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소수자와 노동

일하는 성소수자 모임 세 번째 시간 “전태일 평전을 읽는 밤”을 다녀와서

by 행성인 2016. 11. 15.

준태(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 노동권팀)   

 


지난 10월29일, 일하는 성소수자 모임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간 “전태일 평전을 읽는 밤”이 우리동네  나무그늘에서 개최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전태일 열사를 접한 것은 부모님과 함께 보게 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를 통해서였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나와 비슷한 나이에 하루에 15시간씩 피복공장에서 일을 했다는 것은 물론, 동료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노동 조합을 만들기 시작했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 중 하나인 분신을 택했다는 점 모두 마치 나와 동 떨어진 세계에 사는 듯한 인물 같았다. 그로부터 약 20년만에 읽은 전태일 평전은 나에게 ‘노동자로서의 나’,  ‘활동가로서의 나’,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나’ 등 나의 다양한 정체성과 내 삶의 모든 전반을 되돌아 보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행사에 대한 기대가 컸고, 행성인 성소수자 노동권팀에서 오랜 기간 공을 들인 행사인 만큼 쟁쟁한 게스트와 공연으로 나를 비롯한 많은 참석자들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공유할 수 있었던 뜻 깊은 자리였다. 그 날의 여운을 간직한 채 전태일 평전 및 행사에 대해 회상해보고자 한다.

 

 

노동자로서의 인식

 

 

 

 

미니강연 중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진숙님은 절대적으로 남성 노동자가 많은 한진 중공업에서 용접공으로 일했던 기억을 회상했다. 끊임없는 여성 비하적인 발언에 노출되면서 노동자란, 여성 얘기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오줌발 시합이나 하는 그런 남성들을 가리키는, 자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 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야학에 등록할 때 직업란에 노동자가 아닌 용접자라고 썼다고 한다. 나 또한 역시 그랬다. 약 10년 동안의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내가 노동자라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 프로젝트를 하나 끝내고 회사에서 좋은 피드백을 받고 뭔가 뿌듯함을 느낄 때면 스스로 전문직이라고 생각했고, 일이 없고 잘 안 풀릴 때면 수입이 불안정한 프리랜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김진숙 위원님의 마지막 말은 내 마음에 큰 잔향을 불러일으키며 노동이 가지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라는 걸 인식한 후, 노동자는 단순히 생산만 하는 사람이 아닌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까지 세상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힘 냅시다.”

 

 

연대와 존재감

 

 

그 다음은 김진숙 위원님, 알바노조 위원장 박정훈님, 민주노총 활동가 곽이경님, 전 청계 피복 노동자 윤가브리엘님, 그리고 행성인 성소수자 노동권팀 재윤님을 모시고 패널 토크가 열렸다. 각 패널들은 소개를 마치고 행성인 성소수자 노동권팀에서 준비한 질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첫 번째 패널토크의 주인공인 김진숙님에게 2차 희망버스 때 성소수자를 직접 호명하게 된 계기에 대한 질문을 드리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존재하는 사람들은 불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다양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해왔던 성소수자들은 존재감이 없는 비가시적인 존재였던 경우가 많이 있었다. 가장 절박한 순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퀴어버스를 통해 손을 내민 성소수자들의 연대와 김진숙님이 호명을 하면서 드러난 존재감은 많은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 패널 곽이경님 역시 연대와 존재감의 연결고리에 대해 얘기했다. 2~3대의 퀴어버스를 꽉 메운 성소수자들이 여러 번의 연대를 통해 그 힘든 순간들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호명을 했더라도 큰 의미가 있었을까? 라는 곽이경님의 자문은 꾸준한 연대의 힘과 그 중요성을 참석자들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또한 민주노총에서 성소수자로서 일하면서 느끼는 고충 중 하나가 성소수자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었는데, 이번 퀴어문화축제 때 민주노총 사상 처음 공식적으로 성소수자 참가단을 꾸리고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작은 가능성을 보았다고 말했다.  곽이경님의 패널토크를 들으면서 나 역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비록 성소수자가 비가시적인 존재이고 사회 전반에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해있지만, 많은 성소수자들이 힘을 합쳐 다른 이들과 연대한다면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모이고 모여서 큰 변화로 나타나지 않을까?

 

그 뒤로 재윤님이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재윤님은 자신의 일상이 평온해도 어느 누군가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있기에 그들에게 무언가 힘을 실어주는 방법으로써 연대를 하고 있다. 연대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 기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행성인 성소수자 노동권팀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연대 및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활동을 하면서 인식하게 된 노동자로서의 자신, 그리고 다른 성소수자 노동자와 함께 하면서 우리가 직장 내에서 받는 취급 및 대우에 대한 개선을 위해 함께 고민해보자며 말을 마무리 했다.

 

알바노조 위원장 박정훈님도 연대 및 단결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고 성소수자 인권 강연도 진행하는 이유는 바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 되지 않으면, 노동자의 단결 역시 힘들다고 말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같이 연대해야 노동운동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서 그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알바노조에 모여 사회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했다.

 

 

열악한 근로환경 속에서 피어난 전태일 정신

 

 

미니강연에서 김진숙님은 전태일 열사가 처해있던 것과 같은 근로환경에서 일했던 경험을 공유했다. 만2천명 규모의 큰 공장을 가득 매운 13살, 14살 소녀들, 15분 동안의 점심시간, 겨우 배를 채울 만한 식사, 그나마도 저녁에는 남은 밥과 반찬, 눈치를 보며 가는 화장실과 쉴 틈 없이 다그치는 조장들, 각성제를 먹고 버티는 일주일간의 쉬지 않고 일하는 곱빼기 철야 등. 그것은 전 청계 피복 노동자였던 윤 가브리엘님의 경험과도 비슷했다. 월세 조차 낼 수 없는 적은 월급을 주면서 그 돈 마저 적금을 들어준다는 이유로 경제적 착취를 하는 고용주들, 노동조합의 근로시간 준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유리창을 막아놓고 문을 걸어 잠그고 밤 늦게까지 일을 시키는 고용주.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로 열악한 환경은, 전태일 열사의 수많은 노력과 분신에도 불구하고10년 후 지금에 와서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자신의 몸 조차 온전히 건사하기 힘든 열악한 근로 환경에서 전태일 열사를 움직이게 했던 힘은 무엇일까? 나는 그 힘은 솔직함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공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에 전태일은 직접 자신의 월급에서 일부를 떼어 빵을 사주었고 힘이 들어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공들의 마음을 헤아려 일을 나눠서 분담했다. 전태일은 기존에 정립되어 있는 질서를 핑계 삼아 근로환경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부당함을 안쓰러운 감정 그 자체로 남겨두지 않았다. 그리고 기존 질서에 저항하며 문제의 본질에 솔직하게 접근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 노동조합의 형성이란 대안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고용주의 방해와 노동자들의 인식 부재 등 수많은 걸림돌이 있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노동자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그는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자신의 몸을 한 치에 망설임 없이 불 속에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크게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일하는 성소수자 모임 세 번째 시간 “전태일 평전을 읽는 밤”을 통해 나는 직장인, 프리랜서 등이 아닌 노동자로서 거듭난 것 같다. 노동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동료 노동자와 함께 세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노동자 말이다. 이번 모임을 통해 다시 한 번 전태일 평전을 읽는 것을 통해 참석자들 마음 저 한 구석에 있던 전태일 정신의 불씨가 지펴졌을 지도 모른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고 그 마음에 솔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일하는 성소수자 모임이 다음 년에, 내 후년에도 더욱 알찬 구성으로 참석자들을 맞이하길 바라면서 후기를 끝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