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세이어 빨강
봄꽃작별
그녀는 외쌍꺼풀이었다. 나는 쌍꺼풀이 없는 그녀의 왼쪽 얼굴을 좋아했다. 내 나이, 그녀의 나이 열일곱, 나른했던 봄날, 아무도 찾지 않는 새하얀 자리들, 밀려 내려온 꽃들이 우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빙글빙글 돌았던 것 같다. 그녀가 내게 입을 맞췄던 순간.
그녀와 나는 짝이었다. 봄눈이 내릴 때부터 꽃이 만개할 때까지 나란히 앉아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조잘대다 보니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내가 들은 대답.
“너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아.”
지은 지 오래된 학교의 복도는 한 사람만 걸어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음의 크기가 서로 같지 않음에, 그 간격에, 그 높은 벽에, 그 거리에 순식간에 내 마음은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친구도 부모도 공부도 대학도 깊게 가라앉았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댔다. 폐 속까지 물이 들어차서 숨을 헐떡거리고, 각막 위로 수면이 일렁거리면서 시야를 흐렸다. 날 구해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며, 다시 매달렸다. 하루에도 몇 통 씩 써 내려간 편지들은 닿았지만 닿을 수 없었고, 편지지 위에 쏟긴 단어들이 문장들이 수 없이 번져나갔다.
그녀는 점점 멀어졌다. 늘 함께 붙어있던 자리도 멀어졌다. 같이 있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그녀는 내 곁에 오지 않았다. 내가 가면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멀어지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기 위해서 나는 움직이지 못 했다. 점점 삼킬 수 없었고,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모든 봄꽃도 졌다.
이런 부류의 이야기들이 흔히들 그러하듯 그녀와 나 사이의 이상한 기류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따가운 시선들이 옆얼굴에 꽂혔다. 욕하는 소리도 자주 들렸다. 마시던 캔 커피에 누군가가 가래침을 뱉어 놓기도 했고, 얌전히 놔둔 신발이 바닥에 나뒹구는 일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끝내는 선생님에게 불려갔다. 한때일 뿐이야, 어른이 되면 괜찮아, 교무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갑갑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나에게 키스한 것도 어루만진 것도 한때의 일에 지나지 않는 건가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누르며 교무실을 나섰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간 조용한 토요일의 복도. 그녀가 나를 본다. 그녀의 눈동자를 보는 것이 무척 오랜만인 것만 같다.
“우린 친구도 안 될 것 같아.”
끈적끈적한 여름 냄새가 났다.
학년이 바뀌자 그녀는 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봄이 두 번이 더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마지막으로 울었다.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며, 나와 같은 크기의 사랑이 아니라도 네가 해준 입맞춤으로 깊은 잠에서 깨어난 오로라 공주 마냥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전하지 못한 말들은 꽃마다 매달려있다. 곧 봄이 오며, 나는 아직도 교복을 버리지 못 했다.
렛세이어 주황
이젠 나의 이야기
“날 모르나요,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그댄데. 눈이 시려와 말을 할 수 없네요. 혼자서 바라만 볼뿐, 이렇게 가슴 끝이 아파도 이렇게 손끝이 떨려도, 그대 생각만 나지요. 미치게 보고 싶은 사람. 미치게 듣고 싶은 너의 한마디. 사랑해, 사랑해요. 그대는 어딨나요. 가슴깊이 박힌 그리운 사람. 그대 영원히 간직할래요.”
태연의 사랑해요라는 곡의 노랫말이다. 사랑이란 게 뭔지 조금은 알게 해준 내 첫사랑의 주제곡이기도 하다.
첫. 사. 랑. 첫사랑, 첫사랑. 흔하디 흔한 사랑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얘긴 아니었다. 교생 선생님의 이야기, 사촌언니의 이야기. 들으면 설레고 마냥 오글거리기만 했던 이야기였다. 진짜 이야기는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20살 여름 전까지는.
