 저는 계속 왜 그러냐고 했죠. 계속 계속. 10분 후에 크리스마스가 되자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에게 미소만 짓더군요. 또, 움직이는 듯 했어요. 다리 난간으로, 다리 손잡이 위로. 시커먼 뒷모습이 보였어요. 차디찬 물이 당연했죠. 대충 어디인지 느낌이 와서 저는 폰을 손에 쥐고는 바로 밖으로 나가서 그 놈에게 뛰어갔죠. 그런데… 이미 늦었어요. 뛰다가 다시 그 핸드폰을 본 순간. 전화는 끊겨있었으니까요… 그냥 끊은 것이겠지 하고 갔는데… 그 애는 이미 거기에 없었어요. 죄송해요… 제가 그 때 나섰더라면…….”

“그 때 걔 옷에서 나온 그 종이가 그 소설 이었구나… 그 때는 완전히 젖어서 글씨를 알아 볼 수가 없었는데, 혹시 복사한 거라도 있니?”

“죄송해요. 없어요. 연필로 하나하나 써내려간 데다가, 복사를 원치도 않았어요. 저도 간직하고는 싶었는데… 분명히 그걸로 얘기할 것이 많았거든요. 그 친구의 소원도… 담겨 있었고. 미안해요.”

“아니다…. 너도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어딘가에서 있을 것도 같구나. 아직 이 세상은… 아니야. 여보 그만 울어요..."

소년은 네 사람의 대화를 듣고 뒤로 물러선다.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의 글이었다는 것에 손이 떨린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에 머리에 고통이 밀려온다. 뒤로 돈다. 다시 걷는다. 시작한 곳으로. 분명 눈물은 흐르고 있지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걸 알아버렸는지 아무런 느낌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걸어간다. 걸음에 가짜 기억을 뱉어내듯이 힘겹게 그리고 멍하니 걸어간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있던 곳이다. 쓰러진다. 내리는 눈이 그 위 등 위에 쌓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소년을 감싸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1년 후, 두 사람은 사연이 있는지 없고, 부모님만 다리에서 힘없이 빛나는 도시 불빛을 본다.

그는 다시 일어난다.

다리 반대편 원래 있었던 곳에서 다시 일어난다.

다시 다리를 걷는다.

새하얀 셔츠와 헌 코트를 입은 소년이 다시 걷는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다시 또 다시.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내가 어른이 되기 전에 맞는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 눈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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