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잎새 - 사랑, 사람이라는 말의 오기(誤記)인 




  언젠가 편지에 글자를 잘못 쓴 적이 있었다. 나는 분명 '사람'이라고 썼는데 편지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사랑'으로 읽었다. 가령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라고 나는 썼는데, 그는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라고 이해했다.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지.'라고 썼는데, 그는 '사랑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지.'라고 받아들였다. '나도 사람이야.'라고 썼는데, 그는 '나도 사랑이야.'라는 고백을 닮은 말로 읽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내 엉망인 손 글씨 탓이었다. 한글의 '미음(ㅁ)'을 끊어서 쓰지 않고 한 번에 이어서 썼기 때문에, 조금만 성급하게 손을 움직이거나 흘려 쓰게 되면 '사람'은 영락없이 '사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편지를 받았던 그는 내 손 글씨에 익숙했던 사람이었고, 그는 '사랑'이라고 보이는 모든 글씨들을 '사람'이라고 이해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사랑'이라고 씌어진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이상하게 생각했겠지만, 다행히 그와 나의 시간들은 그런 오류를 알아서 바로잡을 만큼 충분히 넉넉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심인 '사랑'을 닮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못 씌어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말과도 닮은 것인지 모른다. 기록되고 눈에 보이고 받아들여지는 그 모든 벽들을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으로 먼저 닿게 되는 그 말들이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잘못 쓰지 않은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그 '사람'을 떠올렸던 것은. 


  유진은 조금은 당혹스러워하는 듯했다. 제일 먼저 너에게 소개를 시켜주고 싶다는 말에, 그는 어쩐지 망설이고 있었다. '망설였다'라는 말조차 틀린 것인지 모르지만, 그는 어떤 생각을 뛰어넘으려는 듯 더듬거렸다. 

  "언제 오는데?" 

  "토요일에. 그러니까 토요일에 홍대에서 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너도 홍대 괜찮지?" 

  또 다시 여러 번 어떤 생각을 뛰어넘는 침묵이 그와 나 사이에 스쳐갔다. 

  "응, 다른 약속은 없어." 

  "같이 만나서 그냥 저녁 먹고 맥주 한 잔 하면 되는 거니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이번에는 내가 어떤 생각들을 열심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에게 가 닿기 위해. 오기되거나 오독되지 않고, 그 때처럼 그의 마음에 먼저 가닿기 위해. 

  "그래… 그러지 뭐." 

  대답을 하긴 했지만 어쩐지 그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말줄임표는 필요 없는 한 단락의 문장이었는데, 시간이 동그랗게 뭉쳐져 작은 말줄임표로 우리 앞에 똑, 똑, 똑 떨어진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했다. 왜 가장 먼저 그에게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을까. 단지 그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가족을 등진 나의 삶에 그가 가족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기에? 

  다시 '사랑'이라고 잘못 씌어졌던 '사람'에 대한 편지를 떠올렸다. 성급하고 서툴러 나는 또 다시 어떤 글자들을 잘못 써내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원래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내 어리석은 손짓이 마음이라는 종이 위에 점을 찍어 엉뚱한 것들을 적어 놓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사람'이라고 또박또박 말해본다. '사랑'이라고 또 다시 또박또박 말해본다. 이상하게도 '사랑'이라고 말을 해도, '사람'이라고 말을 해도, 똑같은 울림이 심장 밑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인지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분명 설렘이었다. 


  부산에서 새벽에 버스를 탔을 산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진을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을 때, 그는 어쩐지 더듬거리는 듯했다. 혹시나 그것이 나 몰래 감추어두었던 얄팍한 속내는 아니었는지 습관처럼 피해의식이 떠올랐지만, 나는 불쑥 일어서는 생각들을 훌쩍 뛰어넘었다. 

  용인에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서도 그는 말이 없었다. 나도 특별한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은 한 번도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자를 제대로 소개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몇 달 째 그가 보여준 한결같은 모습을 신뢰하면서도, 어쩌면 내 마음 저 밑바닥 어딘가에 나는 잘못 쓰는 내 습성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꼭 처가집 식구들한테 인사가는 것 같네요." 

  "무슨… 그냥 나하고는 가까운 친구니까… 왜 그러잖아요? 특별한 사람 생기면 가장 먼저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그런 거. 물론 가족이 별 의미가 없는 내게 그 친구는 친구 이상의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욱 자기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편안하게 봐요. 자기랑 동갑이니까 그 친구랑 친해져도 좋을 거고." 

