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회 참석자: 이주사, 덕현, 웅(동성애자인권연대), 윤경, 양유진, 김유미, 명희, 박나윤, 수원, 다온(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글: 이주사
2013년 420 장애인차별철폐투쟁 결의대회에 함께한 동성애자인권연대
4월 20일은 정부가 지정한 ‘장애인의 날’이다. 통계적으로 비가 오지 않는 날이었던 4월 20일을 ‘재활의 날’로 정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장애인운동은 장애인을 그저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생색내기식 하루 행사를 치루는 데에 머무르던 이 날을 거부하고 2002년부터 4월 20일을 ‘장애인차별철폐 투쟁의 날’로 선언하고 투쟁하기 시작했다. 동인련은 200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420투쟁에 연대해왔다. 올해에도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에 참여하고 4월 19일에는 10여 명의 회원들이 420 문화제에 함께했다. 웹진 ‘랑’은 420을 맞아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을 만나 장애인 차별철폐 운동의 쟁점과 경험에 대해 듣고, 연대의 확대를 위해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420 공동투쟁이 한창이던 4월 17일 장애인운동은 또 한 명의 동지를 잃었다. 故 송국현 동지는 차별적이고 불합리한 장애등급제로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지 못해 불이 난 집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4월 20일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고속터미널로 간 장애인들에게 경찰은 최루액을 쏘아댔다. 이 치열한 투쟁 다음 날, 동인련 회원 이주사, 덕현, 웅이 송국현 동지의 무기한 장례가 치뤄지고 있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공투단 회의를 마친 활동가들과 둘러앉았다.
장애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의 공통점 중 하나는 차별과 혐오 때문에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는 점이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3년째 이어지고 있는 광화문 농성장 책상에는 영정 놓을 자리도 없단다. 송국현 동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억압에 순응하라는 세상의 요구는 장애인에게나 성소수자에게나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이 나라나 사회가 장애인은 시설에서만 살아라 하는 느낌이었어요. 시설에 있으면 하루 세 끼 밥 먹여주고 비 안 맞게 해주는데 왜 힘들게 밖에 나가서 고생을 하냐는 느낌이에요. 시설이 아닌 곳을 선택했을 때 살 수 있게 해주지 않는구나 싶어서 이가 갈릴 정도에요.”(유미)
“성소수자들에게도 커밍아웃 안 하고 조용히 살면 문제가 없는데 왜 굳이 드러내냐는 반응이 커뮤니티 안팎에 있거든요. 문제의 원인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데 엉뚱한 사람들에게 감내하라고 말하는 거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이주사)
각자가 소위 ‘장판’이라 불리는 장애인 운동을 만나고 활동하게 된 계기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학생운동에 참여하다가 또는 사회복지 공부를 하다가, 별 상관 없는 것 같은 사진 공부를 하다가 장애운동을 만나게 된 활동가들은 대부분 장애인들의 현실을 접했을 때의 충격과 괴리감을 언급하면서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장애운동에 함께하게 됐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입을 모아서 이 공간이 너무 좋다고 한다.
“시위나 데모의 현장을 많이 봤지만 감정적인 측면으로는 이 공간만큼 좋았던 곳은 없는 것 같고요. 몸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이 있을텐데 그런 것을 드러내면서 물리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항하는 이들과 같이하고 싶었어요. 그런 것들이 두근거렸고 여전히 그래요.”(명희)
“여기 있는 게 너무 좋았어요. 장애 운동 문화가 권위적이면 못했을 것 같은데 이곳 사람들이 좋아보였어요. 힘든 것도 있지만 활동을 통해서 내 안에서 뭔가가 만들어지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은 특별한 계기가 있다기 보단 아주 자연스러웠어요.”(유진)
“스미듯이 물들었어요. 야학이라는 공간이 모든 것들이 느려요. 사람들의 속도도 드리고 바뀌는 것도 느려요. 그것처럼 저도 천천히 조금씩 빨간물이 든 것 같아요.”(다온)
의도치 않게 좌담회에 참석한 활동가들은 모두 비장애인이었다. 참석자 섭외를 좀더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해 아쉬움도 남는다. 성소수자 운동에서는 당사자/비당사자 얘기를 자주 들을 수 있고 이성애자들도 함께하는 동인련 안에서도 비당사자로서 운동에 함께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심심찮게 접한다. 웅은 에이즈 운동을 하면서 느낀 비슷한 고민지점을 언급했다. 장판에서 비장애인으로서 활동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물었다.
