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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활동 후기

행성인 교육 <성소수자 억압의 원인은 무엇일까> 스케치

by 행성인 2017. 11. 10.


조나단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지난 10월 13일 인권재단 사람에서 행성인 회원 교육 <성소수자 억압의 원인은 무엇일까> 가 열렸다. 이번 교육은 <성소수자, 세상을 넘보다> 3부작 교육의 첫 번째 강연으로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님이 강사로 참여했다. 금요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50명이 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이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강연 제목이 <성소수자 억압의 원인은 무엇일까> 인 만큼 ‘무엇이 성소수자 억압인가?’,  ‘성소수자라고 할 때 소수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으로 강연이 시작되었다. 소수자를 이야기할 때 사회적으로 소수자라는 말을 많이 하곤 한다. 그러나 자본가처럼 소수라는 것이 반드시 약자인 위치에 처하지는 않기에, 주류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나영 님은 정의했다. 주류라는 것은 사회적 규범에 덜 어긋난 이를 의미하기에, 성소수자는 ‘성’이라는 부분에 대해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질서와 규범에 부응하지 않는 사람이다. 주류 질서에서 벗어나기에 드러나지 않도록 성소수자를 주류 질서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만들어, 드러나지 않게 누르는 것을 억압이라고 설명했다.


성소수자가 억압을 당한다는 것은 성적인 주류 질서가 있기 때문이라면, 이때의 주류 질서는 어떤 장치들로 인해 작동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나영님은 가족, 종교, 교육, 미디어, 정치 등의 예를 들었다. 이러한 장치들은 규범에 벗어나는 자들을 혐오와 소외, 배제, 편견, 낙인, 차별과 폭력 등을 통해 통제한다. 때문에 비주류의 사람들은 자기 표현을 할 때나 사회적 관계, 경제, 생활 전반에 걸쳐 이러한 통제의 영향을 받게 되고 관계가 단절되거나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박탈, 배제 당하는 상황에 처해진다.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성소수자에게 억압이 가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성에 있어서의 규범을 왜 지키고자 할까? 그것은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와 닿아있기 때문이라고 나영님은 설명한다. 규범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젠더 역할이나 정상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예컨데 일부일처제 라는 것 까지도) 등이 새로운 노동력을 재생산 하고 그 사람을 사회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내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모두가 물적 생활의 일부가 되는 이유는 이것이 성적 노동 분업에 복무하는 방식 때문만이 아니라, 규범적 젠더가 규범적 가족의 재생산에도 복무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즉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장을 변혁시키기 위한 투쟁이 정치 경제의 핵심이 되는데, 그 이유는 이 투쟁들이 무급 착취 노동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사회적 재생산과 재화의 재생산 양자를 포함하기 위하여 경제적인 영역 자체를 확장하지 않고서는 이 투쟁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 주디스 버틀러 <단지 문화적인>

 

이는 누가 일을 하기에 적합한 인간이며 누가 그런 공적 역할을 할 수 있고, 그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가져야 하며,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자기 표현을 하면서 어떤 성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 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특정 시기까지 남성은 이성을 가진 시민으로, 반대로 여성은 동물, 자연에 닿아있는 존재로 상정되며 여성은 교육, 정치에 있어서 거리를 두며 가정에서 재생산을 담당하는 역할로 한정을 지어왔다. 물론 현재까지도 그 영향은 남아있다.


