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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해외 인권소식

태평양 너머 만난 평등을 향한 무지개 - 미국 뉴욕 성소수자 단체 방문기

by 행성인 2014. 9. 10.


장병권 (동성애자인권연대 상임 활동가)


 

나에게 뉴욕은 벅찬 언니 사만다가 나오는 섹스 앤 더 시티의 무대이자 ‘뉴욕에서는 지루한 일이 없을거야!’라며 신디 사운드 가득 찬 펫 샵 보이스의 노래이다. 더불어 성소수자 평등을 향한 투쟁 – 스톤월 항쟁이 일어난 ‘스톤월 인’이 있는 곳이지만 돈과 전쟁으로 먹고사는 ‘미 제국주의의 심장’이다. ‘비자도 없고 비행기 값 비싼 이곳을 내 일생에 가볼 수 있을까?’하며 TV 속 뉴욕을 보는 곳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 올해 초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이종걸 사무국장과 아름다운 재단 활동가 재충전 프로그램 해외 연수 부분에 내보자 했고 우여곡절 끝에 뉴욕 성소수자 자긍심 축제 (Gay Pride Fest & March) 기간에 맞춰 성소수자 단체들을 방문하는 프로젝트가 선정되었다.

 

애초 뉴욕 방문을 기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게이 드라마 Looking의 배경이며 하비 밀크의 자취를 보고 싶어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고민했다가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가 잘 되어있다는 영국 런던을 고민하기도 했다. 헌데 신청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만날 단체를 선정하는 것도 현지 통역을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나와 이종걸 사무국장은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 성소수자 커뮤니티 센터, HIV/AIDS 활동 단체 그리고 성소수자 커뮤니티 활동 단체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높은 영어의 벽을 실감하며 아등바등하며 찾아보았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아주 다행히 2000년대부터 재미동포청년고국방문프로그램(KEEP)으로 알게 된 뉴욕 진보적 한인 단체 ‘노둣돌’의 주연님과 무지개 청소년 세이프 스페이스를 함께 준비하고 있고 뉴욕 성소수자 가족 모임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 ‘다리 프로젝트’의 클라라 윤님 그리고 뉴욕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 케이님의 도움으로 현지 단체 섭외 및 프로그램을 준비할 수 있었다. 여러 실무 준비를 마치고 6월 27일부터 7월 6일까지 뉴욕을 방문했다. 총 9개 단체 방문과 무지개 청소년 세이프 스페이스 후원을 위한 다큐 ‘종로의 기적’ 상영회 그리고 세계 최대 규모의 성소수자 자긍심 행진을 참여한 모습의 생생한 기억을 다 나열하고 싶지만 이 글을 통해서는 인상적인 순간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살아 숨쉬는 역사를 위한 변화 – 레즈비언 허스토리 아카이브Lesbian Herstory Archive

 

스무 시간이란 장시간 비행기로 뉴욕 JFK 공항에 도착 후 할렘 북쪽 숙소로 이동 그리고 일정을 점검하고 바로 골아 떨어졌다. 다음 날 상쾌한 기분으로 브루클린에 위치한 레즈비언 역사 박물관(Lesbian Herstory Archive)를 찾았다. 애초 일정에는 없었지만 케이가 꼭 가보자고 했고 이날은 아카이브를 둘러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조그마한 집 3층을 사용하고 있는 이곳을 들어가자마자 오래된 책 냄새가 가득했다. 벽에는 온갖 자료들이 그간의 세월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뜻 이곳을 설명해 주겠다고 레즈비언 할머니 테비, 데비의 목소리에 이끌려 둘러보기를 시작했고 먼 곳을 찾은 동양 ‘게이’들이 신기했던지 어디서 왔냐고 묻기도 했다. 책장에는 분야별, 사료별로 정리된 책자와 자료들이 있었고 ‘이성애자’들이 쓴 소위 할리퀸 같은 ‘레즈비언 판타지 소설’도 보관하고 있었고 여러 레즈비언 인물들을 기념하는 코너도 있었다. 2층에 올라가니 아직 분류 중인 자료들이 층층이 쌓여있었고 자원봉사자들은 그 자료들을 분류하거나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설명 없이 들으면 30분도 걸리지 않았겠지만 쌓인 자료만큼이나 이야기들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레즈비언 판타지 소설                                       88년도 에이즈 자료

 

흑인 레즈비언 활동가를 기념하는 코너                방문 후 기념 촬영

 

