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권소식/해외 인권소식

[죠니의 러시아통신] “호모포비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치이다!” - 러시아의 IDAHO

by 행성인 2013. 5. 30.

종원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지난 5월 17일,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DAHO, 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 Transphobia)을 맞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5월 17일은 1990년에 세계보건기구(WHO)가 동성애를 국제 질병 분류에서 삭제한 날이다. 각국의 성소수자들은 이 날을 기억하고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5년부터 5월 17일을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로 지정하고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 폭력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럽 성소수자들의 연합 운동조직 ILGA-Europe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성소수자 인권이 가장 보장받지 못하는 유럽 국가로 러시아가 2년 연속 지명되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울려 퍼지는 인권 운동가들의 혐오 반대 외침은 절박하다. 올해 러시아의 아이다호(IDAHO) 데이는 더욱 그러했다. 약 150명이 참여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플래시몹 행사에서는 무지개 빛깔을 상징하는 형형색색의 풍선을 띄우기 전에 검은색 풍선 뭉치를 하늘에 날렸다. 얼마 전 혐오 범죄의 희생양이 된 한 청년을 애도하는 의미에서였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호모포비아는 살인이다!” 2013년 5월 1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된 아이다호(IDAHO) 플래시몹에서 (사진출처: http://www.comingoutspb.ru)


지난 5월 10일 이른 아침, 러시아의 남부 도시 볼고그라드에서 23세의 블라디슬라프 토르노보이가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는 전날 저녁 러시아의 국경일인 승리의 날(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소련에게 군사 항복을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동료 세 명과 함께 놀이터에서 술을 마셨고, 그 자리에서 본인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자 일행 중 두 명이 그를 조롱하다가 살인까지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피해자를 맥주병으로 강간하고 돌로 두개골을 내려치는 등 상상도 하기 힘든 야만적인 모습을 보였다. 가해자들은 이전에도 동성애 혐오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다고 한다.


아이다호 데이를 일주일 앞두고 벌어진 이 잔혹한 사건에 러시아의 성소수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권 단체들은 푸틴 정부의 호모포비아적 정책이 야기한 사회적 범죄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러시아에서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12개 지역에서 ‘미성년자 대상 동성애 선전 금지 법안’을 채택하여 동성애 ‘광고’(미성년자에게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에 관한 정보 제공, 공공장소에서의 성소수자 권리 요구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고, 이러한 법안을 연방 차원에서도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거센 상태다. 지난 1월 25일 러시아 국가두마(하원)는 동성애 선전 금지 법안을 1차 독회(심의)에서 388명 찬성, 1명 반대, 1명 기권으로 통과시켰고, 2, 3차 독회와 상원 심의, 그리고 대통령의 최종 서명을 남겨두고 있다. 이 법안의 규정을 어기면 개인은 최대 5천 루블(약 18만원), 법인은 최대 50만 루블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러시아 정부의 동성애 혐오 선전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센터가 지난 4월 45개 지역에서 16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성소수자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식은 15년 내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동성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질병이나 정신 질환이라고 답변한 응답자가 35%에 달했고, 성적 타락이나 악습이라고 답변한 이들도 43%나 되었다. 동성애를 성 정체성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은 12%에 불과했다. (1998년에는 18%, 2005년에는 20%가 동성애를 성 정체성으로 간주했었다) 또 성소수자들이 이성애자들과 같은 권리를 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무려 47%였다. 38%의 응답자들은 동성애를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3%는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레바다센터의 사회학자 데니스 볼코프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러시아 정부의 호모포비아적 정책의 탓이 크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정보를 러시아 정부가 사실상 통제하고 있는 TV를 통해서만 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1993년 5월 27일 동성애를 처벌하는 형법 제121조항을 폐지하고, 1999년 1월 1일에는 동성애를 정신 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바 있다. 그러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계속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러시아적 가치’의 수호를 주장하는 러시아 정부와 국회, 극우 민족주의 세력, 러시아 정교 원리주의자들이 있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4월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1000명이 넘는 암스테르담의 시민들이 무지개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와 러시아의 성소수자 인권 유린 실태를 비난하자, 푸틴은 러시아의 성소수자들이 어떠한 인권 침해도 받지 않고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거짓말했다. 동성애 선전 금지 법안을 발의했던 여당(통합 러시아당) 소속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의원 비탈리 밀로노프는 기도를 열심히 하면 동성애를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는 동성애가 신에 대한 죄라고 역설하며, 최근 우루과이, 뉴질랜드, 프랑스 등지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것을 두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죄악이 법으로 보장되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또한 키릴 총대주교는 얼마전 페미니즘을 두고 매우 위험한 현상이라고 비판하며, 많은 미혼 여성들이 주도하는 페미니즘이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파괴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4월 8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네덜란드 방문 시 그를 ‘맞이하는’ 암스테르담 시민들 (사진출처: REUTERS)


