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사(동인련 웹진기획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긍심행진은 현대 성소수자 운동의 탄생을 알린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됐다.
1969년 11월 크레이그 로드웰을 비롯한 동성애자 운동 활동가들이 스톤월 항쟁을 기념해 매년 6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뉴욕에서 ‘크리스토퍼 거리 해방의 날’ 집회를 열고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행사를 갖자고 제안한 것을 계기로 1970년 6월 뉴욕,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등지에서 최초의 동성애자 행진이 벌어졌다. 급진적 분위기가 유지되던 70년대에 행진은 “동성애자 해방 행진”, “동성애자 자유 행진”으로 불리다가 80년대 들어서면서 “자긍심 행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세계 각지에서 성소수자 운동이 성장하면서 확산됐다.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자긍심행진은 수만 명이 모이는 대중적인 축제가 됐고, 정부와 기업 후원 등에 의존하고 정치색을 배제하면서 상업화와 체제 타협에 대한 비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성소수자를 사회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곳들에서는 여전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은 문화적인 축제로서의 성격과 정치적인 시위의 성격이 공존한다.
해외 자긍심행진의 모습을 살펴보면 전세계 성소수자 운동의 오늘을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몇몇 국가들의 자긍심행진의 역사와 현황을 간략히 소개한다. 전세계 자긍심행진 일정은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로가기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자긍심행진(요버그 프라이드)이 벌어진다. 이 행진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한 자긍심행진이었다. 1990년 시작돼 2009년에는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에는 케이프타운, 소웨토 등에서도 자긍심행진이 벌어진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면서 세계 최초로 헌법에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국가이고, 2006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도 계속되는 빈곤과 높은 실업률 속에서 동성애혐오는 줄지 않고 있다.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교정강간과 혐오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오명을 안고 있다.
2011년 요버그 프라이드 사진출처 http://joburgpride.org/
2012 요버그 프라이드 10월 6일 토요일
인도
인도에서는 1999년부터 몇몇 도시에서 소규모 자긍심행진이 있었고, 반동성애 법률 철폐 운동이 벌어지던 2008년 6월 29일 델리와 콜카타 등지에서, 8월에는 뭄바이에서 도시 최초로 자긍심 행진이 열렸다. 2011년 뭄바이 자긍심행진에는 3천여 명이 행진했다. 올해 콜카타 레인보우 프라이드 페스티벌의 슬로건은 ‘존엄과 평등을 위한 연대, 예술과 섹슈얼리티’이다.
인도는 영국 식민지 시절 제정된 형법에서 동성간 성행위를 범죄로 규정한 조항(형법 377조)을 유지해왔다. 2004년부터 인권단체들이 이 조항을 폐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고 2009년 위헌 판결을 받았다. 2011년에는 한 레즈비언 커플이 혼인 관계를 인정받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 수용도가 낮고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 등은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
이스라엘에서는 1993년부터 자긍심행진이 열렸다. 현재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서 여러 자긍심행진이 열린다. 텔아비브 시의 후원을 받는 행진은 2010년 10만 명이 참가할 정도로 대규모다. 예루살람은 종교적 반대가 심해 많은 갈등 속에서 자긍심 행진이 진행되고 있다. 2005년 예루살렘 시 당국이 자긍심 행진을 불허했다가 법원에 의해 취소된 사건이 있었고, 종교단체들의 반대 속에서 한 하레디파 유대교도가 칼을 들고 행진 대열의 참가자들을 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7년 예루살렘에서 국제 자긍심 행사로서 열린 행진은 수천 명의 경찰들이 배치된 상황에서 열릴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중동지역에서 LGBT 인권이 가장 잘 보장된 국가로, 텔아비브는 동성애자 친화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레디파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한 반동성애 운동이 존재하며 혐오범죄도 빈번하다.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탄압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이 성소수자 친화적인 이미지로 자국을 포장하려 한다(핑크 워쉬)는 비판도 있다. 한편으로 텔아비브 프라이드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항의를 표하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2002년 텔아비브 프라이드에서 팔레스타인에 연대를 표하는 이스라엘 LGBT 단체 회원 사진출처 :AP Elizabeth Dalziel
2012 텔아비브 자긍심 행진 6월 8일
필리핀
필리핀은 1994년 6월 26일 스톤월항쟁 25주년을 맞아 아시아 최초로 자긍심행진을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2003년부터는 시기를 12월로 옮겼고 2005년부터는 LGBT 자유 행진이란 이름으로 자긍심 행진이 열린다. 최초의 자긍심행진을 주도한 이들은 진보적 성향의 청년들이 주축이었던 프로게이 필리핀과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였고 광범한 사회 쟁점들을 다뤘다고 한다.
필리핀은 LGBT에 대한 사회적 수용과 가시화가 꽤 높다고 얘기되는데 법적으로 시민권을 보장받는 상황은 아니다.
