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10월 29일 늦은 오후, 저는 ‘전태일 평전을 읽는 밤’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동네 나무그늘’에 갔습니다. 평전에서 발췌된 좋은 구절들이 벽에 주렁주렁 걸려 있었고, 숙제를 안 한 저는 빠르게 글자들을 눈에 담았습니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맘을 울리는 구절들이 꽤 많았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저는 노동자-남성 집단에 대한 선입견(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다)을 가지고 있었고, 언론에서 과장되는 그들의 폭력적인 이미지에 거리감을 느껴오곤 했기 때문입니다. 전 그들이 여린(?) 게이에겐 너무 거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발췌된 구절들을 읽는 순간만큼은 그 거리감이 일시에 좁혀졌습니다. “투쟁하는 존재들은 비슷한 구석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덕분에 행사에 대한 충분한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첫 번째 순서로 김진숙(민주노총 지도위원.)님이 ‘전태일 정신과 노동자 운동’을 주제로 미니강연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강연이 전체 프로그램 중 통틀어서 가장 좋았습니다. 그 경험담, 목격담들이 얼마나 생생하던지요. 실제 노동자들이 겪었던 산재사례들이 너무 참담해서 얌전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싸구려 각성제를 (그것도 제 돈 주고 사서) 복용해가며 일주일 내내 철야근무를 했고, 이런 수면 부족 환경으로 인해 몸에 미싱 바늘이 박히거나 불이 나도 자각하지 못한 채 죽거나 다쳤습니다. 거기다 많은 노동자들이 불법 고용된 청소년과 어린이였으며, 따라서 법의 보호는 더욱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노동운동은 그 자체로 생존권 투쟁인 것을 통감하게 됐습니다.  


 

 

 

후 터울(친구사이 활동가)님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주제에 맞는 노랫말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새벽 흐린 광장에 그대 홀로 서있네  오십 평생 일 해온 지난 시절의 기억
한 번도 놓지 않은 호각을 입에 물고  다시 한 번 부르네 새벽어둠을 넘어

숨 막히는 작업장 아무 대답도 없네  싸움은 지쳐가고 분노마저 사라져
무너진 현장 위로 조여 오는 칼날뿐  닫힌 나의 가슴은 숨을 쉴 수가 없네

길게 우는 호각 소리 깊은 잠을 깨우네  침묵하는 공장 어디에도 깊은 잠을 깨우네

검게 물든 깃발은 내 가슴을 흔드네  천둥 같던 그대의 호각 소리 들리네
세상은 그대론데 주저할게 무언가  그대 호각을 이제 내가 입에 물고서

그대 길게 불어라 깊은 잠을 깨워라  하늘에서 들리네 투쟁의 호각 소리
새벽 흐린 광장에 그대 홀로 서있네  오십 평생 일 해온 지난 시절의 기억

 

호각 - 조성일 작사/작곡


이 노래는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모곡입니다. 한데 이는 전태일 열사에게도 닿아있는 듯합니다. “대학생 친구를 갖고 싶었다.”던 전태일 열사의 말은, 고독한 투쟁 속에서 손잡아 줄 이를 소망하는 마음이었겠지요. “새벽 흐린 광장에 그대 홀로 서있네.”, “숨 막히는 작업장 아무 대답도 없네.”라는 노래 가사가 그의 절절한 외로움을 달래주는 거 같았습니다.


 

 

터울님의 노래가 끝난 후, 두 번째 순서가 진행됐습니다. 앞서 강연 해주신 김진숙님, 박정훈(알바노조 위원장)님, 곽이경(민주노총 활동가)님, 윤가브리엘(전 청계 피복 노동자), 재윤(행성인 활동가)님 등등 노동운동과 관련된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윤가브리엘님, 재윤님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윤가브리엘님의 “내 주변엔 여공들이 많았는데, 나는 집을 나와서 내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을 시작했지만 그들은 오빠나 남동생 학비를 대기 위해서 일을 하더라.”라는 말은 당시 여공들의 가슴 아픈 현실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여공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전태일 열사의 마음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재윤님은 노동운동에 성소수자로서 많은 참여를 하시고, 따라서 많은 연대의 경험을 갖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여태까지 공동 투쟁의 현장에서조차 ‘성소수자’라는 존재는 가려지고 드러나지 않았었는데, 처음으로 ‘성소수자’라는 네 글자로 정확히 호명된 퀴어들이 펑펑 울었다는 가슴 벅찬 이야기나, (더 자세한 이야기는 웹진 http://lgbtpride.tistory.com/356를 참조해주세요!) 재윤님이 연대했던 노동자 분이 이번엔 2014 서울시청 점거 농성때 연대하러 와주셨단 이야기를 듣고, (조금 장난스런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진짜, 저 맛에 연대하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인류에 나날이 실망해가는 요즘, “그래도 내 손잡아 줄 이들도 사람”이라는 작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음, 어쩌면 절망한 누군가는 ‘연대’, ‘인간애’, ‘정’ 등 은 미화됐고 혹은 촌스런 감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마 그 절망에도 다시 불씨를 살리는 것도 연대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학생 친구를 갖고 싶었던, 홀로였던 전태일, 다시금 혼자가 될지도 모르는 이 시대의 전태일들을 위해서 저도 연대에 힘 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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