호모포비아의 중심에 서 있는 이 세력들은 지난 5월 17일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행사 때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의원 밀로노프를 비롯하여 약 200명의 극우 민족주의자, 러시아 정교 원리주의자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플래시몹 현장에 나타나 연막탄을 터뜨리고 돌을 던졌다. 원래 한 시간 동안 진행하기로 예정되었던 플래시몹은 안전 상의 이유로 15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구소련 국가인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는 더 심각한 충돌이 발생했다. 트빌리시에서도 성소수자들이 5월 17일 아이다호 데이를 기념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수천 명의 시민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면서 충돌이 일어나 부상자까지 발생했다. 참고로 조지아는 구소련 국가들 중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하는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인권 인식이 높다기 보다는, 조지아가 가입을 갈망하는 유럽연합의 압력으로 제정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금지된 나라에서 이러한 폭력이 자행된 배경에는 조지아 정교회 총대주교 일리아 2세의 호모포비아적 발언과 성소수자 집회 금지 요구가 있었다. 성직자들은 트빌리시 시민들이 뿌쉬낀 공원에 모여 성소수자 집회가 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라고 주문했다. 이날 충돌 과정에서 경찰은 성소수자들을 보호하였으나 수천 명의 ‘공격자’들을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러 명의 집회 참가자들이 부상을 입었고, 경찰과 기자 중에서도 부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집회 참가자들을 버스에 태우고 안전한 장소로 이송시켰으나, 집회가 종료된 이후에도 도시 곳곳에서 성소수자들에 대한 공격과 위협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조지아의 인권 운동가들은 조지아 정교회가 민족주의 정서를 이용하여 폭력과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며 탄식했다.


2013년 5월 17일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아이다호(IDAHO) 집회에 반대하는 조지아 정교회 성직자들 (사진출처: http://www.kvir.ru)


종교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민족주의가 대두하는 현상은 헝가리(2008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극우 세력이 게이 퍼레이드를 공격하여 1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등 많은 동구권 국가들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목격되고 있다.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종교가 민족주의자들의 상징이 되었고, 정치인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민족주의가 종교적 토대를 바탕으로 도약하는 곳에서 공통적으로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가 표출되고 있다. 올해 러시아와 조지아에서 벌어진 아이다호 데이 사건이 시사하듯, 민족주의와 종교 원리주의의 결합은 ‘희생 제물’로 바칠 ‘적’을 찾아 나서는 무서운 이데올로기를 낳았다.


“무슨 인권을 말하는 거야? 나는 안 보이는데.” 러시아의 LGBT 인권 운동가 알렉산드르 호츠(Alexandr Hotz)가 동성애 선전 금지 법안을 발의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의원 밀로노프를 그린 캐리커처


오늘날 러시아 제2의 도시이자 200여년간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베네치아는 몇 달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와의 자매결연 관계를 철회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성소수자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정부가 호모포비아적 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이상 협력을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르스 광장에 모인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들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집회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호모포비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