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8. 데리다 - 세계, 호출하는
“비가 오면, 이소라가 생각나지 않아?”
“나 같아도 좀 섭섭했겠는데, 뭘.”
“누나, 누나. 비 오면 이소라 노래 생각나지 않느냐고? ‘제발’ 부르면서 울먹이는 그 언니 모습이 아직도 선해. ‘이소라의 프로포즈’할 때… 그때 그 언니 그 노래 부르면서 자꾸 눈물 나서 못 하겠다고 무대에서 여러 번 내려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방송되었던 적 있었잖아, 기억 나?”
“그래, 그랬을 수도 있지. 보고 듣는 것하고, 실제로 마주하는 건 꽤나 큰 차이니까. 차이가 있다고 듣는 것과도 또 훨씬 큰 차이라는 걸 알게 되니까. 그 사람도 자신도 모르는 편견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자격지심 같은 게 더해질 수도 있었겠지.”
“그건 말 그대로 자격지심 아니에요? 그건 개인이 감당해야할 감정인 거지, 다른 사람이 그것까지 헤아려 주길 바라는 건 좀 그래요. 그 쪽이 우릴 온전히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데, 왜 우리가 그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하는 거냐고요? 그건 공평하지 않아요.”
“용호, 쟤 또 까칠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아직 어려서 세상 빡빡하게 살아가는 일이 가장 옳은 거라고 생각할 때지. 내가 어떻게든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내 생각만이 가장 옳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때. 어려, 아직 어려.”
“그런 식으로 말하면, 형이야말로 어른스럽지 못한 거죠. 틀린 건 틀렸다, 옳지 않은 건 옳지 않다, 이미 알고 있다면 먼저 나서서 그런 이야기들을 해줘야 할 어른들이 그것도 자랑이라고 매번 나이 타령에 숨고, 먹고 사는 일 뒤에 숨고… 하여간 형이야말로 어른 되려면 아직 멀었어요, 그죠?”
“이소라 말이야, 그때 왜 그렇게 울었을까?”
“너… 너 자꾸 헛소리 할래? 지금 심각한 이야기하는데 그게 무슨 뻘소리야?”
“난 그런 어른은 안 될게요, 걱정 말아요. 그렇게 비굴하게 사느니 난 계속 애들 하지 뭐.”
“그만, 그만! 너희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러냐?”
“저 쬐그만 게 자꾸 버릇없게 굴잖아요? 저 놈 중학생 때, 처음 봤을 때부터 저 놈 원래 저랬어, 저거.”
“그럼 형도 중학생 때도 그랬어요? 그때도 나이 따지고 애들 따지고 선후배 따지고, 그래서 무조건 굽실거려야하는 쪽과 무시해도 되는 쪽을 가리면서 평생 그렇게 살았던 거예요? 그 버릇이란 거 내가 없는지 모르지만, 나이를 먹으나 마나 영원히 마찬가지일 형의 그 버릇은 참 비겁하고 유치하네요.”
“뭐, 인마!”
“용호 말 틀린 거 없는데 뭘. 형은 모든 걸 너무 권력 화하는 경향이 있어. 경험이라는 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사람한테 영향을 미친다는 건 알겠는데, 꼭 시간에 비례해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아. 형은 데리다 형하고 세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데, 생각하는 거 보면 적어도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것 같잖아? 형이 좋아하는 그 나이로 따지자면 말이죠.”
“저거까지 정말?”
“이소라는 가끔 그때 그 일을 생각할까? 그때 흘렸던 눈물 말이야. 그 큰 무대에서 울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마음 말이야.”
“형, 얘 집에 보네. 이건 다들 딴 이야기하는데 왜 자꾸 헛소릴 찍찍 하고 있어? 혼자 헛소리 할 거면 저기 다른 테이블 가 앉아 창밖이나 보고 중얼대던가. 왜 여기에 턱을 들이밀고 꼬박꼬박 듣지도 않는 이야기를 떠벌리는 거냐고! 안성준, 너 저리 안 가!”