나의 첫사랑 이야기는 뭐, 별거 없다. “어렸던“ 나에겐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있는 벽이 너무나도 높아서 머릿속에 그리기만 해도 가슴 아픈 사랑이었다는 거.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는 이유로 생각하면 아리고 아픈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나의 첫사랑은 ‘그녀’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그녀이기 전에 커다란 장벽이 또 있었으니, 그녀의 ‘나이‘이었다. 나와 정확하게 15년 차이가 나던 그녀는 나의 학원 선생님이었다.
중1 말부터 홀로 유학생활을 했던 나는 대인관계에 지쳐있었고 결국 우울증 초기 증세를 보여 한국으로 도망치듯 돌아와야만 했다. 한국에서는 5년간 집 말고는 아무런 소속이 없던 나는 곧 일상들이 무료해졌고 어머니의 추천으로 중국어 학원을 등록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외국어와 친숙했지만 나는 왠지 중국어가 참 싫었다. 하지만 중국어보다 하릴없는 무료함이 더 싫었기에 중국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문제의 그녀는 입문반의 선생님이었고, 어른들에게 사랑받으려 하고 잘 보이는 걸 좋아했던 나는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이 선생님을 선생님으로써 좋아했던 여느 마음과 같은 색깔인줄 알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입문반 수업의 3분의 2가 다 끝나갈 무렵, 이미 그 색은 많이도 짙어져 있었다.
다가오는 줄도 몰랐던 그 감정의 크기를 느끼는 그 순간부터 감당하기도 벅찬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내 머릿속, 가슴속을 가득가득 채워갔다. 그 중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종교였다. 일단 우리 집은 외삼촌이 목회를 하고 계시고 친할아버지는 장로님이신, 양가 모두(제사를 지내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야말로 독. 실. 한. 크리스천 집안이다. 상상이나 되는가? 이런 가정에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라는 이유로 병자 취급당하고 몰매를 맞아야한다니. 사회에서의 거부감보다 가족들의 비판어린 말들이 끔찍하도록 더 무서웠다. 도저히, “나“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은 내 마음이, 절망적이었던 내 삶이 동경할 만한 사람을 만난 거라고 단정 짓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의 “불행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걸어서 20분 거리인 학교를 몇 시에 수업이 있든 상관없이 지각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내가, 그녀가 출근하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라가고픈 마음에 그녀의 수업의 첫 타임인 새벽 6시 30분 수업을 두 달 동안 매일 빠지지 않고 들었다. 변할 수 없었던 내가 변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나니까 머리는 덜 혼란스럽더라. 그런데 그 때부터는 맘이 더 많이 아파져 왔다. 그녀가 그녀라서 내가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이 짜증이 났고 그녀가 나보다 15살이나 많아서 더 많이 짜증이 났다. 그리고 그 짜증이 자괴감으로 바뀌었고 자괴감이 무기력감으로 바뀌어 갔다. 내 감정에 충실하면 나도 그녀도 내 가족들도 아프고 망가질 것이라는 끔찍한 상상 때문에 나는, 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일부러 찾아낸)어려운 중국어 문장의 해석이나 단어의 쓰임을 물어보는 카톡, 매일 남들보다 더 일찍 가서 그녀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라가며 하는 잠깐의 사담, 같이 수업을 듣는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날 때까지 천천히 짐을 싸며 그녀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하는 얘기가 전부였다. 학생과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호작용을 난 다 시도해봤고 몇 번 선을 넘어보려 했던 민망한 시도들은 그 시도 자체로 나에게 상처로 남았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사적인 것들을 물어보고 영화 같이 봤으면 좋겠다는 데이트 신청에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는 카톡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상이 구겨질 정도로 민망하고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행동들이지만, 모르겠다. 잘못한 걸까?