도서관 같으면서도 커뮤니티 룸 같기도 한 이곳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첫째로 레즈비언 관련 자료는 어느 것이든 수집한다는 것이다. 매카시즘 당시 FBI에 매수되어 프락치로 여러 성소수자들을 신고했던 어느 레즈비언의 자료를 받아 보관하고 정리 중에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 나이, 생사를 불문하고 레즈비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편지, 일기, 사진 등 자료들을 다 모으고 있었다. 역사에 남아있는 레즈비언 정체성을 모으고 그것을 온라인을 통해 나눈다면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지지 않을까.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자료들은 원한다면 공개한다는 것이다. 이미 상당수가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가 되었고 학생, 관련 연구자들을 위해 내어 놓는다고 한다. 원래는 하얀 장갑을 끼고 조심조심 자료들을 다루었지만 ‘역사 기록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활용될 수 있도록 원칙을 수정했다.’고 한다.

 

비록 문서를 통해서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거나 긍정하거나 혹은 사랑앓이를 했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시간들의 기록을 바라보며 한 사람의 생애사를 읽는 작업이야 말로 언제나 어디서나 레즈비언들은 존재했고 아름답게 살아왔다는 생생한 울림이 아닐까. 현재 신나는 센터에서 ‘성소수자 생애사 영상 기록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나로서는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더없이 고맙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모두를 위한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 - 다이크행진과 프라이드반대의밤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 맨하탄으로 향했다. 뉴욕 공공 도서관 앞에 다다르며 짧은 머리의 부치 언니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호모포비아 몇몇도 커다란 플랑을 들고 행진 대열을 향해 서 있었다. 이날은 22년을 맞이하는 다이크행진(Dyke March) 날이었다. 행진 대열 앞에 차량도 없고 화려하게 꾸민 사람들도 없었지만 ‘거리에서 그녀들의 역사를 만들자’라는 슬로건으로 형형색색 무지개를 한 레즈비언들과 유모차에 아이와 함께 나온 레즈비언 커플 등등 즐겁게 행진을 시작했다.

 

1993년 워싱턴에서 시작된 이 행진이 뉴욕으로 전해졌고 성소수자 자긍심 행진 전날 레즈비언들은 ‘퍼레이드(Parade)’가 아니라 ‘저항 행진(Protest March)’를 한다. 경찰에 집회, 행진 신고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으레 이날이 되면 이곳에 모여 아주 긴 저항의 행진을 펼치고 있다. 이날도 유색인종 트랜스젠더 활동가의 석방을 요구하는 피켓이 종종 보이기도 했다. 


Dyke March/ Dyke March 앞에 선 호모포비아 / 성소수자자긍심주간에 여섯색 무지개로 바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이날 저녁 어느 요상한 곳에 찾아갔다. ‘프라이드반대의 밤(Anti – Pride (parade) 2nite)’이라는 이벤트였다. 점점 상업화 되어가는 성소수자 자긍심 행진과 미국 성소수자 주류 운동을 비판하는 자리였다. 한껏 치장한 흑인 트렌스젠더 언니는 ‘스톤월은 항쟁이지 축제가 아니다! 스톤월에 앞장서던 트랜스젠더들은 어디로 갔나!’하며 목청껏 외쳤고 아시아인 남성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무대에 나와 동성 결혼과 양육과 관련된 미 NBC 시트콤 ‘뉴노멀(new normal)’을 비꼬듯 패러디하는 만담을 펼치기도 했다.

 

‘돈’과 ‘관광 상품’으로 전락하는 뉴욕의 성소수자 자긍심 행진을 비판하는 이벤트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권리와 저항을 외치는 다이크행진을 함께한 후에 나는 호모포비아의 방해를 이기고 야밤 행진을 끝까지 마친 서울의 퀴어퍼레이드가 떠올랐다. 그리고 성소수자 권리를 담은 피켓, 박근혜 퇴진을 담은 피켓을 보고 몇몇이 눈을 찌푸리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평등을 향한 권리와 부당함에 맞서는 저항을 어떻게 표현하고 만들어야할까?’하는 고민도 들었고 군대 내 동성애 차별 정책이 폐지되고 결혼과 양육의 동등한 권리, 노동, 고용에 있어서 동성애자 차별을 없애는 성과를 얻은 뉴욕의 다른 면이 더 궁금해졌다. 성소수자 자긍심 주간에 맞춰 여섯 색깔 무지개로 바뀐 ‘엠파이어 스테이프 빌딩’의 화려한 불빛 아래에는 어떤 삶들이 있을까.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안전한 무지개 쉼터를 만나다. - 알리포니 드롭인센터, 실비아 쉼터

 

서울에서는 한국 최초로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쉼터 – 무지개 청소년 세이프 스페이스 활동이 이제 막 시작이 되었다. 올해 초부터 동인련 담당으로 고민도 나누고 실무를 맡아 함께하고 있다. 모금 활동이 막바지에 이르고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시기였기에 나의 주목적은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를 만나는 것이었다.

