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혹은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그런 특성 말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가지는 이미지라고나 할까?
나에게도 그런 것들이 많지만 중요한 하나는 내가 게이라는 것이다. 내가 게이라는 것을 인정했을 때, 나에게 “나는 게이야!”라고 최종적으로 땅땅땅! 선고했을 때, 매우 기뻤다. 그것은 아주 묘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원래는 기쁜 일이 아니어야 했다. 나는 이성적으로 그런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슬퍼할 감정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기뻤다. 웃음이 났다. 이 감정은 뭐지? 미심쩍었다. 하지만 “넌 죄책감을 가져야 해!” 라고 말하는 내 안의 사람을 비웃으며 거리낌 없이 웃었다.
내가 가졌던 게이의 이미지는 돌연변이였다.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 때문에 커졌다고 하는 지렁이, 메기들처럼 게이들도, 나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도 저 커다랗고 징그러운 지렁이나 메기와 별로 다르지 않은 존재인가? 내가 그런 존재라면 얼마나 가련한 운명을 타고난 것인가?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으로 가득 찼었다. 그런 생각은 끔찍했다. 이런 생각을 거부하기로 했다. 게이 커뮤니티 카페에 가입하고 게이 포르노를 보면서도 나 자신은 게이가 아닐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뭐 여자를 좋아하면 되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질, 끼(?)라는 것이 점점 발현되어 나를 괴롭혔다. 억제하기는 힘들었다. 점점 더 나는 커다란 지렁이와 메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포였다. 하지만 난 그것에 대항할 에너지가 없었다. 어쩌겠는가! 나는 인정했다.
그 이후 내가 가진 게이에 대한 이미지는 성공하고 유능하고 세련된 이미지였다. 요즘 미디어에 자주 보이는 게이들 말이다. 나는 그 이미지에 의지했다. 외국의 리얼리티 쇼, 영화에 나오는 잘생기고 멋진 섹시한 게이들, 예민하지만 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낭만적인 게이와 나를 동일시했다. 게이들 중에는 마크 제이콥스, 입생 로랑, 조나단 베넷 같은 멋지고 성공한 사람이 있으니까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도 나름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창피하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게이로 사는 것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돌연변이 이미지에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돌연변이의 이미지였다. 그저 보기 흉한 돌연변이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성공한 돌연변이 이미지도 변한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단절되고, 다른 사람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혹은 일부러 이해받지 않는 특성은 바뀌지 않았다. 게이라고 인정했을 때 느꼈던 열등감이 우월감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단순한 허위의식이었다.
내가 게이라고 했을 때의 웃음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기억을 더듬는다. 그 키득거림 속에서도 열등감과 우월감이 있었는지 살펴본다.
…….
이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게이라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학기자(웹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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