15살이나 어린 여자아이가 자신을 늘 기다리고 얘기를 할 때는 얼굴을 붉히는 걸 느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많이 혐오스러웠을까? 내가 많이 부담스러웠을까? 그때는 참 많이 아팠다. 나의 감정들이 묻어났던 그 행동들이 그녀에게 만지고 싶지 않은, 그렇지만 안 만질 수는 없는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그 때의 나의 모든 시도들이 이미 과거의 일이라서 다행이고 지금 내가 그 행동을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많이 아파서 내가 불쌍해서 다시 보기엔 너무 힘든 일이 이젠 지나간 일이라서 다행이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저물어 갔다. 매 끼니를 먹을 수가 없었지만 티낼 수 없었고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매일 뒷산에 올라 처량 맞게 엉엉대며 울었지만 티낼 수 없었다. 내 첫사랑은 참 조용했어야 했다. 끊임없는 한탄, 무기력감 속에 조용히 삭힐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것이었다. 나에겐 사랑이었지만 다른 이에겐 말끔히 말려있는 실타래를 풀어헤쳐놓는 것과도 같았다. 그래서 툭하면 꼬이는 스프링은 내 마음에만 두기로 했었다.
그렇게 일 년을 아팠고 결심을 했다. 그녀에게 무명으로 메일 한통을 보냈다. 차분하게 메일을 써내려갔다. 몇 번을 썼다, 지웠다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써내려갔다. 이 편지를 그녀가 읽을지, 읽고 무슨 생각을 할지 염려되어서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에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리고 보내기 버튼을 누른 다음에는 그 즉시 후회했다. 그렇지만 발송취소를 누르진 않았다. 나의 1년 동안의 짝사랑이 서글퍼서, 이렇게 조용하게 끝내기엔 그 마음들이 억울해서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이기적인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내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던 것처럼 내 첫사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음 아픈 일들이 가득하고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비극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내 첫사랑으로 인해 그런 아픔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람들이 첫사랑을 추억하며 얘기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은 사그라지고 미워했던 마음들은 이해로 채워져 가지만 행복감에 젖었던 마음들은 더욱 더 진하고 진하게 변해가기 때문이다. 내 첫사랑도 똑같다. 아팠다 너무 많이. 그렇지만 많이 아팠던 만큼 난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아픔과 사랑은 비례한다. 그래서 첫사랑은 아픈 만큼 아름답게 남겨진다.
렛세이어 노랑
첫, 사랑
연극은 지루했다. 말들은 낡았고, 몸들은 난해했다. 번뜩이는 몇몇 장면들이 있었으나 난 장면만으로 졸음을 쫓을 만큼 선량한 관객은 못 되었고, 불량한 관객답게 객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나긴 졸음에 스스로 민망해질 무렵 게슴스레 눈을 떴고, 무대 위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가 있었다.
다 늙어버린 눈 먼 여인을 연기하는 그녀가. 갸날픈 몸으로 세월을 토해내듯 절규하는 그녀가. 허공에 뻗친 두 팔, 공중을 응시하는 회색의 두 눈동자만으로 대극장 공간 전체를 압도하는 그녀가. 견고했던 내 시간과 공간을 손쉽게 부서뜨린 그녀가 있었다. 난 예감했다. 앞으로의 내 삶이 송두리째 그녀에게 포획되리라는 것을. 그녀에게 나를 각인시키기 위해 지나온 삶보다 더 오랜 삶을 내가 그녀에게 기꺼이 바치리라는 것을. 이 순간 이후부터 그녀가 나의 종교가 되리라는 것을.
예감이 그토록 선명할 수 있음을 그 전엔 결코 알지 못했다.
그날의 풍경들이 ‘첫사랑’이란 주제를 보는 순간 뇌리를 스쳤다. 의아했다. 왜 그녀가 나의 첫사랑인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내겐 열 달을 품어준 엄마가 있고, 전람회라는 그룹을 알게 해 준 아이가 있고, 교무실 문 앞에서 전전긍긍 서 있게 했던 선생님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왜 하필이면 그녀가 ‘첫사랑’이란 그 아스라하고도 살풋한 타이틀을 가져가야만 한단 말인가. 의문 속에 교묘히 감춰진 한 줌의 회한 때문에 덥석 그녀에게 그 이름을 안길 순 없다. 그런 식의 허투른 취급을 받기에 그 이름은 지나치게 어여쁘니까.
