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지개문화읽기

[정휘아의 퀴어뮤직쌀롱 #4] “나는 락스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설이 될 것이다.” 영국 밴드 QUEEN(퀸)의 보컬 Freddie Mercury(프레디 머큐리) 첫 번째 이야기

by 행성인 2014. 12. 8.

정휘아 (동성애자인권연대)

 

12월 1일 에이즈감염인 인권의 날을 맞아서 쓰는거라 너무 예상가능한 인물을 소개하는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뻔함을 되세김질 하면서 그의 짧은 인생이나마 돌아보고 그의 팬으로서 이 글을 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음악을 듣고 많은 위안을 받았으며 이런식의 빚을 많이 진 사람이라서 몇 줄의 글로 과연 그를 잘 추모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이번 글은 오랜만에 쓰는거라 무진장 길다! 나는 경고했다. 길다고! 참고로 이 뮤지션은 한 회로 소개하기엔 무리가 있어서 두 편으로 나눠서 쓰기로했다. 아니, 그래도 길다니까? (이 글은 google이 아니었으면 작성하지 못했을 뻔했고 엔하위키 및 위키백과 등등을 참고하였으며 인용을 많이 했다는 점을 독자여러분들께 알린다.)

 

 

 

“I won't be a rock star. I will be a legend."(나는 락스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설이 될 것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한 마디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락스타가 아닌 전설이 됐다. 아직도 수많은 뮤지션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며 음악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전 세계에 있는 팬들은 아직도 그의 음악을 열광적으로 사랑한다. 죽어서도 이토록 사랑받는 뮤지션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프레디 머큐리는 현재 탄자니아의 자치령인 잔지바르에서 1946년에 태어났다. 그 때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에서 파로크 불사라(구자라트어: ફરોખ બલ્સારા‌)라는 이름으로 인도의 국적을 가진 영국 총독부 공무원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과 그의 외모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인 영국인은 아니었다. 그의 조상은 8세기에 이슬람교도에 쫓겨 인도로 피신한, 아후라 마즈다를 숭상하고 불을 중요한 신앙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페르시아인(이란인)이다. 파로크란 이름이 영어로 발음하기 불편해서 프레디란 별명을 많이 썼다. 프레디는 파로크란 이름보다 프레디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했고, 퀸을 결성하면서 프레디란 이름으로 아예 개명하기에 이른다(영국 시민권을 얻으면서 과거 잔지바르 시절의 잔재를 완전히 지울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머큐리는 그리스신화의 신인 도둑과 전령의 신 헤르메스에서 따왔다. (음악의 전령사가 되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음악에는 어린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고 알려진다. 학창 시절에 합창부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아마추어 밴드에서 건반을 치기도 했지만 그는 이것과는 무관하게 영국에서 일링 예술 대학(Ealing Art College)그래픽 디자이너 학사로 대학을 마쳤다. 아무래도 당시에 1970년대 초에 그럴듯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엘리트였고 음악을 하지 않았어도 먹고 살 길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퀸에 가입한 이후 직업 뮤지션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렸고, 친한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해야 될까봐.” 라고 말했었다고. 프레디 머큐리가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고, 당시 영국 대학생들도 술파티 같은 것을 빈번하게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숙취에 쩔어 새벽에 집단으로 널브러져 있던 일도 자주 있었는데, 프레디가 기타를 들고 존 레논의 노래를 연주하며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끝내줬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는 아마추어 밴드인 Ibex(후에 프레디의 제안으로 밴드명을 "Wreckage"로 변경한다)에서 리드 보컬로 활약했다. 그곳에서 퀸의 앨범 수록곡인 〈Stone Cold Crazy〉와 〈Liar〉의 기본이 되는 곡을 작곡 했다고 한다.


이쯤에서〈Stone Cold Crazy〉와 〈Liar>를 들어보자!

 

 

 

 

 

1970년대에는 팀 스타펠, 로저 테일러(퀸의 드러머), 브라이언 메이(퀸의 기타리스트)의 밴드 스마일에서 활동하였는데, 스마일의 보컬인 팀 스타펠이 "험피 봉"이라는 밴드로 이적하기 위해 스마일을 탈퇴하자, 프레디는 브라이언과 로저와 함께 "퀸"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였으며, 세 번의 오디션 끝에 베이시스트로 존 디콘을 직접 선발하였다. 후일 로저는 스마일 시절에 웬 이상한 녀석이 공연마다 와서 공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했는데 그게 프레디였고 그 잔소리가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고 밝혔다.