“그만해요, 선배. 오늘 잎새 힘들어서 다들 모였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좀 조용히 잎새 이야기를 들어 줍시다, 응?”
“아, 이 자식들이 사람 열 받게 하잖아? 어린 것들이 똘똘 뭉쳐서는 바락바락 대드는 게 얼마나 사람 속을 긁냐고? 이쪽에는 무슨 아래 위도 없어야하는 거야, 뭐야? 저 봐, 저 봐! 저것들 또 한 마디 할 기세잖아?”
“됐어, 그만해! 이제 너희들 또 다시 한 마디 하면, 성준이 쟤가 아니라 너희를 내쫓아버릴 테니까. 알았어?”
“참 내, 내가 저것들 꼴 보기 싫어서 이 모임을 그만두던지 해야지, 원.”
“그래서, 아예 연락을 안 해?”
“아니에요, 하긴 하는데… 서로 그 이야기는 안 하죠. 확실히 좀 서먹해지고 불편해진 것 같고.”
“너는 어떤데? 네 마음은 어떤 거야?”
“난… 좀… 답답해요. 아무리 설명을 하고 또 해도 제대로 설명을 할 수 없단 게…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게 계속 답답해요. 평생 그런 기분을 끌어안고 살았는데,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까지 그런 기분을 느껴야한다는 게…”
“뭐야, 너는 그 남자를 좋아하긴 하는 거야, 뭐야?”
“좋아요, 좋긴 좋은데… 분명히 이전에 만났던 남자들과는 다른 느낌이었고, 온전히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맙고 그랬는데… 그게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뭐야, 안 잤어?”
“형은 꼭 자야 돼요?”
“그럼 자지도 않고 어떻게 사랑이 돼?”
“나… 나는 아직 못 잤다. 그렇지만 분명하다, 사랑!”
“너는 걔가 무성애자라면서… 그거랑 똑같냐?”
“나도 사랑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유진이한테 소개시켜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던 거고.”
“넌 유진이 걔랑 좀 엔간히 붙어 다녀. 아무리 게이하고 트랜스 사이라지만, 너희들 다른 사람들은 다 연인 사이라고 생각할 거 아냐? 같이 잠만 안 잤지, 연인들 하는 거 다 하고 다녔을 거 아니냐고? 너희들 혹시 잠도 잔 거 아냐, 이거?”
“말을 해도 넌…”
“아야야야… 형은 솔직히 쟤네들 수상하지 않아요? 난 수상해. 유진이 그 놈, 이쪽 보통 게이들하고는 좀 달라 보이는 게 사실이거든. 내가 수상하게 느껴질 정돈데, 쟤 남자 친구는 얼마나 속이 썩었겠느냐고?”
“데리다 형, 이소라 노래 틀까?”
“믿어. 그 사람이 흔들린다고 너도 흔들리지 말고. 네 마음이 그렇다면 믿는 거야.”
“이소라 노래 중에도 ‘믿음’이란 노래가 있는데… 그거 틀까?”
“저 자식은 정말? 야, 너 집에 가!”
“그래요, 오랜만에 이소라 목소리 나도 듣고 싶네. 제가 틀까요?”
“그래, 네가 가서 틀어. 엘피 틀 줄 알지? 이소라 3집, 첫 번째 트랙.”
“나는 ‘처음 느낌 그대로’!”
“이것들이 아주 잘들 노네.”
“그래, 나도 갑자기 이소라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에는 정말 잘 어울리지 그 목소리.”
“그럼 오늘은 이소라 앨범들 죽 들으며 와인이나 한 잔 하자.”
“오 예, 와인! 우리 데리다 형 최고!”
“어머머, 나 울어버릴지도 몰라. 그래도 이해해줘, 다들?”
“지랄을 한다, 지랄을.”
김비: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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