 

뉴욕 흑인 문화의 산실 할렘 지역의 아폴로 극장 옆에 위치한 알리포니 드롭인센터(Ali Forney Drop in Center)(이하 알리 포니)는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서비스 센터이다. 이곳은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다리는 이용자들이 낮에 편하게 찾아 올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에는 ‘껄렁거리지 말고, 폭력적인 신호도 안된다’고 붙어있어 조금은 긴장하기도 했다. 2층에 올라서니 오른쪽으로는 강당 겸 식당과 HIV/AIDS 테스트를 비롯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 컴퓨터가 가득한 교육 시설 등이 있고 왼쪽에는 활동가 사무실이 7,8개가 위치해 있다.


알리 포니 센터가 아웃리치 프로그램에서 배포하는 물품 / 알리 포니 센터 담당자와 방문 기념 사진 촬영

  

“미국 전역에 걸쳐 매해 약 500,000명의 청소년 홈리스가 생긴다. 그 중 많은 숫자가 청소년 성소수자 일 것이며 대체로 유색 인종 청소년 성소수자 비중이 높다. 사회적 분위기가 좋아지고 더불어 자기 정체성을 깨닫는 시기와 커밍아웃도 빨라지고 있어 매우 취약한 나이에 쫓겨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소득격차 때문에 집에서 같이 살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들도 있다.”고 우리가 만난 알리 포니의 담당자 잭 버스키(Jack Bethke)는 말했다.

 

알리 포니는 아웃리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뉴욕 부둣가, 공원 등을 밤에 찾아 조그마한 세면도구를 나눠주며 거리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만나고 있었고 시, 주, 연방 정부의 지원금 이외에 개인 후원금은 모두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만 운영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21세가 되면 비청소년 쉼터로 가야하는데 그 곳에서는 성소수자들이 심한 괴롭힘을 당하거나 폭력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21세~25세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쉼터는 개인 후원금으로 유지되고 있다. 의류 후원을 받을 때에는 입던 옷은 받지 않는다. 집 없는 청소년 성소수자라고 맞지도 않는 싸구려 헌 옷을 입어야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집(쉼터)에서 형제, 자매들이 모여 지내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굳이 기숙사처럼 정체성별로 굳이 나누지는 않는다.” 등 여러 쉼터 운영의 자세한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실비아 쉼터(Sylvia’s Place)는 뉴욕의 성소수자 교회인 매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Metropolitan Community Church)에서 별도의 자선 재단을 설립해서 만든 청소년 성소수자 긴급 임시 쉼터이다. 총 3층 작은 건물에 1층은 쉼터 2층은 예배당 3층은 사무 공간이 있다. 이 쉼터는 스톤월 항쟁에 앞장섰고 이 교회 구성원이기도 했으며 홈리스였던 실비아 리베라가 2002년 암으로 죽어갈 때 담임 목사에게 쉼터를 만들어 달라고 유언으로 남기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녀의 유언을 교회에서는 진지하게 논의하고 추진하여 그 해 바로 열었다. 마침 찾아간 날이 그녀의 생일 전 날이었고 2층 예배당 한 켠에 모셔진 그녀를 화장한 재와 사진에 인사를 드렸다.

 

교회 한켠 마련된 실비아 리베라의 사진 / 메트로 폴리탄 공동체 교회 예배당 – 왼쪽부터 성소수자, 베어, SM 깃발

 

