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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잊혀진 성해방 투쟁의 전통을 들춰보는 이유 - 『무지개 속 적색』 서평

by 행성인 2014. 11. 11.

소유(동성애자인권연대)

 

 

 

 

“동성애자 인권 문제를 사회주의식으로 풀어내는 게 과연 맞는지 의문이 든다.” 동인련이 노동자 투쟁에 합류하는 이유를 적은 글에 한 독자가 단 댓글이다. 비록 진보라는 분류로 자주 묶이기는 하지만 노동운동 이라던가 마르크스주의 같은 주제들과 성소수자 이슈와의 연결은 여전히 낯설다. 비록 성소수자 노동자들이 가시화되기 어려운 척박한 토양 속에서도 지난 20여년간 성소수자들과 활동가들이 펼친 광범위한 활동의 결과로 진보 진영 내에서 의미있는 연대와 지지를 이끌어냈지만, 이는 필연적이라거나 새로운 사회를 향한 공동의 투쟁이라기보단 성소수자 또한 노동자라는 당연한 사실과 LGBTI의 가시성 추구에서 비롯되는 우연한 이해관계의 일치, 그리고 소수자 인권의 담론들을 통해 근래에 형성된 연대처럼 읽히기 쉬운 것 같다.

 

그런데『무지개 속 적색 - 성소수자 해방과 사회변혁』을 읽어보면, 이런 연대가 결코 최근에만 새로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20세기 전환기에 최초의 동성애자 권리 조직이었던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는 당시 세계 최대의 노동자 정당이던 사회민주당과 급진적 진보이론가들의 지지 속에서 동성애를 당대의 주요 정치 쟁점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강력한 전통이 작용했다. 더 나아가 사회 변혁이라는 전망 속에 성 해방이 당연하게 포함되던 공간과 시기도 있었다. 20세기 초 러시아는 동성애자 해방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는데, 그럼에도 1917년 혁명으로 탄생한 신생 노동자 정부는 첫 조치 가운데 하나로 동성애를 비범죄화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억압의 토대로 가족을 지목하며 사유재산과의 관계에 주목한 결과 성 해방을 혁명의 일부로 보는 진보주의자들의 도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연대는 시간이 지나 미국과 영국에서도 재연된다. 스톤월 항쟁 이래 성소수자들이 흑표범당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영국에서는 광산 노동자들이 퀴어퍼레이드에 깃발을 들고 동참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투쟁과 노동운동을 연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 동성애자해방전선은 동성애자 억압을 낳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혁명적 투쟁을 호소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혁명이 필요한지, 혁명을 성취할 힘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모호했다.
                                                                                                 -무지개 속 적색 中에서

독일과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와 성 혁명을 긴밀하게 연결했던 전통은 실패하고 잊혀졌기 때문에, 이러한 단절은 노동운동의 퇴조와 더불어 투쟁을 개인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늘날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이루어낸 많은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례들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반동의 역사 때문이다. 활력 넘치던 독일과 러시아의 동성애자 하위문화는 죽음의 수용소와 함께 사라졌고, 동성애도 다시 범죄가 되었다. 영국과 미국에는 에이즈 위기가 찾아왔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의 성과가 속된말로 '돈이 된다'라고 하는 식으로, 자본의 이름 하에 용인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함과 동시에 우리의 성과들은 과연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법률적 평등으로는 충분치 않다. 변화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오늘날 적색을 다시 들춰보게 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