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산 - 임브레이스, 브로큰 




  치유는 가능할까. 


  시간이란 것은 그토록 힘 센 걸까. 목숨을 버릴 만큼 절박했던 감정마저 그토록 아무렇지 않게 되어버릴까. 미완의 시간을 내려놓을 만큼 우리는 강해질 수 있을까. 

  레나라는 주인공 여자를 둘러싼 감정들을 지켜보며 나에게는 의심이 먼저였다. 슬픔이나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몰락이라고 해도 좋을 시간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남자 주인공의 눈물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아서. 아니다. 어쩌면 부러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긴 시간 뒤에 다가올 '포옹'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산산이 부서질 수 있는' 그들의 투신이 부러워서. 

  "감독 얘기네요, 그죠?" 

  들고있던 영화 안내문을 들여다봤다. 그러나 어디에도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문구는 없었다. 스페인의 섬 란타로사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이 영화가 시작되었다는 설명이 있기는 했다. 절벽 위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남자. 그의 뒤에서 매달리듯 포옹하고 있는 여자. 그 모습은 내 안에서 어떤 우울을 건드렸지만, 어디에도 감독 자신의 이야기라는 설명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럴까요?" 

  "창작자라는 건 그런 사람들일 거예요.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결국 흔적이라는 게 남겠죠. 그건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거짓말일 수밖에 없죠. 자기 안에서 나왔는데 자기가 아니라니 이율배반이죠, 그건." 

  그녀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스쳐갔다.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를 걸치고 구겨진 회색 재킷을 입은 모습. 그녀의 외모는 남자인 내겐 익숙한 것이어서 그래서 더욱 낯설었다. 맞다, 익숙했는데 낯설었다. 감정적이고 정돈되지 않은 그녀의 자서전을 읽은 건 작년 가을이었다. 그녀의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던 것은 그녀가 추구하고 있는 모호한 삶에 대한 응원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은데, 어쩌면 호기심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뭐 대놓고 영화감독에 정부에… 등장인물들이 다 그렇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나 삶에 어떤 기대가 있지도 않았으니 실망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 때의 그 호기심을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갑작스런 만남이었으니 허름한 관심조차도 내겐 없었다. 그저 같이 앉아서 같은 영화를 보았는데, 서로 다른 영화를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낯설었다. 나는 아팠는데 그녀는 아프지 않았다는 사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파할 필요가 없었던 것에 그녀가 그토록 오래 아파했었다는 사실은. 

  "어, 비오네? 우산 가져왔어요?" 

  "예? 네." 

  가방 속에서 나는 여러 번 접힌 우산을 꺼내 펼쳤다. 

  "같이 써요." 

  대답을 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은 내 팔꿈치 아래로 파고들었다. 무기력으로 늘어졌던 내 팔뚝이 갑자기 단단해졌다. 그녀의 체온을 겨드랑이 아래 끼우고 빗속으로 걷는데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실망도 호기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영화 속에서 늙어가던 에르네스토가 그리워하던 사랑이나 설렘 따위도 아니었다. 분명 낯선 느낌이었는데, 이상하게 따스했다. 낯선 것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신기한 온기였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그것이 팔 밑을 뭉근하게 데우며 심장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분명 빗물이 바짓단을 기어오르고 있었고, 축축한 습기가 파편처럼 온 몸에 들러붙었는데, 신기하게도 우산 아래가 햇살이라도 든 것처럼 따스해졌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진, 낯선 밤이었다. 


  기억났다. 고독하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고독과는 다른 고독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세상이나 타인으로 인해 고독해지는데,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고독해진다고. 도망치거나 벗어버릴 수 없는 스스로의 존재로 인해 고독하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맞다, 그 때문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책을 읽고 작가의 홈페이지까지 찾아가 글을 남겼던 것은. 

  "책을 많이 읽으시나 봐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나도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거짓말 같았다. 있지도 않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가짜 공감을 만들어내던 정신과 상담 의사들처럼. 

  "번역 원고는 먹고 살아야하니까 억지로 읽는 거고." 

  "번역도 하세요?" 

  "종교 관련 서적들인데… 희망이니 평화니 구원이니, 그 따위 것들만 찾는 이야기 재미없어요." 

  희망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익숙했는데, 낯설었다. 또 다시 심장을 데우던 그 온기가 생각났다. 우산 속 어딘가에서 내리쬐던 신기하고 낯선 밤의 빛. 

  "서울에는 자주 오셔요?" 

  "아뇨, 책모임 때 가끔요." 

  "저는 되게 날카롭고 그런 분인 줄 알았어요." 

  "제가요?" 

  "홈페이지에 올리신 글 보면요. 글에서도 인상이라는 게 있거든요. 사람에게 풍기는 그런 느낌처럼요. 그래서 당연히 조금은 마르고 날카로운 느낌을 가진 분 인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거하고 많이 다르시네요." 

