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만큼 다양한 직업들이 있다. 스무살 초반 꿈과 취업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나는 무엇을 하며 살게 될까 생각했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군대라는 곳은 그야말로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직업이었다. 더군다나 여자인 나에게 군대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으니까…
남자들은 군대라고 하면 자신이 근무한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눈다고 할 정도로 질색을 한다. 이해한다. 정말 안타깝고 안쓰러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군대에 가는 사람에게 국가의 부름이니 국가 수호자, 애국자라고 해도 거기서 그들의 위치는 그야말로 병사들이다. 국가의 의무를 지고 있는 그들은 ‘병사’로 퉁 쳐지고 때때로 불려지는 이름은 김병장, 임일병 등등 계급으로 불려 질 뿐이다.
군 복무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김병장과 임일병에게는 자신들의 이름이 있듯이 다양한 정체성이 있을 것이다.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 파묻혀 있을 뿐이지 그들에겐 각기 다른 모습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다.
우리나라 군대는 동성애자를 위한 인권제도를 갖추고 있으며, 군인의 기본 복무방침인 ‘군인복무규율’에는 동성애자 병사의 복무조항이 있다. 이 조항은 동성애자 병사의 인권을 보호하고 군 복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보장한다. 동성애자 병사에 대한 군의 지침에 따르면, 군대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동성애자도 차별받지 않고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입장만 보면 우리나라는 동성애자를 보통의 시민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국가 제도적으로도 전혀 차별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국민의 의무를 지고 있는 동성애자들에게 국가는 과연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가?
나는 여기서 우리나라 군대가 동성애자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고 바람직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조직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군대에서는 동성애자 인권에 대해 무지할뿐더러 제대로 이행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나마 제도적으로는 갖추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군 의무복무를 수행하고 있는 병사에게만 해당된다. 군에는 병사뿐만 아니라 군인으로 생활하고 있는 수많은 직업인들이 있고 그 중에는 나와 같은 동성애자나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정책적으로 병사들을 위한 동성애자 인권제도는 갖추어져 있지만 직업인인 군인을 위한 정책은 전혀 없다. 동성애자인 병사들은 군 복무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입장인 반면 직업 군인인 동성애자는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군대의 현실적이지 못한 동성애자 인권 제도는 군 복무를 하는 수많은 동성애자 병사들과 직업군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이는 군대에도 동성애자들이 존재함에도 실체 없는 유령처럼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이다.
나는 군인이라는 직업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군인이라는 직분을 항상 염려하게 된다. 왜냐하면 군인은 정치적 중립의 의무라는 규율이 있고 군을 대표하거나 군인으로서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것은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군인인 한 개인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임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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