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 부모모임)

 

※편집자 주: 본 글은 성소수자 부모모임 대화록 출간기념회 편지 낭독 시간에 낭독한, 어나더님이 자신의 부모님에게 쓴 편지의 전문입니다.

 

'[스케치] 성소수자 부모모임 대화록 출간기념회 - 성소수자 가족들의 자긍심 행진' 보러 가기

 

 

 

 

 

엄마, 아빠!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글로 전하는 건 되게 오랜만이다. 최근 3개월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보고 이렇게 오랜 시간 집에서 떨어져 지낸 적도 없었는데 말이지. 편지를 정말 오랜만에 쓰는 거라 무슨 말을 써야 할 지 몰랐는데 어차피 엄마, 아빠에게 당장 부칠 수 없는 편지인 만큼 그냥 평소 내가 하지 못했던 말들도 하고 싶고 그 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도 알려주고 싶어.

 

지난번 집에 갔을 때 엄마가 건강검진에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고 얘기해줬잖아. 돈이 많이 들까봐 병원도 못 가겠다고도 했었지. 그 이후에 진짜 나 혼자 많은 생각을 해봤어. 정말 심각한 거 아닐까, 만약 심각한 거면 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수능을 막 끝낸 우리 여동생은, 이제 곧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우리 막내는, 그리고 21년동안 당연히 엄마는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더라. 그냥 최근 몇 년 동안 있던 일들 있잖아. 엄마 아빠랑 엄청 싸운 것부터 시작해서 서로 나눴던 이야기들, 그리고 내가 커밍아웃 했을때  숨막혔던 순간까지. 속상했던 건 최근 3년 간 우리가 만든 좋은 추억이 거의 없다는 거야. 어디로 여행을 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잖아. 정말 걱정 되더라. 이러다 이 상태로 모든 게 다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난 엄마, 아빠의 기억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을까? 어렸을 때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가 클수록 실망만 늘어가는 맏아들로 기억되고 있을까? 아니면 이상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수능을 두 번이나 실패한 한심한 아들로 기억되고 있을까? 서로에게 좋은 추억이 적은 만큼,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되는 말을 많이 뱉은 만큼 지금 남아있는 서로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을 거야. 근데 엄마, 아빠. 평소에 날 배은망덕하다, 감사할 줄 모른다고 꾸짖었지만 이것만은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 우리가 서로 말다툼하느라 제대로 얘기할 기회는 없었지만 난 너무 잘 알아. 얼마나 엄마, 아빠가 날 위해 희생했고 노력했는지. 맏아들 잘 키워보겠다고 어렸을 때부터 영어 유치원도 보내주고 집이 점점 어려워져도 내가 다니는 학원 수는 점점 늘어갔다는 것도 알아.  당신들이 겪고 있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나에게 다그치면서까지 잘 해보라고 했던 것도 알아. 그래서 가끔 예전에 내가 어렸을 때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냐’ 며 대들었던 게 참 미안하고 후회돼.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는데도 말이야.

 

미안한 게 하나 더 있어. 예전에는 내가 커밍아웃을 하면 무조건 날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부모라고 치부했었지. 그래서 내가 의도치 않게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는 엄마 아빠를 나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어. 날 소유물 같이 여기고 본인들의 프레임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이야. 근데 나도 엄마 아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어.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만 이해를 바랐구나, 각자의 속도가 있는데 내가 너무 내 기준으로만 생각해서 재촉을 했구나, 그리고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나 혼자 실망감을 느끼고 나쁜 부모라고 욕했구나. 미안해. 진심으로. 요즘 집에 나와 혼자 살면서 더 많이 느끼는 거 같아. 좀 이렇게 지내다 보면 내가 엄마 아빠를 이해하는 것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서로 마주하고 화해하며 차분히 얘기를 할 날이 오지 않을까?

 

내가 엄마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은 나 혼자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거야. 있잖아, 엄마 아빠. 내가 지난 5월부터 부모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심지어 그 중 몇 번은 내가 사회도 봤어. 정말 다양한 배경의 부모님들께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서로 짠 것처럼 공통적인 게 하나 있더라. 바로 자녀들이 무엇을 하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어. 난 분명 엄마 아빠도 내가 행복해지길 바랄 거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난 요즘 혼자 아주 잘 살고 있어. 그것도 행복하고 윤택하게. 최근 1년 동안 금전적으로 거의 독립했지만 어찌 어찌 잘 버티고 있고 올해 초에는 행성인이라는 인권 단체에 들어가서 새로운 열정도 찾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부모모임에도 참여하게 됐어. 학교 들어가서는 퀴어 동아리라는 걸 가입했는데 내 인생에서 이렇게 가깝게 느끼는 친구들은 처음인 거 같아. 그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맛에 학교 잘 다니고 있어. 또 내가 아직 엄마 아빠한테는 말은 못 했지만 평생 이걸로 밥 벌어 먹고 싶다 할 정도로 정말 하고 싶은 게 확고하게 생겨서 그 꿈을 좇기 위해 준비도 차근차근 하고 있어. 결과가 좋게 나와서 당당하게 말하게 됐으면 좋겠다. 게다가 요즘엔 분수에 맞지 않게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하고 있어. 전에는 단 한 번도 내가 잘 살고 있다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내가 생각해도 또래 친구들보다도 더 잘 살고 있는 거 같아. 왜 그런 지 알아?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내가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방식으로 내 인생을 조금씩 꾸려나가고 있거든.

 

그러니까 엄마 아빠, 이제는 내 걱정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곧 스무 살이 될 우리 여동생, 아직도 핏덩어리 같은 우리 막내,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해. 엄마 아빠 본인들을 위해 남은 인생 살았으면 좋겠어. 더 이상 나 때문에 고민하지도 말고 속상해 하지도 말고. 나 봐봐. 이제 나도 내 앞가림은 해야 하지 않겠어? 엄마 아빠한테 내 행복이 중요한 만큼 나도 엄마 아빠의 행복이 중요해. 내가 아직은 이 편지를 부치지는 못하겠지만 가까운 미래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닿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어. 날 게이로 태어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같이 행복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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