  느낌이라는 말은 언제나 무서웠다. 예감이나 예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 의해 더듬어지고 가늠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그녀의 눈을 보지 못하고 하얀 커피 잔의 시커먼 속을 들여다봤다. 

  "저는 어떤가요?" 

  "예?" 

  "저 같은 사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시잖아요, 그죠?" 

  그녀의 책 속에서 보았던 '우리 같은 것들'이라는 자조적인 어투가 떠올랐다. 타인에게 먼저 경계를 지워 선을 긋는 것 같은 그녀의 문장은 모래처럼 서걱거렸었다. 

  "예, 그렇죠." 

  "다른 애들은 안 그래요. 다른 애들은 화장도 예쁘게 하고, 야한 옷도 입고, 여성스럽고… 제가 특이한 거예요. 선입견이기도 하고요. 사람들의 선입견." 

  그러나 그건 사람들의 선입견이기도 했을 것이고, 그녀의 선입견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며 말하지 않으려는 몸짓, 드러내며 오히려 감추고 있는 소심함. 또 다시 낯설고 익숙한 것이 생각났다. 나는 황급히 손 안에 커피 잔의 온기를 담았다. 

  "저는 성형수술도 하지 않고 옷도 그냥 예전에 수술하기 전에 입던 거 입고 다니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무슨 트랜스가 그러냐고 욕먹기도 하고 그래요. 왕따죠, 왕따!" 

  침묵이 흘렀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장 더럽고 어두운 곳에 스스로를 흠뻑 담그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시커먼 것을 뒤집어쓰며 사람들 앞에 헤 웃어버리면서 감추려는 어떤 물기. 그 위로 또 다시 익숙한 얼굴이 생각났다. 너무도 익숙해서 낯선 얼굴이었다. 그녀의 등 뒤로 그와 눈이 마주쳐, 나는 황급히 눈을 피했다. 

  "손이 참 크시네요." 

  "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억지로 활짝 편 내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그녀는 활짝 웃었다. 

  "나도 남자 태생이라 손이 엄청 크거든요. 우와… 정말 크네요, 손!"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분명 온기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손바닥 밑이 따스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온 냉기로 내 손도 식어가고 있을 텐데, 자꾸 어딘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따스한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는 것이 모든 자연의 법칙일 텐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정 반대였다. 세상의 순리를 거역하고 거꾸로 흐르는 물처럼, 우산 아래 뜬 태양처럼, 저녁 빛도 아닌데 붉어졌던 그 때의 그 하늘처럼. 


  카페를 나와 나는 그녀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었다. 이제 내 두 손엔 훨씬 더 뜨거워진 온기가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가을 날씨는 부쩍 쌀쌀해졌는데, 그녀는 새빨갛게 얼어가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도 않고 꼭 쥔 채였다. 그러고 보니 구겨진 회색 재킷에는 너무 작은 주머니가 가슴팍에 달려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얼어버린 자신의 손에 온기가 필요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손을 뻗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더욱 차가운 손이 느껴졌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감싸 내 주머니 안에 밀어 넣으면서, 나는 걱정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거꾸로 흐르는 순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며 차가워져서 더욱 뜨거운 그 온기. 낯설었지만 익숙해져 온 몸을 타고 흐르던 반역의 온기. 

  그녀가 나를 올려봤다. 손을 빼지는 않았다.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녀의 손이 꼬물거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분명히 나는 거역이나 반역 따위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불쑥 용기가 생겼다. 그저 나는 무기력하게 떠밀려가고 있는 거라고 믿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순간 또 다른 쪽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순리를 알 것만 같았다. 그 누구의 손도 식어가지 않고 오히려 함께 따스해지는 새로운 세상의 순리. 

  우린 지금 뒤집힌 세상의 순리를 따라 걷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 종로 한 복판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나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당장이라도 뜀박질을 할 것처럼 온 몸이 가벼워졌다. 

  그 때였다. 절벽 위에 서 있던 두 남녀가 기억났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허리를 감싸고 위태롭게 낭떠러지 밖을 향해 서있던 두 사람. 쓸쓸하고 우울한 풍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사람은 거기 그 위태로운 끄트머리에서 세상은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흔들림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던 건지도. 

  나는 그녀가 타야할 버스 정류장에 다다를 때까지 한 번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우리는 '임브레이스'를 나누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부서지는' 것이 결코 두렵지 않은. 


  포옹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의 삶에 침범한 그 반역이 나는 참 반가웠다.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 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장편소설 [빠쓰정류장]을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데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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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01 00:37 신고 [Edit/Del] [Reply]
    아...역시 김비 작가님..bb 묘사가 너무 아름다워요.
    • 2014.12.01 19:34 신고 [Edit/Del]
      처음 답글이라 더욱 반갑네요. 부끄럽습니다. 재미있게 보시고 이렇게 댓글 남겨주시면 저도 열심히 댓글 달도록 하겠습니다. 날씨 춥네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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