일본
일본에서도 1994년 도쿄에서 최초의 게이레즈비언 행진이 열렸다. 현재는 도쿄와 삿포로 등지에서 자긍심행진이 벌어지고 있다. 올해는 4월 29일 도쿄 레인보우 프라이드가 열렸다. 자긍심행진 영상에서 원전에 반대한다는 펼침막이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삿포로 자긍심행진은 시의 지원을 받는 탄탄한 행사로 성장했다. 삿포로 시장선거와 홋가이도 도지사 선거에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개입한 성과로 2003년에는 삿포로 시장이 자긍심행진을 축하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만
대만에서는 2003년 11월 1일 타이페이에서 최초의 LGBT 자긍심행진이 열렸는데 타이페이 시장이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규모가 커지면서 “커밍아웃 하고 투표하자(Out and Vote)"를 모토로 내건 2010년에는 3만여 명이 참가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2011년 LGBT 자긍심행진의 슬로건은 "LGBT 반격, 차별을 없애자”였다.
2011년 타이페이 자긍심행진에 참여한 한 소년. 팻말에는 "우리 엄마는 레즈비언입니다. 우리 엄마는 완벽합니다"라고 적혀있다. 사진출처 http://globalvoicesonline.org
러시아
러시아에서는 2006년부터 시작된 자긍심행진을 정부가 불허하고 있다. 무장경찰이 행진 대열을 강제 해산하고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등 혹심한 탄압에 저항하며 매년 활동가들이 행진을 시도하는 상황이다. 얼마 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성애 선전 금지법’이 통과되면서 차별과 억압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 2011년에는 유럽인권법원이 러시아에 인권침해 판결을 내리고 4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하면서 자긍심행진이 가능할 거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결국 불허됐다. 행사는 강행됐지만 곧 반동성애 종교 단체의 공격을 받았고 경찰이 30여 명의 참가자들을 연행하면서 해산됐다. 연행된 이들 중에는 러시아 동성애자들에게 연대하기 위해 참여한 한국계 미국인 동성애자 활동가 대니얼 최도 있었다.
201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자긍심행진 참가자를 연행하는 경찰 사진출처 : 뉴시스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강제 해산 당한 2011년 모스크바 자긍심행진 영상
미국
4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뉴욕 자긍심행진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자긍심행진이 벌어진다. 올해는 6-7월 두 달에 걸쳐 행진을 비롯해 뉴욕 각지에서 성소수자 관련 행사들이 벌어진다. 2011년에는 뉴욕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직후 축하와 환영 속에 프라이드가 열렸다. 영상에는 장구를 치며 행진하는 대열도 보인다.
2012년 뉴욕 자긍심행진 6월 24일
뉴욕 프라이드의 역사가 잘 정리돼 있는 뉴욕 자긍심행진 공식 사이트
영국
1972년에 자긍심행진이 시작된 영국에서는 런던과 브라이튼, 맨체스터 자긍심행진을 비롯해 여러 행진들이 열린다. 72년 첫 번째 영국 동성애자 자긍심행진은 스톤월 항쟁의 여파로 탄생한 단체들이 주도했고 2천여 명이 참가했다. 영국에서는 1984-5년 광부 대파업 당시 진보적 성소수자들이 파업 광부들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였는데, 성공적이었던 캠페인의 성과로 1985년에는 광부노조가 자긍심행진 선두에 서서 연대와 지지를 표명한 역사가 있다.
프라이드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자긍심행진으로 매년 6월 마지막 토요일이나 7월 첫째 토요일에 열린다. 2011년에는 1백만 명이 프라이드런던에 참가했다. 2004년 이후 런던 시장 켄 리빙스턴과 보리스 존슨이 행진에 참여해 왔다. 프라이드 런던의 주요 스폰서 가운데 영국노총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프라이드런던에는 온갖 커뮤니티와 성소수자 단체들은 물론이고 직업별, 노조별 성소수자 모임들, 노동조합, 정당들, 사회단체들이 많이 참여한다. 행진 대열의 일부인 경찰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2012 프라이드 런던 7월 7일
호주
시드니 마디그라는 세계 최대의 성소수자 자긍심행진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다. 마디그라는 축제를 뜻한다. 호주에서는 1978년 6월 24일 처음으로 스톤월 항쟁을 기념해 동성애자 차별과 경찰의 괴롭힘 반동성애 법률에 반대하는 행진이 벌어졌다. 허가받은 집회였음에도 경찰이 공격해 53명이 체포됐다. 신문에서 체포된 사람들의 명단을 발표하는 아웃팅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기도 했다. 당시 뉴사우스웨일즈 주는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했다. 이듬해 스톤월 항쟁과 전 해의 사건을 기념하며 첫 마디그라가 벌어졌다. 같은 해 뉴사우스웨일즈 주정부가 반동성애법을 철폐했다. 마디그라는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는 행진이 항쟁 그 자체가 된 경우다. 1981년 행진 시기를 여름인 2월로 옮기고 ‘시드니 동성애자 마디그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2011년 ‘시드니 마디그라’로 명칭을 변경했다. 2011년 마디그라는 결혼평등이 주된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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