그녀가 내게 ‘사랑’이라 불릴 수 있다면 사랑이 세계에 대한 하나의 독법讀法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함께, 그녀를 통해, 그녀 안에서 읽어내는 세계는 나 홀로 읽어냈던 세계와 확연히 달랐으며, 그 다름은 때로는 기쁨, 때론 슬픔, 때론 고통과 행복이었다. 그녀가 내게 ‘처음’이라 불릴 수 있다면 그러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 같은 수많은 이질적 감정이 사랑이란 미명 하에 하나일 수 있다는 경이로운 사실 따위의, 사랑에 관한 숱한 현상들을 내게 깊이 새겨준 ‘첫’ 사람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녀 곁에 머물렀던 시간만큼의 시간을 그녀를 잊는 데 할애했다. 망각하려 애쓰는 짓만큼 망각을 불가하게 하는 행위가 없음을 알면서도 잊으려 애쓰는 일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기에 잊으려 애썼다. 그러다 어떤 사랑을 만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녀를 지칭하는 ‘첫’ 그리고 ‘사랑’ 사이에서 내가 후자에 너무 많은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그 단어의 유통기한이 끝나버렸는데도.
다시 마주선 사랑의 출발선에서 그녀를 생각한다. 그리고 내 안의 그녀에게 말한다. 당신은 이제 내게 첫‘사랑’이 아니라 ‘첫’ 사랑이라고. 지금의 '사랑'을 있게 해준, 소중하고 귀한 ‘첫’ 사랑이라고. 아프고 아팠지만, 시리고 시렸지만 고맙고 또 고맙다고. 지금을 있게 해줘서.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해줘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어서.
오늘에서야, 그녀와 이별을 한 것 같다.
렛세이어 초록
나를 위한 내 막차, 그리고 네 막차.
내 혼자 어딘가 다녀오리라면 언제나 아슬아슬 올라타는 막차. 실컷 들이킨 술에 목구멍 깊은 어딘가가 매끄러우니 무언가 쏟아질 것만 같은 그런 날.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탈 때는 조금씩 시간이 남지, 그 때마다 편의점에 들러 아주 매운 소스가 든 삼각김밥을 산다. 데우는 시간은 20초, 살짝 더운 듯 차가운 그 인스턴트, 방부제 투성이의 김밥을 입 안에 밀어넣으면 매운 소스는 목구멍 가득 자그만 생채기를 내어 매스꺼움을 물리친다. 입술은 얼얼해도 속은 시원하니 정신이 드는 까닭에 포기할 수 없는 습관. 여건이 되지 않는 날에는 진탕 쏟아내는 토사물이며 한 가닥 가냘픈 담뱃대로 속을 달랜다. 그렇게 올라타는 막차, 12시 20분의 커다란 마을버스.
혼자가 아닌 수 없는 밤의 나와 그녀. 너 데려다 주고 집에 갈래. 그럼 너 막차 놓치는데도? 경전철 막차 타면 돼. 그러니까, 너 데려다줄래. 조그만 마을버스, 울렁이는 맨 뒷자리. 그녀는 내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너를 데려다 줄게. 네가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들어갈게. 10시, 유명무실한 내 통금. 그래도 아슬아슬히라고 지키겠다며 실컷 놀아놓고 슬쩍 빠지는 내 태도. 버스 기다려줄까? 아냐. 너 늦잖아. 그 말이 진심은 아님을 앎에도 나는 통금이 있으니까, 하는 말을 핑계로 집에 쓱 들어가버리던 날들. 아니야 오늘은 기다려줄게, 기점 바로 옆에 살아 길어야 8분만 기다리면 버스가 올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견딜 외로움과 추위는 무시한 채 짧은 핑계를 대며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녀는 막차를 놓치면 걸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까지 나를 데려다 줬는데, 나는 핑계로 점철된 태도를 보였다.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그녀는 언제나 미안하다는 말을 할 거면 차라리 고맙다는 말을 해, 하고 말하고는 했다. 못기다려줘서 미안해, 가 아닌 내가 기다려 줄 수 없는 거 알면서도 데려다 줘서 고마워. 너무 늦어서 미안해, 가 아닌 늦게까지 기다려 줘서 고마워. 너를 고민에 빠지게 해서 미안해, 가 아닌 네가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말하라고, 그녀는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미안한 사람, 그리고 항상 고마워 하는 사람. 싸우지 않는 커플은 한 사람이 보살이거나 서로에게 기대하는 게 없거나 하는 둘 중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감히 단언하건대 투정만 부리는 나에 비하면 그녀는 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미안할 일을 잔뜩 끌어와놓고 연신 고맙다는 말로 버틴다.