 

 

 

 

퀸의 로고는 프레디가 디자인했으며, 아래의 자켓도 프레디의 작품. 이 로고는 나이트 앳 더 오페라 이외의 앨범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로고에 들어가는 동물들은 멤버들의 생일 별자리를 나타낸다고. (예를 들어서 프레디 머큐리는 처녀자리, 로저 테일러의 사자자리 등등)


밴드 이름을 QUEEN으로 제안한 것도 프레디 머큐리였다. 처음에 다른 멤버들은 퀸이란 밴드명에 반대했다고 한다. QUEEN이란 단어에는 속어로 '동성애자'와 같은 의미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자기는 죽어도 밴드명을 QUEEN으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다른 멤버들도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해 밴드 이름을 퀸으로 결정하게 된다.


퀸 초기에는 7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 글램락의 영향으로 긴 머리, 검은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나비 날개같은 옷, 몸에 딱 붙는 타이즈(발레복)를 주로 입었는데 손발이 오글거리는 의상이지만 의외로 또 소화를 잘 했다. 강한 인상, 큰 얼굴과는 달리 몸매, 특히 하체가 길고 가는 편이라 그럭저럭 소화를 했다. 날개 의상은 곧 자취를 감추지만 타이즈는 퀸 중반기(1976~1978)에도 종종 보인다.


퀸 결성 초반에 프레디 머큐리는 유난히 무대와 의상에 집착했다고 한다. 공연 준비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을 정도였다고. 게다가 도저히 남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괴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해서 퀸이 공연 준비를 하는 대기실에서는 '으악! 도저히 이런 거 못 입겠어!'라는 소리가 자주 튀어나왔었다고. 특히 퀸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고 성격이 수줍었던 멤버 존 디콘이 이상한 의상을 자주 강요받아서 난감했던 적이 많았었다고 한다.

 

 

 

 

3집이 나오기 전까지의 퀸은 여타 무명 밴드가 그렇듯이 금전 사정이 안 좋았다. 이는 프레디 머큐리도 마찬가지였다. 퀸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 출연을 했을 때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가전제품가게에 진열된 텔레비전으로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길거리에서 봐야만 했다.


데뷔 앨범인 <Queen>을 시작으로 점점 이름을 알리면서 명곡 <Bohemian Rhapsody>가 수록된 <A Night at the Opera>가 대박을 치면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상하게 평론가들한테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이 노래야 워낙 유명하다지만 또 들어보자. 도대체 난 아직도 평론가들에게 이 노래가 왜 이렇게까지 가루가 되도록 까였는지 모르겠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인데 자기 까는 소리를 줄창 들으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만무. 인터뷰도 잘 안 하고 평론가들에 대한 감정도 무척 좋지 않았다. 특히 사생활 때문에 더 그랬는데 프레디의 게이 의혹과 문란한 사생활을 파헤치는 찌라시 언론의 행태로 그는 언론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후에도 이런 비난을 들어야만했다.)


그런 비난들을 뒤로하고 프레디 머큐리는 무대 위에서는 확실한 프로였다.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가창력도 있지만,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 역시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몸이 아프든 기분이 안 좋든 무대 위에만 올라가면 항상 열정적으로 관객들을 압도하며 최선을 다해서 공연을 펼쳤다. 물론 공연을 중간에 그만두는 일도 없었고, 노래를 부르다가 가사가 틀리거나 연주가 엉켜도 그것에 얽매이는 일도 없었다. 딱 한 번 공연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둔 적이 있는데, 너무 열정적으로 무대를 휘젓고 다니다가 발목이 삐어서 그랬었다고...! 이 열정적인 뮤지션의 모습은 커트 코베인의 유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커트 코베인은 자신은 프레디 머큐리처럼 음악과 공연을 즐길 수 없다며 유서 첫머리에 한탄 비슷하게 적어 놓았다.


라이브에서는 특유의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조련선동스킬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태디엄 공연을 해나가는 데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 조련당하는 사람들을 보라!

 

 

(너무 잘 길들여진 모습이 보이는가.)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이런 공연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몇 년 남지 않았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어쩌다가 죽게되었는지 다음 회차에 소개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