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동성애자인권연대 성소수자 부모모임)
자녀가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부모들이 겪는 과정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겪는 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앞에 ‘자녀가’ 혹은 ‘자신이’라는 주어를 넣어서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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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처음엔 동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가 맞는지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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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맞다는 걸 깨닫고 나면 이성애자 혹은 시스젠더(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가 될 수 있을지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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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그러다 이성애자 혹은 시스젠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엔 과연 성소수자로 사는 삶이 행복할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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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어차피 “정상인”으로 살 수 없을 테니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방법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힘이 좀 들긴 하겠지만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동성결혼법 통과 소식을 들으며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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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단계. 가끔 어떤 사람들은 성소수자가 부당한 차별을 받는다는 것에 분노하기도 한다. 이들은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후원하거나 직접 뛰어들기도 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성소수자 당사자들은 보통 4단계나 5단계까지 가는 것 같다. 자녀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들이 맞닥뜨리는 자녀는 보통 3단계나 4단계에 있는 상태다. ‘걸렸다’는 건 이미 동성 연인과 연애를 하고 있거나, “여자처럼/남자처럼” 하고 다닌다는 걸 들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한 자녀의 경우는 더 확실하다. 이들은 최소 4단계를 넘어선 사람들이다.
반면 처음 자녀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에 대해 알게 된 부모들은 이제 겨우 1단계부터 시작하는 단계다. 초등학교 4학년/5학년 때부터(트랜스젠더의 경우 그보다도 더 어린 시기부터)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않고 조용히 이 과정을 천천히 밟아 온 자녀들과 달리, 그들의 부모는 이 모든 단계를 한번에 뛰어넘기를 강요받는다. 자녀가 성소수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좋든 싫든 자녀와의 대화는 시작된다. 서로 다른 단계에 있는 두 사람이 대화를 하다 보니 대화가 잘 될 리가 없다. 먼저 이 단계를 지나 온 사람으로서 자녀들이 부모를 도와주면 좋겠지만, 자식이 부모를 가르친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부모들은 부모 자식 사이에 누군가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너가 잘못 생각한 거다”,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렇게 꽉 막힌 부모가 아닌 경우에도 자녀가 부모를 잘 도와주는 건 아니다. 많은 성소수자 자녀들은 부모가 겪는 과정이 자신이 겪었던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대부분은 자신이 스스로를 긍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는 그 순간 바로 지지의 대답을 듣길 원한다.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이 하루 만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부모가 자녀를 받아들이고 긍정하게 되는 것 또한 하나의 과정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부모들이 1단계나 2단계에서 멈추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렇게 멈춰 있는 부모를 성소수자 자녀들도 그저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사람을 바꾼다는건 불가능한거야’, ‘그냥 이 정도로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아’, ‘이 모든 걸 감당하기엔 우리 부모님은 나이가 너무 많아’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도 하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그래도 더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각 단계를 잘 살펴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부모에게 알려줘야 할 꼭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저 자기가 그 단계에서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 각 단계를 완료하지 않고 그냥 뛰어넘은 경우도 있고, 성소수자 당사자여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각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필자 나름대로 정리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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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 2단계: 본인이 스스로를 동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 등으로 인정하게 된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들려주자.