내 막차는 나의 귀가를 위한 막차. 그리고 그녀의 막차 역시 나의 귀가를 위한 막차. 언제나 미안한 대신 고마운 그 막차를 내 막차로 삼는 게 내 유일한 고마움의 표현이라 믿는다.
렛세이어 파랑
여름밤
막차를 처음 타본 건 작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연극 연습을 빌미로 그녀와 늦은 밤까지 함께 있던 날이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 시기에는 통금을 어겨도 됐지만 그렇다고 외박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다른 방향의 지하철을 타는 바람에 타보게 됐다. 아무렴 막차면 어때. 집으로는 돌아갈 수 있으니 다행이야. 평소 사소한 일 하나에도 쉽게 불안해하는 내 자신과는 다르게 아주 여유로운 마음가짐이었다. 여름밤이면 한번쯤 짓궂은 요정들이 감각을 나태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그 여름밤은 반짝거렸다. 더 이상 거창한 말로 뭔가를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정말 반짝거리는 날이었다. 아주 새까만 색을 띤 밤이라서 조명이 더 반짝였고, 무명 예술가들이 그 터에 흘린 춤과 말과 땀이 반짝였고, 사실 내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반짝였다. 그날은 마침 연습기간 중 단 한 번 있던 외부 리허설 날이었고, 그녀가 참여했던 행사 또한 그날 마침 밤늦게까지 진행됐기 때문이다. 서로가 바쁜 주간이라서 얼굴 한 번 제대로 보기 힘들었는데 ‘마침’ 그날 둘의 시간이 맞아떨어졌다. 불행은 수많은 우연이 쌓여서 만들어진다지만 이런 행운도 만만찮게 많은 우연이 쌓여야 만들어지기 때문에 더욱 빛났게 느껴졌던 것일 테다. 하여튼 그래서 반짝거렸다. 지극히 평범한 여름밤의 습기도, 두꺼운 분장을 해서 답답한 내 피부도 모조리 가벼워질 만큼의 그런 마법이 벌어진 날이었다. 그날은 내리 그랬다. 그녀를 만나는 순간부터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까만 배경에 오로지 그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겨우겨우 잡은 막차에 올라탄 거라 집으로 돌아가는 건지 바로 가는 건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작정 집에 간다고 쓰여 있기만 하면 일단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맸다. 잘칵, 하고 안전벨트가 고정되자 의자를 뒷사람에게 피해가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뒤로 젖혔다. 그리곤 바로 고개를 돌려서 창문에 코를 박았다. 버스의 창문을 통해 보는 서울의 야경, 한강, 이상할 정도로 완벽하게 관람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두 눈은 반짝거리는 모든 것들을 담아내느라 바빴지만, 기분 좋은 피로감이 온몸을 감쌌다. 다음 날 또 다시 아침 8시부터 출근 지하철 속에 몸을 섞고, 하루 온종일을 연극 연습으로 진을 빼는 것이 예정되어있어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막차라는 단어가 가진 원래의 감성이 그 여름날을 만나서 녹진하게, 아주 녹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통금 시간인 11시를 꽤나 착실하게 지키는 편인 나는 확실히 막차를 탈일은 없다. 게다가 겨울이면 집에서 은둔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 가능성이 낮아진다. 애초에 겨울밤과 막차는 둘 다 우울한 정서여서 그런지 엮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기분 좋은 피로감이니, 녹진함이니 이런 걸 다 제치고 그냥 춥고, 서럽다. 감성이 폭발하는 날일 때야 한 번 시도해보고 싶지만 아직은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끼고 있다. 막차는 여름밤이 제격이야. 어쩌면 그 날 반짝거리는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서 멋대로 가져다가 붙인 이유일지라도, 나는 그 여름밤의 막차가 좋았다.