나영님은 이 억압 체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남성 가부장을 중심으로 여성과 아이, 노인 등 다른 가족 구성원이 남성 가부장의 경제활동에 의존하도록 만들어온 지배 구조의 역사,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사유재산이 부계를 통해 상속되도록 만들어온 것이 가부장제의 역사라고 설명한다. 이는 곧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 되고, 생산-노동과 재생산 – 노동의 위계와도 닿아있고, 가사/돌봄/출산/ 양육 등의 노동을 비 가치화 하며 이를 여성의 영역으로 둠으로써 상품 생산 임금 노동 외부에서 잉여 가치를 최대화 하는 구조다.  왜냐하면 임금을 줄 필요가 없기에 최적화되어 체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유지되려면, 가족, 친족 체계를 통해 성별에 따른 성역할과 섹슈얼리티를 규범화하고 이성애 일부일처제 체계를 강화면서 섹슈얼리티를 통제해야 한다. 즉 인간 (노동력) (재)생산의 유지, 통제, 관리를 위해 섹슈얼리티의 억압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는 다양한 장치를 통해 강화된다. 나영님은 종교 쪽을 구체적인 예와 함께 살펴보았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후, 경제 공황 등 온갖 사회적 혼란을 겪던 시기의 미국의 보수 기독교 계열은 성 해방에 반대를 하고 동성애자들이 공산주의와 결합해서 사회 혼란을 일으킨다고 선동했다. 또한 남녀 평등 반대, 낙태 반대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교회를 조직하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디어를 조직하여 기금을 모았다. 그 기금으로 공화당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엄청나게 지원을 했다. 그래서 당선된 것이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부자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신은 무조건 남자로 설정되어있다. 이 신의 지침에 따라 세계가 움직여져야 하는데, 남성인 신의 지침에 따라 그 도구인 국가, 그리고 개인의 영역에서 그것을 실현하는 모두가 남성이다. 남성적 근간을 가진 형태로 상상이 된다. 이것을 보조하는 역할이자 보존되도록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여성으로 상정된다. 그렇기에 이 구조에 순종 되도록 길들여진다. 또한 신실하고 근면한 아이들을 키워내는 것까지 여성의 역할이다. 그렇기에 어떤 아이들이 자라고 태어나는 지에 대한 비난과 낙인이 여성에게 덧씌워지기도 하고 말이다.


여기서 남성과 여성이 맡은 바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혼란이 일어난다고 보는데, 여기에 어긋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여성인데 교육을 받고자 하고 남성의 능력을 보이거나 여성이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들 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여자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을 했듯, 여성을 동물이나 자연에 닿아있는 존재로 만든, 여성을 주체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대상으로 만들어온 섹슈얼리티 억압 체계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섹슈얼리티 억압 체계가 그들을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으로 만들고 이성애적으로 만들듯, 동시에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의 규칙과 관계도 동일한 체계의 산물임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 말이다.


체제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이 보기에 이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하는 사람들을 혼돈시키고 타락시키는 존재가 페미니즘을 주장하고 동성애 권리를 주장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사람들이 혐오의 대상자가 된다. 이 혐오는 낯설고 무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기에 즉각적으로 이어지는 반응일 수도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심해의 동물을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무섭게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넘어서서 이 존재가 그런 혐오해야 할 존재라는 정보를 심어주는 장치가 있다고 나영님은 설명한다. 앞서 이야기한 학교, 미디어, 가족, 사회의 장치들이다. 우리가 이 존재에 대해 다 알기 전에 ‘이 존재는 이런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특정 관점이 들어간 정보를 심고, 사회 구성원이 그런 존재가 되지 않도록 경계심을 심는 방식으로 말이다. 성소수자들 외에도 홈리스, 가난한 사람, 빨갱이들 등과 같은 낙인 찍을 사람을 계속 상정하여 혐오하도록 만든다. 자신이 그렇게 된다는 것은 그런 존재로 떨어지거나, 오염이 되는 것으로 느껴지도록 만들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런 일탈자들을 세금을 축내는 사람, 사회 부적응자, 반사회 반체제 저항세력으로 여기도록 하여 배제한다. 그런 식으로 이 지침과 토대를 잘 유지해야 부강해지고, 종교적 사명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한국 보수 기독교회도 유사한 전략과 주장을 택하고 있다고 나영님은 설명한다. 교리적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인 이러한 주장을 하는 까닭은 교회 위기에 대응하고 개신교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동성애 반대, 성윤리 단속이라는 고리를 선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안보를 앞세워 ‘빨갱이’ 라는 적을 만들어 사람들을 결집하고자 했다면, 점점 그것이 쉽지 않게 되자 성적 윤리를 강하게 앞세우고자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적인 체계의 무서움은 이러한 윤리들을 사람들이 강하게 내면화 시키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는 앞서 이야기한 시기의 미국 기독교 우파 여성의 시다. 이런 시가 나올 만큼 구조가 개인에게 부여한 역할이 개인에게 내면화 됨을 볼 수 있었다.


여성이기를 원하는 여성이 너를 위해 이 빵을 만들었다네. 그들은 일년 내내 주부이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부라는 것은 명예라네. 우리는 이 권리를 붙들기를 원하지 하지만 ERA는 우리의 선택을 빼앗아가리. 법은 남성과 여성이 같다고 하네. 우리는 남성과 같을 수 없네. 우리는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다네. 우리는 삶 속에서 그렇게 성취할 장소를 갖는다네. 그렇게 머무는데 만족하여 네 빵을 즐기고 또한 그것을 음미하라. 