“노들야학 하면 좋은일 하시네요. 봉사활동 하는 거냐는 얘길 많이 들어요.”(명희)
“장애 운동에서는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도 아닌데 이렇게 일해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아요. 장애인에 대한 동정과 시혜가 아주 일반적이고 깊은 사회에서 너무나 쉽게 나오는 반응들이죠.”(윤경)
성소수자 운동에 참여하면 장애 운동에 참여하는 것과 다르게 좋은 일 한다는 반응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이 왜”라는 질문에 맞닥뜨리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둘러싼 편견과 차별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나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것처럼 장애 문제를 고민하는 것도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이고 자기의 운동이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예전엔 화가 났어요. 지금은 이해되는 면이기도 해요. 부모나 당사자들이 네가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한다는 반응이 나올 때 충돌하기도 하죠. 저는 도대체 당사자라는 것이 무엇이냐 질문하고 싶어요. 청소년 문제는 청소년만 얘기하고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만 얘기해야 하는 건가, 장애인권에 대한 내 안의 분노가 있다면 그게 당사자 아닌가,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경계를 없애자고 하는 우리 운동에 또다른 경계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을 정리했어요.”(윤경)
“사회적인 남성과 여성을 허무는 것, 그리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물리적, 신체적 장애인 것도 이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사회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죠. 사람을 구분해 놓은 모든 경계를 허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명희)
활동가들은 각기 성소수자/운동과 다양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종로 포차길에서 술을 마시다 마주칠 정도로 친한 성소수자 친구가 있기도 하고 동인련 회원의 학교 선배도 있었다. 지보이스 공연에 간 경험부터 역사적인 성소수자들의 첫 점거농성 전술을 짜달라는 요청을 들었던 경험, 장판에 함께 한 동성애자 친구가 겪는 어려움을 보면서 느낀 고민까지 다양한 경험들이 쏟아져나왔다.
“학창시절, 기독교 학교라 성소수자에 대해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후배가 커밍아웃을 하고 성소수자 인권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했어요. 그런 활동이 학교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거든요. 성소수자 운동에 대해 잘 몰랐는데 그 친구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고 학교도 많이 바뀌었죠. 그 친구 덕분에 이태원 클럽도 가봤는데 충격이었죠. 새벽에 이렇게 활발하게 놀다니 세상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유진)
“2011년 겨울에 학생인권조례 농성할 때에요. 제가 연말에 딱 일주일 휴가를 냈어요. 쉬기 전날 성소수자 활동가에게 전화가 와서 농성에 들어간다는 거에요. 그래서 침낭 같은 걸 빌려달라는 줄 알았어요. 근데 전술을 짜달라는 거에요. 전술을 왜 나한테 짜달라는 건가 했는데 들어보니까 그런 걸 처음 하는데 내가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도 하고 그런 얘기를 하기 편한 사람이었던 거죠. 그래서 휴가를 농성하는 걸로 보냈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아침에 모여서 들어갔는데 보통 비밀스럽게 한번에 모여서 들어가는데 덕수궁 앞 그 큰 도로에서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들어갔어요. 그때가 대중적으로 점거농성 처음한 거라는 얘길 듣고 정말 의미있는 날이란 생각이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좋더라구요.”(윤경)
“노들야학 교사 중에 성소수자인 친구가 들어온 적이 있었어요. 전 좀 다른 경험인데, 당당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드러날까봐 두려워했어요. 레즈비언인 친구에게 학생분들이 너 남자냐 하는 식으로 거친 발언들이 있어서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굉장히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노들야학이 그 친구에게는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는 게 되게 속상했어요.”(명희)