렛세이어 남색
성급함의 잔해
손아귀로 짓이겨봤자 남는 것은 잔해와 진물뿐이다. 모든 것에 힘을 빼고 천천히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숱 많은 머리카락은 햇빛 아래서 흔들릴 때마다 얇은 붉은 색으로 빛났다.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추켜올리는 손가락은 섬세했다. 남들보다 거의 두 배는 커 보이는 발에는 항상 남성용 컨버스화가 신겨져있었다. 나는 항상 엇갈리게 묶은 때 탄 신발 끈을 바라보고는 했었다. 가끔 가다가 대포같이 커다란 그 카메라가 향하는 곳이 있으면, 고개를 돌려 렌즈가 담고 있을 풍경을 함께 바라보기도 했다. 모든 일은 졸고 있는 여신을 바라보는 풀숲의 난쟁이처럼 은밀하고 조용했다.
그랬었는데, 처음에는 계속 그러려고 했었는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집 앞까지 쫓아갔어. 왜 그랬을까. 몸을 파묻은 의자는 한없이 푹신했다. 카페 2층 계단 앞의 의자는 매우 푹신했다. 그 때문에 사람이 자주 오가는 계단 앞의 자리여도 곧잘 그곳에 앉아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악마가 그러라고 시켰나보지. 내 혼잣말과 같은 한탄에도 친구는 무시하는 일 없이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보다 큰 잡지를 응시하고 있는 채였고, 입이 쓴 나는 쟁반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실로 당시의 충동은 악마가 속삭인 것에 틀림없었다. 나는 호프집 앞의 낡은 인형 뽑기 기계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지저분한 플라스틱 창 너머로 보이는 상품들은 모두 하잘것없는 것들 같았다. 총 모양 라이터와 양인지 소인지 모르겠는 모양의 인형 따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멍에 500원짜리 동전을 밀어 넣고 싶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호주머니 속의 짤랑거리는 동전이 몇 개정도인지를 멍청하게 계산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입에서는 닭 비린내와, 밀가루 튀김 냄새와 역한 알코올향이 섞여 마녀의 냄비를 연상케 하였다. 박하 향으로라도 입가심을 해야겠다 싶어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의 술자리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사실 지금 집으로 가버려도 될 것 같았다. 술자리도 거의 끝나가고, 애초에 왜 모였는지 조차 기억해내기 힘들 정도로 모두 취한상태였다. 그래도 왠지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은 돌아가 봤자 낡은 인형만 껴안고 잠들 내가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내 공기는 닭 냄새와 술 냄새와 담배냄새와 낡은 인형 뽑기 기계로 차 있었다. 그리고 팅커벨이 내 공기를 에둘러 빙 돌아 지나갔다. 술기운에 그것은 팅커벨처럼 보였다. 그것은 민트 색 치맛자락이었다. 민트 색 긴 치맛자락이 어두운 밤거리를 배경으로 야하게 흔들리며 스쳐지나갔다. 치맛자락 아래로 보인 낡은 남성용 캔버스화를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담배를 인형 뽑기 기계에 아무렇게나 갖다 눌러 껐다.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 급하게 가방을 챙겨 나왔다. 팅커벨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있었다. 어둠 틈새로 민트 색 빛깔만 언뜻 비치었다.
의외로 내가 쫓아온 것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길거리는 차 소리로 시끄러우면서도, 또한 한없이 적막했다. 나는 그 적막이 싫어 많은 것을 물었고, 많은 것을 떠들었다. 많은 물음에 많은 대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낮은 더웠지만 밤에는 찬 기운이 가득했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몇 십분 가량 언덕길을 오르자니 밤도 여전히 여름이었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왜인지 내가 한발자국 정도 앞서 건너서, 나란히 걷던 것이 신호등을 건너고 나서는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길을 몰랐기에, 이내 다시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당장 정류장을 검색하면 막차를 탈 수 있을 시간이었다. 휴대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막대기에 아슬아슬하게 달린 아이스크림을 마저 핥아먹었다. 달았다.