  웃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얼굴은 찌그러지는 것 같았다. 엉뚱한 불안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그의 손을 쓰다듬었지만, 사실 뜻 모를 나의 불안도 그의 손에 의지하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여러 번 어디쯤 오고 있느냐는 확인 문자가 왔다. 나도 여러 번 유진에게 어디쯤 가고 있다고 확인 문자를 보냈다. 모르긴 몰라도 세 사람이 모인 그 자리는 분명 불편하고 어색할 것이다. 여러 개의 장애물 앞에 선 주자처럼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른다. 그 사람 모르게 심호흡을 한다. 열심히 '사랑'을 쓰는 연습을 하면서, '사람'을 잘못 쓰지 않기를 바라면서. 


  "윤후산입니다." 

  "차유진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 예. 저도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서로 악수를 주고받으면서 형식적인 몇 마디를 나누는데, 왠지 아슬아슬했다. 어색함을 들킬까 유진은 사람들이 뒤엉킨 홍대 거리를 황급히 앞 서 걸었고, 버릇처럼 내 손을 꼭 붙들고 있던 산은 어쩐지 내게 매달린 모양새였다. 

  주차장 골목을 지나 조금은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어색한 말들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건 산과 유진 사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산이 내게 건네는 말이거나 유진이 내게 건네는 말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거나 듣고 있었고, 나는 그 둘의 이야기를 모두 들으며 또 그들의 모든 말들에 답하고 있었다. 이상하고, 위태로웠다. 

  "어떻게 만나시게 되셨어요?" 

  "아, 예… 제가 이 사람 책을 봤습니다. 그래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가끔 글도 남겼고요. 그 날은 우연히 만난 거고요." 

  "네가 그 동료 선생님 결혼식에만 가지 않았어도 우린 못 만났겠지." 

  "저도 서울에 약속이 있어서 올라왔는데, 그게 어긋났거든요. 유진 씨는 어떻게 이 사람을 만났나요?" 

  유진과 나는 그제야 서로를 봤다. 너무 먼 시간들인데다가 어색한 긴장 속에 있어선지 우리는 허겁지겁 이었다. 

  "십 년 됐나?" 

  "넘었지." 

  "그렇게 됐나, 벌써?" 

  "그럼! 그게 나 레인보우 통신 모임 막 들어갔을 땐데." 

  "그 때 누나 처음 봤을 때, 참 웃겼는데." 

  "너는 그 때만 해도 상큼했지." 

  "군대에서 막 제대했을 때니까." 

  "아유, 얼마나 귀엽던지." 

  엉뚱하게도 우리는 산이 건넨 질문으로 까맣게 잊고 있던 오랜만의 추억에 빠져들고 있었다.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산의 표정이 굳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면서 나는 황급히 유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때 문학 모임에 같이 있었어요. 그 통신 모임에 소모임이 있었는데, 그 때 같이 활동했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도 그 문학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고." 

  "아, 데리다?" 

  "그래, 그 때 다들 만난 거잖아? 그래도 우리 모임에는 다양한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고루 모여 있어서, 모임이 좀 알찬 편이었지. 여전히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그래, 맞아. 거기 중학생도 있었잖아? 그 친구들은 지금도 나오나?" 

  "당연하지. 걔가 지금은 스물다섯이지. 상우 오빠가 걔 바이섹슈얼이라고 얼마나 구박하는데?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모임 나오는 거 보면 기특해." 

  "다른 트랜스젠더도 있지 않았어? 걔는 에프투엠이었지?" 

  "응, 게다가 게이. 좀 복잡하지, 걘." 

  그와 나의 이야기는 또 다시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옆에 앉았던 산은 목이 타는지 마실 줄도 모르는 맥주를 연신 들이켰다. 나는 또 다시 산의 눈치를 살피며 더듬더듬 그의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우리 문학 모임 이야기에요. 데리다라고. 지금은 거기 모임 창립 멤버가 아예 카페를 차려서 데리다라는 카페가 실제로 있어요. 데리다, 자크 데리다. 철학자요. 애들 데려다가 이상한 짓 하는 게 아니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상우 오빠가 데리다 오빠 놀리느라고 그러지 뭐. 데리다 오빠가 어린 애들 좋아한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 데려다가 이상한 짓 하려고 카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라고." 

  "풋!" 

  유진이 마시던 맥주를 뿜었다. 그제야 나는 맥주 거품을 뒤집어쓰고 앉아있는 산을 봤다." 

  "아, 이거…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유진이 황급히 냅킨으로 산의 앞자리를 닦아냈지만, 굳어버린 그의 표정은 더욱 달아올랐다. 말문을 닫아버린 채 옷에 묻은 맥주를 털어버리며 그는 또 다시 술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한꺼번에 술잔을 비우고는 그는 또 다시 종업원을 불러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어떤 말을 꺼냈다가도 또 다시 두 사람만의 수다로 이어질까 잔뜩 경계를 하는 바람에 그저 몇 마디만을 중얼거리고는 그만이었다. 팽팽하던 줄이 끊어지며 위태로운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의 만남이니 즐겁고 유쾌할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버렸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니 둘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반역처럼 드러나는 현실은 곤혹스러웠다. 헤어질 때까지 우리는 딱히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를 주고받지도 못했고, 최소한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겠다는 최초의 다짐도 지키지 못한 채였다.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유진은 서둘러 자리를 떴고, 그는 더 이상 내 손을 잡지도 않고 사람들 속을 먼저 파고들었다. 