실비아 쉼터는 교회 재단이 운영하지만 절대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 청소년 성소수자 긴급 임시 쉼터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역량에 따라 중장기적인 쉼터, 주택을 얻고 지낼 수 있기 전 당장 임시라도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긴급 임시 쉼터’ 형태를 취했다. 1층 강당처럼 보이는 곳 한 켠에는 접이식 침대가 놓여져 있었고 벽면에는 이곳에 지내는 이용자들의 물건이 담긴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가 선반에 놓여져 있었다. 사무실, 주방, 샤워실 등도 자리하고 있었다. 포근한 느낌이 드는 곳이 아니었지만 당장 잘 곳이 필요한 홈리스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쉼터에 들어와야 하는 인원은 많지만 14명 이상은 무리라고 인정하고 운영하고 있으며 처음 오게 되면 얼마나 머무를 것인지 정한다. 이곳은 뉴욕에서 아주 큰 버스 정류장 근처이기에 전국 각지에서 오기도 한다. 부모가 쫓아내거나 성폭력 피해를 입거나 종교적인 기준에 벗어났다거나 꿈과 희망을 찾아 뉴욕으로 상경했지만 현실과 다르게 홈리스가 된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찾아온다. 정신적으로 자살 충동, 우울증, 양극적 성격장애, 정신 분열, 약물 상용자, 알콜 중독에 처한 청소년 성소수자들도 있지만 이런 여부와 관계없이 받아들이고 있고 덜 위험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상담하고 있다. 문제가 심하거나 폭력적이면 좀 더 전문적인 기관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마음 아프다고 다 받아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이곳 사무국장의 말은 실비아 쉼터에 찾아오는 홈리스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두 곳 모두 시, 주, 연방의 지원을 받는다. 정부 등록 단체로 운영비, 사업비 등을 충당하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후원이었다. 실비아 쉼터의 경우 “성실하고 조용히 이 교회를 다니던 한 신자가 있었는데 꽤 젊었을 때 돌아가셨다. 개리 스칼라라는 사람이었고 이 사람이 쉼터에 아주 큰 돈을 남겼다. 이 사람의 마음과 이름을 담아 의료 클리닉 프로그램(개리 스칼라 수퍼 두퍼 클리닉)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뉴욕의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를 만나면서 사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돈과 자원’이었다. 당연히 지원을 받겠지만 개인들의 후원을 어떻게 조직하는지 몇 퍼센트가 되는지 운영은 어떻게 하는지 등이었다. 한국 최초로 시도되는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 - 무지개 청소년 세이프 스페이스가 일 년을 지낼 수 있는 3,200만원 가량을 약 8개월에 걸쳐 힘겹게 모은 것도 기적이지만 앞으로 돈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과 자원이 있어야 거리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하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과 시설도 마련해야 한다.

 

뉴욕에서 만난 두 곳의 쉼터 관계자과 나눈 이야기들은 당장 필요한 정보를 채웠기 보다는 든든한 친구를 얻은 느낌이었다.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를 만든다구? 프로그램이나 상담 자료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우리가 해외 쉼터 연계 프로젝트를 하려고 하니까 꼭 연락해. 후원을 조직할 때 이렇게 하면 좋고 꼭 담당자가 있어야해. 할 수 있는 걸 꼭 정해 놓고 해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 기존 사회 서비스를 활용해야 해. 사람도 마찬가지야. 함께 헌신 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어. 우리 활동가들도 피로가 상당하지만 잘 버티면서 하고 있어. 꼭 필요한 일이잖아.”하며 첫발을 내딛는 무지개 청소년 세이프 스페이스에 격려와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이 감동은 서울로 돌아오기 이틀 전, 미 독립 기념일 연휴를 앞두고 얼마나 올까 걱정 했던 무지개 청소년 세이프 스페이스 후원을 위한 다큐 ‘종로의 기적’상영회로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반갑게 찾아주었고 1,060달러라는 소중한 후원금이 모였기 때문이다.

  

뉴욕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HIV/AIDS

 

1987년 한 해만 무려 6만 명의 사람들이 에이즈로 세상을 등졌다. 미 레이건 정부는 어떠한 대책도 없었고 동성애들의 돌림병이란 낙인만 점점 진해졌다. 이때 대표적인 운동 단체인 액트업(ACT UP·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이 생겨났고 90년대 중반까지 제약회사, 식품의약국(FDA), 보건당국 등을 향한 공격과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이 시간을 보내며 감염인 권리 보장 운동, 여성 건강권 운동,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함께 성장했다. HIV/AIDS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죽어가는 친구들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간호했던 사람들 등의 역사가 운동에 아로새겨졌다.

 

액트업이 모여 회의를 하던 ‘뉴욕 성소수자 커뮤니티 센터(The Center)’에는 액트업이 회의를 하던 강당이 있다. 현재 이곳은 리모델링이 한창으로 벽화만이 당시를 떠올려주고 있었다. 또한, 리모델링으로 안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 화장실 중 하나는 HIV/AIDS로 사망한 작가 키스 해링의 작품이기도 하다.