드문드문 탁한 빛을 내는 가로등만이 길을 밝혀주던 빌라 촌을 지나서야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빌라 입구를 향에 몸을 돌리는 것을 보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5초 쯤 뒤에 나를 돌아보더니, 그 시간동안 들을 수 있었던 가장 맑은 목소리로, 나에게 집에는 어떻게 가게, 하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한숨과 함께 미련 없이 떨어지는 발걸음에, 그제야 민트 색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다리 아프니까 쉬다 갈래, 온 김에 구경하고 갈래, 토끼 키운다는 거 보고 싶어, 모든 말들이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찬 밤바람에 뿌리쳐 던져졌다. 그리고 막차가 끊겨서 집에 못가, 재워줘, 라는 남겨두었던 마지막 포격마저도 견고한 성벽에 부딪혀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러면, 모자 빌려줘. 그 말에 입술이 조금 달싹이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 그냥 몰라, 빌려줘. 나는 아이 같은 떼를 썼다. 돌아온 것은 건물 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민트 색 자락이었다. 사라졌음에 분명한데도, 나는 어둠 속에서 그 색이 계속 비치는 것 같아 한참을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찬바람에 몸이 일순 떨려와 다시 시계를 보았다. 막차는 이미 오래 전에 끊겨있었다. 둘이 함께 온 길을 다시금 떠올리며 혼자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는 때였다. 깊은 밤은 바람이 차가웠다. 술기운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홀로 남은 내 처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가 너무 빨리 쫓아가고 들이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남는 것은 잔해와 진물뿐이다. 이것은 필시 악마가 속삭인 충동임에 틀림없다.
렛세이어 보라
아픈 사랑의 덫
이제는 잊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워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그 사람의 소식이 궁금해진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여전히 애인이랑 잘 지내고 있는지.
그 사람을 만나기 이전에도 줄곧 아픈 사랑만 해왔다.
정말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애인이 있었다는ㅡ 남자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다.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었기에 다시는 애인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사실 내가 먼저 다가간 게 아니라 상대방 쪽에서 먼저 다가오는 바람에 뿌리치기 힘든 거였지만.
더 이상 슬픈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내 마음이, 어떤 사람 때문에 송두리째 흔들리고 말았다.
작년에 만났던 한 살 연하의 대학 후배, 그녀가 바로 내 첫사랑이었다. 여자로서 같은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줬고, 내 안에 돌돌 감겨져 있던 꽃봉오리를 활짝 피우게 하고,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나의 몸을 일으켜 햇살 아래 세워준 그녀가 정말 좋았다.
비록 그녀도 애인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옆에 없어도 옆에 있는 것 같고, 눈만 감으면 어김없이 떠오르고, 어디에 가서 무얼 하든지 항상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을 땐 가슴 속 무언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도 끈끈하던 우리 사이는 맞커밍아웃 이후 서먹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바이섹슈얼임을 내게 말했고 나도 바이섹슈얼임을 그녀에게 얘기했다. 외모에서부터 티가 났던 그녀가 이쪽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바이섹슈얼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엄청난 진실을 꺼낸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뒤 그녀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멍해졌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는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왜 갑자기 연락을 끊고 나를 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싫어져서 피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우리가 서로의 성향을 알게 된 이상 친구처럼 가깝게 지낼 수가 없다는 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힘겹게 정리하는 동안, 스스로를 자책했다. 왜 나는 또 애인이 있는 사람을 좋아했던 건지, 왜 그렇게 섣불리 커밍아웃을 해서 그녀를 당황하게 했었는지. 모든 게 내 잘못으로 느껴졌지만 가끔은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그녀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데, 그녀는 왜 내 마음을 모르는 걸까? 우리는 커밍아웃을 통해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없었던 걸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잊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 사람을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과연 그 사람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사람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상상도 안 해봤는데.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건 그 사람이 처음인데. 그것이 나쁜 사랑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해버렸다. 마치 덫에 발이 걸려 살이 썩어 들어가는 줄도 모르는 자그만 동물처럼,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고통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아아, 발에 걸린 덫이 아프다. 하지만 덫을 빼는 그 순간도 아프다. 그 어느 쪽도 내겐 고통일 뿐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영원히 눈을 감고 싶다. 사랑하는 그녀의 품에서......
