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실의 풍경

 

배주호

 

"코끼리는 자신의 때가 다할 때쯤, 코끼리 무덤이라는 곳에 가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는 말이 있지. 들어본 사람 많을 거야……."

하라는 수업은 안하고 또 딴소리 하고 있다, 저 사람. 국어 선생이면 국어를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니 고3 교실에 들어와서, 저게 무슨 장광설이냔 말이다. 언어영역 성적이 안 나오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단다……."

물론 내 성적이 낮은 이유는 따로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내가 공부를 안 한다는 거? 지금도 내 국어 공책은 낙서로 가득 차 있고, 더 채워지고 있다. 백지를 버릴 수는 없으니까. 뭐 그래도 국어선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속 편하다.

"사실 이건 밀렵꾼들이 지어낸 이야기야. 상아를 어디서 구했냐는 질문에 코끼리를 잡았다고는 말 못하고 코끼리 무덤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지어낸 게 널리 퍼진 거다……"

사실 진짜 그런 게 있다면, 지우개 무덤이 있을 거 같다. 몽당 지우개가 몸뚱어리가 모두 사라지기 전에 두 다리를 뿅 하고 만들어 내서는 아무도 못 보는 어두침침한 곳으로 걸어가는 거다.

물론 그냥 내가 떨어트리고는 못 찾고 있다는 게 맞겠지만.

"아무 죄 없는 생명을 죽인다는 그릇된 행동을 숨기기 위해 지어낸 말이 기정 사실이 되어버린 좋은 예지."

꼭 지우개라는 놈은 결정적일 때 사라지는 법이고 특히 오늘처럼 혼을 담은 무언가를 그릴 때면 더 기를 쓰고 탈출을 시도한다. 보통 그림도 아니고, 초에게 보여줄 그림을 그릴 때 말이다.

초. 나의 희망이자 알파와 오메가. 삭막한 현실을 견디는 한 줄의 동아줄. 달리 바라볼게 있나? 이 35명의 테스토스테론 생산자, 그러니까 절망의 구렁텅이들로 가득 찬 교실에서 내가 바라볼 건 여자 반이 있는 저기 위층, 8반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초 뿐이다.

고3이 무슨 연애냐고 할 수 있겠지만, 아니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일진대 무슨 딴지가 그리도 많은지. 게다가 내가 뭐 24시간 초 생각만 하는 것도 아니고 23시간 59분 정도만 하겠다는데 문제될게 없다.

어쨌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분반이긴 해도 남녀공학이 좋다는 거다.

아니지, 지우개. 지우개를 잊으면 안되지.

뭐 어쩌겠나, 빌려야지. 옆자리에 앉은 짝이라는 건 이럴 때 필요한 거다. 특히 그 짝이 설이라면 더더욱.

"설아, 나 지우개 좀."

설이는 교과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독한 놈. 초등학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봐온, 아니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항상 곁에서 떨어진 적 없는 둘도 없는 친한 녀석이지만 이럴 때 보면 참 딴 사람 같다. 뭐 저래도 수업 끝나면 나하고 같이 국어 선생을 욕 할거다. 그리고 한달 뒤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받겠지. 망할 놈.

지우개로 틀리게 그은 선을 슥 지우고는 다시 돌려줬다. 설이가 지우개를 집어 교과서 옆에 두었다. 그리고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는 피식 웃는다. 새끼.

"왜? 뭐, 뭐가? 뭔데?"

"그냥."

"너도 여자친구 생겨봐 이렇게 되지"

설이가 다시 피식하고 웃는다. 그래 나쁜 놈아 넌 공부하느라 바쁘구나. 뭐 내가 너보다 얼굴도 못나고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더럽다만, 그래도 난 애인이라는 게 있다 이거야.

물론 설이는 마음만 먹으면 여자친구 같은 건 금방 만들 수 있는 녀석이었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있어야지. 발렌타인데이 때, 겨울방학이었지만 설이의 사물함은 닫히질 않았다. 이 일은 학교의 전설로 남았고, 그걸 잘 알고 있지만 상관없다. 어쨌든 애인이 있는 건 나다. 같잖은 우월감이지만 어쨌든 내가 뭐라도 앞섰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같잖은 우월감이라 대놓고 말하면 분명 비웃음을 살 테다. 마음속으로라도 쏘아붙여야지.

아 됐다. 그림이나 계속 그려야겠다. 수업 시간 안에는 끝낼 수 있겠지.

얼마나 지났을까. 초에게 선물로 줄 그림은 나의 사랑을 담은 채 종이 위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잘 그리면 범죄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단 설이에게 보여줘야겠다. 이 녀석, 또 나름 섬세한 면이 있어서 또 쓸 만한 녀석이다.

설이에게 공책을 밀어주려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설이는 내 앞에 앉아있는 환이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환아. 지우개 좀 빌려줄래?"

환이가 책상 위에 있던 지우개를 집어 설이에게 건넸다. 설이는 고맙다는 듯 환이 손 위의 지우개를 가져갔다. 그리고 지우개를 쓰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환이 어깨를 두드려 지우개를 손위에 올려주었다.

"다 그렸는데 어떠냐?"

설이가 그림을 유심히 보더니 한마디 한다.

"별론데?"

"고맙다 새끼야"

설이가 웃었다. 오랜만이다. 잘 웃지 않는 앤데.

"아냐. 잘 그렸어."

공책을 덮고 책상아래로 집어넣었다. 설이는 다시 공부를 한다. 펴져있는 교과서 옆에 아까 내가 빌렸던 설이의 지우개가 놓여있다. 뭘까. 뭐 잠시 못 찾았던 거겠지.

국어 선생은 수업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고, 설이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자기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내 그림은 끝내준다. 이보다 더 완벽한 풍경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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