 

액트업 모임이 열렸던 센터 강당  / 키스 해링의 작품이 있는 센터 화장실 앞

 

센터를 비롯해 두 곳의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GMHC(Gay Men's Health Crisis, 게이 건강지원 단체), APICHA (Asian & Pacific Islander Coalition on HIV/AIDS, 아시아태평양 이주민 대상 HIV/AIDS단체)에서도 뉴욕 성소수자 자긍심 행진에 함께하면서 HIV/AIDS는 뉴욕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특정 그룹의 문제나 일부가 아닌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이지 우여곡절 끝에 연락이 닿아 만났던 뉴욕게이합창단(NYC Gay Men’s Chorus) 예술 감독 찰스 베일(Chales Beale)의 인터뷰에서도 느껴졌다. “에이즈로 세상을 등지는 친구들을 위해 장례식장에서 노래를 했다.”며 약간 빨개지는 눈시울로 말했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잔혹한 에이즈 위기에 세상을 떠나는 동료들을 보내며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로 서로를 보듬었을 애잔한 합창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HIV/AIDS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People Living with HIV/AIDS)’라는 문구가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구나 느끼게 되었다.

 

GMHC는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에이즈 예방, 운동 단체이다. 거리 검진, 알콜과 약물 피해 경감

(harm reduction) 프로그램과 낙인과 차별에 맞선 캠페인 등을 펼치고 있다. 흔히 남성 동성애자만을 타겟으로 할 것으로 보이지만 빈곤과 가정폭력, 유년기 성폭력 등으로 HIV/AIDS에 감염된 여성 감염인과 고위험군 여성을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주거 환경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남성이 주거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섹스를 강요하는 경우 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는 것은 게이 청소년도 비슷하다고 한다.

 

여성 감염인 모임에서 만든 퀼트                        게이, MSM 대상 캠페인 포스터

 

GMHC에서 인상적이었던 곳은 식료품 창고였다. 키스 해링 재단의 기금으로 운영하며 음식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에 맞게 제공하며 스토브 등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다른 형태로 식품을 제공한다고 한다. 더불어 피해 경감(하지 말 것을 강요, 제재하는 것이 아닌 덜 위험하고 안전하게 접근하며 스스로 줄이는 방법을 인식케 하는 것)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아직 한국 사회에는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알콜, 약물 의존도가 높은 HIV/AIDS 감염인에게 최대한 위험을 줄이는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예를 들어 ‘코카인을 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방식이 아니라 코카인을 하면 물을 좀 더 많이 마시고 주사는 다시 사용하지 말고 등등’이다. 이것과 동시에 침술과 상담을 병행하면서 스스로 중독을 관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며 여러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키스해링 식료품 창고                                    에이즈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캠페인 엽서

 


바다 건너 멀리 있지만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평등을 향한 무지개들을 만났다.

 

이번 아름다운재단 활동가 재충전 해외 연수 프로그램의 신청 제목은 ‘태평양 넘어 평등의 무지개를 만나다’였다. 상황과 조건 그리고 지나온 역사가 너무도 다른 그들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보편적 권리를 얻었으니 모든 이들이 평등할까하는 궁금증은 만나는 단체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가는 것일까?’로 변했다. 다녀온 후에는 “가보기 잘했다. 앞으로 활동에서 조금씩 갚아나가자.”로 닿았다.

 

아름다운 재단 활동가 재충전 기금과 단체, 개인들의 소중한 후원금으로 맘편히 좋은 구경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너무나 헌신적으로 도와준 케이님, 케빈님, 주연님 그리고 클라라 윤님께 고맙다. 더불어 “평등한 세상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태평양 너머 무지개”들을 만나니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고민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와 도움도 되었다. 



왼> 루터 마터킹 노동센터 벽화

오른> 방문 프로그램에 함께한 사람들, 왼쪽부터 케이, 캐빈, 주연, 종걸, 마크, 병권

 

뉴욕 맨하탄 거리를 걷다 우연히 만난 루터 마터킹 노동센터에 ‘투쟁 없는 진보를 얻을 수 없다.’ 문구가 담긴 벽화가 있었다. 다른 때였으며 그저 당연한 말이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먼 곳에서 사진에 담으며 오래 바라보니 ‘여유 있게 그러나 끈질기게 살아야하지는 않겠니?’ 하는 듯 다가왔다. 앞으로 이곳저곳에서 뉴욕 방문에서의 경험이 묻어나길 스스로에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