렛세이어 분홍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
“이제 슬슬 뭐가 더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할머니께서 집을 나가시고 비어버린 싸늘한 방에 나와 내 동생의 옷을 억지로 집어넣어 만들어진 ‘드레스 룸’에서, 내 모습을 제대로 비춰준 적 없는 전신 거울 앞에 주저앉아 있자니 거울 반대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릎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고 있던 것을,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린다. 고개를 따라 올라간 시선에 거울을 사이에 두고 엄마의 시선이 부딪혔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엄마의 얼굴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굳어 있었다. 부딪혔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눈꺼풀을 닫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문 틈 새로 보이던 엄마의 얼굴은 사라져있었다. 그저 엄마의 목소리만이 남았을 뿐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분홍색으로 칠해진 입술을 손끝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또 뭐에 스트레스 받은 건지 잔뜩 일어난 헤르페스에 입술이 엉망이었다. 분홍색이 묻어난 검지를 엄지와 문지른다. 미끈거렸다.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분홍색 렌즈가 들어가 있는 눈이 뻑뻑해서 눈이 간질간질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마스카라가 칠해진 속눈썹이 펄럭인다. 섀도가 칠해진 눈두덩이 속눈썹의 그림자를 피해 반짝인다. 풀 메이크업, 무려 2시간을 넘게 힘을 쏟은 화장. 데구루루, 눈동자를 굴려 이제는 아무도 없는 거울 너머의 문 틈 사이를 바라본다. 나는 엄마께서 무슨 의미로 내게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학교는 겨울방학을 끝냈고, 바로 코앞에 봄방학을 두고 있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봄방학을 보내고 나면 나는 정말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엄마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은, 그거겠지, 아무래도. 이제 슬슬 나가 노는 건 그만두고 집에, 또는 도서실에 앉아 공부할 때가 아니냐고. 새벽에 일어나 샤워하고 화장품을 뒤적거리던 모습이 엄마의 두 눈동자에 곱게 비춰졌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꼴 시렸겠지. 보기 싫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모처럼의 주말, 다른 아이들은 도서관에 앉아 문제집 속 문제 하나라도 더 들여다보고 있을 텐데, ‘사랑스러운 딸’은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주저앉아 얼굴에 분칠이나 하고 있으니.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다른 학년들처럼, ‘재수나 해버리지, 뭐.’ 하는 마음도 먹을 수가 없다는 걸. 내 다음 학년부터는 완전히 교육과정이 바뀌어 버려서 수능의 내용도 상당 부분 바뀌게 되어버린다. 나는 건드리지도 않은 수학Ⅱ를 이미 내 바로 아래 학년들이 교과서를 들고 있었고, 이제는 완전히 가물가물해져 버린 한국사를 필수로 봐야한다. 내가 재수를 해버리면, 아마 무조건 망하리라.
그러니까 나는 결국, 더 이상 내가 건드릴 수 없는 막차를, 시간의 막차, 또는 기회의 막차, 시기의 막차를 타버린 셈이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열심히 두 눈을 돌려 외면하며 살아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는 도대체 몇 개의 열차를 스쳐 보냈는지. 의지가 약해서, 의욕이 없어서, 목표도 없고 근성도 없어서 플랫폼에 주저앉아 나를 기다려주기까지 했던 열차들을 멍하니 바라본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결국 나는 여기까지 와버렸다. 이게 마지막 열차야. 주위에서 계속해서 그리 일깨워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이게 마지막 열차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아마 지금 이 열차를 타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 언제가 되고 플랫폼에서 떠나지 못한 채로 남겨지겠지.
그러고 싶지 않아, 일어나야 한다. 이제 정신 차리고 열차를 타야할 때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자신을 향해 몇 번이고 되뇐다. 아득한 기분이다. 한 참을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던 두 다리는 일어서서 열차에 올라타는 것조차도 힘겨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 열린 문의 마지막 차량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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