“작년인가 장애인 거주시설 종사자들 대상으로 장애인권교육에 가게 됐어요. 그때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를 막 읽고 교육에 가서 그 책에 있던 사연들을 얘기해 주고 꼭 읽어보라고 얘기했어요. 성소수자 이야기도 했구요. 그날 밤에 참여자 중 한 명이 저한테 커밍아웃을 했어요. 활동하는 사람들만 알았지 개인적으로 커밍아웃을 처음 받아본 거였어요. 정말 고맙더라구요. 문제는 그 사람이 장애인권 감수성이 완전 아니었다는 거지만. 그 사람은 저한테 와서 자기 얘기를 해줘서 너무 고맙다면서 커밍아웃을 한거죠.”(윤경)
“사실 속상하는 일인데, 장판에는 제가 알기로 커밍아웃한 사람이 없어요. 커밍아웃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 공간의 감수성이라고 봤을 때 장판은 빵점인거죠. 그게 창피하고 속상한 일인 거죠.”(윤경)
지난 4월 19일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장애등급제 피해자 故 송국현 동지 추모문화제 ‘분홍종이배의 꿈’에 함께한 동성애자인권연대
성소수자 일반이 장애에 대한 편견이 없지 않듯이 장애인 운동에서도 성소수자의 존재나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이해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 법이다. 아직 갈 길이 멀기도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변화의 출발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더 자주 만나자고 입을 모았다.
“만남의 채널을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고민은 하는데 어떻게 시작할지는 막막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장판에도 커밍아웃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커밍아웃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잖아요. 장애인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이 같이 해야하는 거기도 하고.”(웅)
“이제는 성소수자 운동이 좀 격해져도 되는 게 아닌가 해요. 군형법 문제라거나 차별금지법도 그렇고 우리가 화를 내야하는 타이밍이 있거든요. 밖에서 보는 제가 봤을 때는 같이 싸우자고 먼저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요. 또 비슷한 점은 동성애가 옮는다고 생각하잖아요. 장애도 옮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 자식이 학교에서 장애학생 옆자리면 싫어하고. 그런 혐오의 경험도 모아내 보면 좋겠어요.”(윤경)
“동인련과 전장연이 친구가 됐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어색한 사이지만 꾸준히 같이 갈 수 있는 단단한 친구가 된다면 좀더 유기적으로 많은 걸 할 수 있을까요.”(명희)
“사무실에 엘리베이터도 있다는데 놀러가죠.”(유진)
“둘이 뭔가를 같이 하면서 자주 봐야죠. 420 때 무지개깃발이 떠 있어도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함께하는지 잘 모를 수 있거든요. 작년에 육우당 추모제 때도 시기가 겹쳐서 많이 조직을 못해서 미안했는데 4월에 함께 반차별 콘서트 같은 걸 같이 기획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같이 할 수 있는 얘기들이 생길 것 같구요.”(윤경)
“장애운동에서 제일 좋은 게 퀴어함이거든요. 전 이상한 걸 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패션쇼를 하는 거죠. 퀴어운동에서 입고 싶은 대로 입고 이 세상에서는 변태로 보지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문화가 있거든요. 그런 걸 장애인들과 함께 하면 멋있을 것 같아요.”(덕현)
덕현 말처럼, 장애운동은 퀴어함에서라면 성소수자 운동 못지 않다. 전동 휠체어 무리를 거리에서 마주했을 때, 낯선 발음과 몸짓들에 둘러쌓였을 때 느끼는 ‘이상’함은 그만큼 우리 ‘일상’의 억압과 차별의 반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함이 주는 충격과 처절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자긍심을 낳는 저항과 슬픔을 넘어서는 유쾌함으로 이어지는 퀴어함이 장판의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윤경은 성소수자 운동이 좀 더 격해져도 될 것 같다고 화를 낼 때는 제대로 내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말했다. “드러누울 일이 있으면 연락주세요.” 호모포비아들의 짓거리에 넌덜머리가 나면서 화가 솟구칠 때면 정말 난장판을 만들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 ‘장판’은 그 난장판의 가장 든든한 일원일 것이다. 장판과의 더 많은 만남과 이야기를 기대해보자.
2013년 420 장애인차별철폐투쟁 결의대회에 함께한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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