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애/여자애 이야기, 그 후로 이성을 좋아하려고 노력했던 이야기, 어릴 때 치마를 입기 싫었던/입고 싶었던 이야기, 여자/남자 화장실을 선택해야 할 때의 그 기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인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 UN을 포함한 많은 곳에서 성소수자를 인정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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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 3단계: 동성애(성적 지향)의 경우 대부분의 주류 의학계와 주류 심리/상담학계가 소위 “동성애 치료”라고 알려진 시도와 그 “성공 사례”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이미 1973년부터 미국 정신 의학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보지 않고 있고, 1990년부터는 국제보건기구(WHO)에서도 동성애가 정신질환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성별정체성)의 경우 성별불일치감(gender dysphoria, 혹은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라고도 불린다)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런 불일치감으로 인해 아주 어릴적부터 우울증, 자살/자해 시도 등 정신건강이 심각하게 저해되는 경우가 많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성전환 수술이나 호르몬 치료 등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런 사실들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자료를 찾아 인쇄해서 부모님 방에 흘리고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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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 4단계: 부모님이 이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설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성소수자 자신들 중에도 이 단계를 뛰어넘지 못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은 부모님과 함께 이 단계를 넘어서도 좋다. 가장 중요한 건 희망을 갖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가장 큰 약점이란 것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고 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느낄 때, 두려움만 남았을 때 일어설 수 있는 건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 ‘성소수자 사회 포용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나라이다. 국제 여론조사 연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지난 6년간 전 국민의 21%가 동성애 지지자로 돌아섰다. 연령별 조사 결과는 더욱 긍정적이다. 50대 이상은 16%만이 동성애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대답했지만, 30대-40대는 절반 정도가(48%), 20대(18~29세)는 무려 71%가 동성애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유럽의 아주 많은 나라가, 미국의 제법 많은 주에서 이미 동성 커플간의 결혼이 법적으로 인정받고 있고, 동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 당하거나 차별 받는 것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도 속속 생기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필자가 한마디 하자면,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물론 이 속도를 좀 더 높일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인권단체에 후원을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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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 5단계: 무엇이 부당한 것이고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 명확히 구분 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필자는 적어도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 때문에 고통받거나,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지 못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성소수자가 되려고 선택하는 것이 아닌 이상(이 부분은 미국 정신의학회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미국 성소수자 운동진영에서는 미국의 동성커플의 결혼이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함으로 인해 법적으로 얻지 못하는 권리가 1138가지나 된다고 말한다. 각종 연금의 배우자 승계, 증여/상속의 배우자 공제, 직장 의료 보험 피부양자 지정, 배우자 간병경조휴가, 가족 수당 등 성소수자가 받는 차별 중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권리를 박탈당해 받는 차별만 이렇게 많다는 뜻이다.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도 성전환 수술 비용을 보험기관에서 부담하지 않아(이건 명백한 차별이다. 실제로 그런 판결도 속속 나오고 있다) 몇 천만원에 이르는 수술 비용과 호르몬 투여 비용을 개인이 부담하고 있다. 이에 더해 고용상의 차별, 군형법 상의 차별, 성소수자 혐오성 왕따/괴롭힘으로 인해 교육 기회를 박탈 당하는 청소년 성소수자 문제, 혐오 범죄 등 성소수자가 받는 부당한 차별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사실 성소수자 인권의 지지자가 되기 위해 꼭 성소수자 이거나 그 가족일 필요는 없다. 그저 다른 사람에 대한 인류애만 있으면 된다. 200년 전엔 노예 해방이, 100년 전엔 여성의 투표권이, 50년 전엔 인종차별 철폐가 "찬성과 반대"의 문제였다. 소위 “사회 통념”이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소수자 인권이 부인되어선 안되는 이유다. 인권엔 양보도 타협도 없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이런 정보가 있어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종교적 신념과 자녀의 성소수자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HIV/에이즈 감염이 너무 걱정되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부모님들이 그런 경우다. 사실 이런 것들은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공세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성경과 에이즈를 이용해 그들이 만들어낸 동영상들을 생각보다 많은 성소수자의 부모들이 보고 있다(왜 그런지는 검색엔진에서 ‘동성애’를 검색해보면 알 수 있다. 인해전술에 강한 그들의 글은 주로 검색결과의 윗쪽에 나타난다). 성소수자 자녀들은 부모에게 이런 정보의 오류를 정확히 짚어 줄 필요가 있다. 물론 그건 본인의 몫이다. 부모님에게 추천할만한 좋은 글을 알지 못한다면 당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좀 찾아서 읽어라. 이미 성소수자 관련 글은 넘쳐난다. 성경도 에이즈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글을 마치며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커밍아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닌 기나긴 여정이라는 점이다. 오래 걷고 싶으면 한번에 너무 힘을 빼지 않는 것이 좋다. 더욱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러니하게도 당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과 함께하면 참고 기다려주면서 함께 손 잡고 가는 게 이 여정을 끝마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끔씩 도와주기도 하면 더 좋고.
♬성소수자 부모모임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rainbowmam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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