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소모임 전국퀴어모여라/ 웹진기획팀)
“원래 역경과 고난이 있어야 나중에 웃으면서 이야기할 거리도 있고 그렇지 않아?” 라는 말 때문에 집회 신고가 잘 되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장 행사 장소를 옮기지 않으면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폭탄을 퍼부을 것 같은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문화전당의 담당자를 소환해 일부러 욕설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웃으면서 이야기 한다고? 이야기는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지만, 웃는 건 나중에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퀴어라이브 in 광주! 정말 라이브로 액션영화를 찍었다
광주에서 태어났다. 다른 친구들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떠나고 싶었지만 대학까지 광주에서 마친 후에야 서울로 갈 수 있었다. 늘 한적하고,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들이 피는 광주에서 나는 늘 의문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미간을 찡그리며 다녔다. 이 아름다운 고장에서는 내가 왜 같은 반의 여자애만 보면 가슴이 뛰는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것보다 철학과 언니와 함께 스터디를 하는 것이 더 좋은 지에 대해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광주는 의문과 석연치않음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그 도시에 다시 돌아왔냐고? 글쎄, 전국퀴어모여라를 시작하면서 다시 돌아올 용기가 생겼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의 홈그라운드에서 퀴어라이브가 열린다고 하니 주님께서 서울퀴어문화축제 때도 못가고 일을 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런 기회를 주신게 아닐까 싶었다.
행사 당일 운영위원들은 아침 10시에 모여서 짐을 싣고 행사장으로 가기로 했었다. 아침 10시에 집합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온 몸에 핫팩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활동가들이었다.
그때까지, 우리의 걱정은 날씨가 추울텐데 감기 걸리면 어쩌나 뿐이었다. 그것 말고 우리의 모든 것은 완벽했다. 행사장의 집회 신고도 완벽하게 마쳤고, (물론 문화전당 쪽의 담당자와는 연락이 닿지 못했지만 말이다) 무대 차량과 LED차량, 부스와 테이블, 현수막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행사 담당자도 이보다는 더 완벽하게 준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자신만만함은 10시 45분 즈음, 한통의 전화로 박살나 버렸다. 그러니까, 문화전당 쪽에서 이미 우리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쓰기로 한 다른 단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사생팬 기독교 세력이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미친 남자아이처럼 구는건가 싶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문화전당 담당자가 헤어진 전애인처럼 우리의 전화를 피한 것이었다. 늘 그렇듯 전 애인들은 그 모양이었다.
이제 전애인같은 일은 스탑!
우리는 부랴부랴 행사장으로 달려가서 행사 진행 순서를 바꿔서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원래 1시에 사전행사를 시작하고, 2시 반부터 본행사를 시작하려던 우리의 계획은 가뿐히 사전행사를 스킵하고 12시 45분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하하 웃으면서 “참 별일이 다 있네.” 하며 넘어갔다. 전애인처럼 굴던 문화전당 담당자를 조금 미워하면서 말이다.
서울에서 온다는 퀴어버스는 그때 즈음, 논산을 지나고 있었다. 그 버스에는 부스를 차릴 생각이 없던 나에게 호통을 치면서 “내가 강림하니 부스를 신청해 놓으라” 고 하던 남웅 행성인 운영위원장이 타고 있었다. 세상에 즐거운 역경은 없는 법이었다.
그때 즈음,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뛰어오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당장 차를 못 빼!” 여기에서 차라는 것은 주차장에 불법 주차돼 있는 모닝이나 그랜저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거대한 무대 차량을 말하는 거였다. 이곳은 사유지라서 함부로 무대를 설치 할 수 없다나 뭐라나, 그때 담배를 피우러 가 있던 때여서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대략 그랬다. 겨우겨우 무대를 돌려서 진행하는 걸로 합의를 마쳤을 때는 모두가 진이 빠진 상태였다. 우리들의 얼굴에는 이미 웃음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퀴어라이브 in 광주가 시작되었다. 아, 맞다. 그날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서 낙엽이 다 떨어졌다고 말했나? 우리는 광주 시내에서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만 팜플렛을 나눠주면 되는데, 바람은 온 지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퀴어라이브를 소개할 기세로 미친 듯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광주가 아니라 제주도에 온 줄 착각하고 제주도 사투리를 내뱉을 뻔 했다.
바람에 날아다니는 스티커와 팜플렛들을 붙잡으러 뛰어다닐 때 즈음, 서울에서 퀴어버스가 도착했다. 역시나 우리 남웅 위원장님은 오자마자 “부스가 왜 이 모양이냐” 며 호통을 치길래 듣기 싫어서 도망을 쳤다.
눈물이 났던 시나페의 공연
그리고 오후 2시 반, 드디어 우리의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물론 우리만이 아니었다. 퍼레이드 경로를 따라서 우리의 사생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현수막은 너무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말이라서 깜짝 놀랐다. “동성애는 유전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그날, 나는 올해 초였나 작년 말에 제작한 전국퀴어모여라 깃발을 실물로 처음 보았다. 광주 시내를 한바퀴 도는 짧은 행진 코스였지만 그 안에는 광주에서 살았던 모든 삶이 있었다. 중학교때 처음 크로와상이라는 신문물을 접했던 옛 크라운베이커리 건물을 지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눈으로는 책을 읽는 척 하면서 누가 들어오나 쳐다보던 첫 데이트 장소를 지나서, 손에 땀이 나서 축축할텐데 걱정하며 짝궁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던 시내 거리를 전국퀴어모여라 깃발을 들고 걸었다. 모든 의문이 가득했던 그곳에서 수수께끼를 겨우 푼 지금의 내가 다시 거닐고 있었다. 그것도 광주의 모든 퀴어들과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나 뿐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행진을 마치고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광주 퀴퍼 할만 하겠는데?”
(참! 아직 퀴어라이브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회계 정산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생한 퀴어라이브 운영자들에게 힘이 되고 싶으시다면 후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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