양성 평등 수정 조항 (ERA)에 반대했던 기독교 우파 여성의 시


또한 보수들의 전략도 진화한다고 나영님은 설명했다. 기존에 진보라고 생각한 영역들도 그럴 필요가 생기는 시대 흐름에 따라 체제 유지자들이 개입 한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법안을 제출할 때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그런 예다. 예를 들면 뉴욕시의 한 교육 위원회 모임에서 소수 민족과 인종 관련한 안건을 통과시키면서 레즈비언을 희생시켰다. 현재 미국에서 동성결혼은 법제화가 되었는데, 이제는 이슬람권 사람들을 낙인 찍는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을 인정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논리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며 대립 구도를 만든다. 그 사이에서 동성애자를 어떤 존재로 관점화 하는지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달라진다.


이는 정체성 정치나 권리를 경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운동의 한계를 볼 수 있게 한다. 체제를 이해하고 구조와 시스템을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 집단들이 경합을 통해 사회적인 제도 내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으로 사고할 때, 누군가를 필연적으로 배제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소수자 억압이 그저 성소수자를 문란하고 억압받아야 할 존재로 본다거나 사랑할 권리가 있는데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넘어, 이 억압이 사회를 어떤 식으로 통제하기 위한 억압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나영님은 말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며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정리하며 말이다.


긴 강연이 끝나고 여러 흥미로운 질문들이 나왔다.

첫번째 질문은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 사회가 이윤을 더 창출하기 위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설명을 했는데, 그 이윤 추구로 여유가 생겨 성적으로 자유도 늘어나고 한계도 있지만 여권이 신장되도록 변화한 부분이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런 변화들은 일정 부분이나마 성소수자 억압을 해소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나영님은 큰 관점에서 이야기하느라, 구조와 그 구조에 억압당하는 사람들로 양분되는 것처럼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고정된 형태로만 돌아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보수가 옛날의 논리 구조 그대로 있지 않고 진보도 취하는 식으로 구조를 유지하는 것처럼, 억압을 받는 사람들도 순종적으로 내면화 하고, 그렇게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서 사회적 변화들이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아직 차별금지법이 생기지 않았지만 어떤 기업에서는 그런 부분이 내규에 있는 것이나 가족 계획 정책이 국가에 의한 성 통제지만 그 덕분에 여성의 사회 진출이 더 가능해졌던 것처럼 어떨 때는 정치나 자본이 먼저 움직여서 시민 운동이 커지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기에 성소수자들도 단일한 정체성 정치 운동은 하기 어렵게 될 거라고 이야기 했는데, 구조에 기여하는 성소수자가 나올 수도 있고, 변화 속에서도 배제되어 뒤로 남게 되는 성소수자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변화는 단선적이지 않고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나영님은 답했다.

 

또다른 질문은, 나영님이 거시적인 시각에서 구조적으로 성소수수자 억압을 설명했는데, 너무 멀게 느껴지기에 그런 측면 외에 다른 측면으로 억압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냐는 질문이었다. 예를 들어 실존적인 측면에서 자기 혐오나 자기 불안을 설명해볼 수는 없겠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나영님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것에서 고민을 시작하더라도 결국에는 구조적인 문제에 닿아있더라는 답을 했다. 예를 들어 나영님이 어머니께 여성스럽게 다니라고 잔소리를 들을 때 위축되기도 하는데, 어머니께 인정받고 싶은데 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어려울까? 어머니는 왜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자신은 왜 그런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지, 왜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고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는지 고민하다 보니 도달하게 된 결론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구조가 나 자신의 일상과 닿아있지 않은 것 같지만, 너무나 밀접하게 닿아있기에 일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구조를 인식해야 한다고 나영님은 답했다. 


자신의 일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런 구조를 인식을 해야 내가 다른 사람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나영님은 말했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처럼 어떤 매뉴얼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게 가능 하려면 이 구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우리 모두가 토론할 때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요즘 각자의 권리가 경합되어야 하는 것으로 한정 짓는 범위의 페미니즘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구조를 인식하며 만날 때, 나와 네가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가 어떤 구조를 바꿔낼 수 있는 사람임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연과 질의 응답 시간이 끝났다. 끝까지 많은 사람들이 집중하며 강연에 참여했다. 연대를 하는 것이 전략의 일종이 아니라, 같은 구조적 억압 하에 연결되어 있고 함께 싸우지 않고서는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임을 새삼 느껴 더욱 의미 있는 강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