  그의 마음을 나는 이해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처음 마주하는 '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누군가가 낯설었을 것이다. 모르기는 몰라도 그는 대중매체에 모습을 드러내는 유명 연예인 동성애자의 여성스런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무도 평범한 남자의 모습으로 게다가 자신의 여자 친구인 나와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가 불편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질투'라는 폄하된 이름으로 치환된 감정은 어쩌면 사랑보다 더욱 견디기 쉽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게다가 그의 눈에 비춘 나는 유진과는 더욱 편안하고 즐거웠고, 오히려 그에게는 점점 더 불편해지는 것 같았을 테니 더더욱. 

  나는 솔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해답은 간단하게 마련이다. 내 진심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만이 단 하나의 해답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유진을 처음 만났던 때부터, 그가 나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던 순간까지 모두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그 날은 비가 오던 날이었는데, 의사에게 성전환수술을 받을 수 없다는 선고를 들었던 때였다. 내가 충분히 여성적이지 않으니, 그것은 여성으로의 전환된 삶이 아니라 남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참으로 전문적이지 않은 진단을 받았던 날이었다.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여자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오라는 의사의 이야기는 혀 놀림처럼 지독했고, 나는 멱살잡이라도 할듯 의사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간호사에게 끌려나오고 말았다. 

  그 동안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내 혼란을 직시하며 살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깟 외향적 조건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나 스스로 내 혼란을 뚫고 일어서겠다는 의지를 붙들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의지와 자존감이 오히려 나를 가로막는 덫이 되던 순간이었다. 

  나는 그 날 병원 바깥에서 쭈그리고 앉아 엉엉 울었다. 뒤집힌 시간의 물결에 휘말리며 나는 온통 흠뻑 젖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눈물에 나는 바다 한 가운데 무기력하게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는 벌레 한 마리였다. 탈피하지 못한 채 죽음을 떠올려야하는 어떤 보잘것없는 벌레 한 마리. 

  그런데 갑자기 온 몸을 때리던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귓가에 천둥소리와 빗소리는 더욱 크게 세상을 찢고 있었는데 내 머리 위에만 해가 비춘 듯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슬며시 고개를 들었는데 길 건너편 쇼 윈도우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형편없는 내 머리 위에, 누군가 우산을 받쳐주고 있었다. 자신은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오래도록 말없이 내 머리 위에 우산을 받쳐주고 있던 사람. 아무도 모르게 침묵으로 내 찢겨진 마음을 위로하던 단 한 사람. 그가 바로 유진이었다. 


  "그래서요?" 

  버스에서 내려서며 그는 도망치듯 걷고 있었다. 그를 놓칠까봐 나는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아뇨, 걔는… 걔는 내게 그런 존재라고요. 나한테 그렇게 가족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불편하거나 그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텅 빈 도로로 뛰어들고 있었다. 

  "내 말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된다고요. 이럴 필요 없는 거예요. 겉으로는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유진이하고 나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없는 거라고요."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남자인 그와 여자인 나, 남자인 그와 남자인 나. 어쩌면 어느 것이더라도 그에겐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잘못 쓰거나 읽힌 것도 아니었는데, 틀린 그것은 너무도 또렷하게 그의 앞에 선뜩했을 것이다. 

  "자기가 날 사랑하는 마음이 증거예요. 내가 남자의 태생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가 나를 사랑할 수 있었던 그 진실한 마음이, 유진이가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거라고요. 걘 동성애자에요." 

  순간 그의 눈이 찌르듯 나를 봤다. 해서는 안 되는 한 마디를 집어삼키듯이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믿었다. 반드시 그래야한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그것만큼 누군가에게 깊숙이 다가간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그토록 서로에게 활짝 열린 두 사람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진심은 분명 그에게 가 닿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자꾸 이상한 데 발을 빠트리는 느낌이었지만 이 번 만큼은 잘못 쓰지 않은 사랑을 나는 확신하고 싶었다. 

  "나중에… 나중에 연락해요. 오늘은 그냥 내려갈게요." 

  어둠 속으로 그는 내달리고 있었다. 택시에 올라타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엔 표정이 없었다. 그의 모습이 점 하나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두드러기처럼 온 몸을 간질였다. 또 다시 누군가 내 머리 위에 우산이라도 받쳐주지 않을까 위를 올려보았지만 그나마 몇 개 되지 않던 별 빛마저 오늘은 연무 너머에서 흐릿하고 힘이 없었다. 영락없이 나를 닮았다.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 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장편소설 [빠쓰정류장]을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데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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