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27. 데리다 - 이론, 화행
“영상이요? 정말 괜찮겠어요?”
“응, 행성인에서 이번에 피엘들과 같이 프로그램을 하나 한다고 그래서.”
“행성인? 행성인은 또 뭐야? 외계인, 이방인 뭐 그런 거야?”
“이 자식은 퀴어라는 놈이 그 이름도 모르냐? 헌데, 형 왜 이렇게 용감해 졌어? 오랜만에 애인 생기더니 무서운 게 없어졌어? 앞뒤 분간이 안 돼? 모르는 사람들한테 얼굴 팔리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봤지, 상우 형. 형은 남자인 척 어른인 척 어깨 빳빳하게 세워도, 여기 눈치보고 저기 눈치 보고 가슴팍이 콩알만 하지만, 우리 데리다 형 봐. 이 정도는 돼야 어른이고, 당당함이지.”
“이 자식이 또 슬슬…”
“형, 지난번에도 불 났을 때 쫄려서 이 근처에는 오지도 못했지?”
“야야, 못 온 게 아니라 안 온 거지. 내가 그날 왔다고 날 불이 안 나냐, 꺼질 불이 다시 활활 타냐? 난 다음 날 출근도 해야 하고…”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형은 우리들 중에 제일 공무원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인데, 어쩌다가 공무원이 된 거야?”
“이거, 퀴어라는 자식이 편견 덕지덕지 붙은 소리 하는 것 봐라, 이거?”
“뭐, 나도 사실 쫌… 뭐랄까, 네 개 중에 답 하나 고르라고 하면, 상우 선배는 시험의 당위성을 따지며 시험지 북북 찢고 나갈 스타일이긴 하지. 허허허.”
“이거 다들 왜 이러셔? 이제 현아 너까지 날 갈구는데 끼어든 거냐? 나는 뭐 이쪽에서 나름 보이지 않게 내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을 것 같애?”
“뭐, 무슨 일? 네가 무슨 일을 하는데?”
“형이 동성커플 혼인 신고서에 몰래 확인 도장을 찍어줄 것도 아니고… 형이 뭘 할 수 있는데?”
“……”
“어? 이 형 왜 말이 없어? 그 표정, 그거 뭐야?”
“너 뭐야, 정말 무슨 짓을 하고 있긴 한 거냐?”
“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게 다 이 나라와, 이 국가와, 이 사회를 위한 공무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나는 믿어요. 아마 나 같은 생각 가진 공무 직에 있는 퀴어들 적지 않을 걸? 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거지, 깃발 들고 대로변에 뛰어든 사람만이 운동을 하는 건 아니라 이 말씀이야. 시민운동 몰라, 시민운동? 다 같은 델 보고, 같이 가고 있는 거지.”
“히야… 저 형, 이상해? 저 형한테 이런 감정이 느껴지리라곤 정말…”
“올… 상우 선배, 쫌 멋지네? 허허허.”
“그나저나 아무리 그래도 형은 얼굴 드러내고 영상까지 나가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가뜩이나 이 동네에 알려진 것도 부담스러울 텐데…”
“뭐 좋게 생각하면, 더 좋아질 수도 있지 뭘. 꼭 나빠진다는 법이 있냐?”
“응, 나도 상우 말마따나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이미 내 주위에서 알 사람은 알고 있고… 운동가나 연예인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 얼마든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있으니까.”
“그래도 그런 일도 있고… 또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겐 공허한 소리에 불과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지.”
“나 한테는 꽁꽁 숨기고 살아야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더 공허했는걸? 뭐 꼭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스스로에게만큼은 그 비슷한 게 있어야할 것 같긴 해. 나에게 문제가 없고, 내 삶에도 당연히 문제가 없어야한다는 그 생각을 지키는 방식이라면, 뭐라도 난 오케이.”
“형, 애인도 오케이 했어?”
“응, 다행히. 오히려 그 친구 덕분에 더 확신을 얻었다고나 할까?”
“형… 그거… 그러니까… 그거 말이야…”
“야야야, 부르려면 제대로 불러. 더듬지 말고.”
“어어… 그러니까, 그거… 결핍증…”
“어, 그 말 좋네! 나도 애정 결핍증인데… 그걸로 합시다, 우리. 결핍증!”
“난, 스킨십 결핍증.”
“형은 인정머리 결핍증.”
“그럼 넌 존경머리 결핍증이냐?”
“누나는 애인 결핍증? 얼마 전에 헤어졌…”
“어허?”
“야야야, 너 선 넘는다?”
“엇… 혹시 그랬다면… 쏘리 누나.”
“그래서요, 애인은 괜찮은 거예요?”
“응, 그때 기억나니? 우리 그 사람 처음 만났던 날… 그거… 다들 같이 있는 자리에, 자기 손수건에 싸서 건네주던 거… 그거 내가 먹는 약들이었거든.”
“어? 그래?”
“그 사람은 그게 그 약인지 어떻게 알았대?”
“……”
“왜, 나 또 선 넘은 거야, 그렇구나? 아… 나 어떡하냐.”
“훗… 아냐, 그런 거. 아직은 안 물어봤어. 알게 되겠지, 언젠가. 몰라도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필요한 때가 되면 그 친구가 먼저 왜 묻지 않느냐고 물을 때가 있겠지. 나도 말해줬으니까, 그 친구도 우리 관계에 그걸 아는 게 필요하다면 말하겠지. 어쨌든 기다려주려고. 뭐가 됐든, 지금은 나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요, 선배. 우린 좀 다른 꿈을 꿔봅시다. 다른 방식으로 해보고, 다르게 느껴보자고요. 어쨌거나, 진짜 진짜 좋겠수? 허허허. 나도 우리 우경이 보고 싶네.”
“민수는 어떡할 거야? 이제 계속 안 나온데?”
“아냐, 나하고 톡은 계속해.”
“우와, 그래? 그래… 우리 그런 걸로 이 모임 깨트리지 말자. 제발!”
“일단 그 친구랑 셋이서 좀 만나보려고. 그 친구도 민수 좋아할 거야. 아마 둘이서 나 씹느라고 정신없을 수도 있을 걸?”
“그래, 용호도 혹시 집에서 쫓겨난 거면, 여기 와서 살라고 하고. 아니다, 내가 방 한 칸 내 줄 수는 있겠다. 게이랑 같이 사는 건 또 처음이겠네. 허허허.”
“그래, 깨트리지 말자, 우리.”
“맞아, 책은 안 읽는 문학 모임이지만, 그래도 깨지지 말자.”
“어, 다음 책… 내가 정했는데?”
“뭐? 형은 가게 불나고 연애 하느라 정신도 없으면서, 모임에서 할 책까지 봐 뒀어?”
“하여간… 지독하다, 지독해!”
“그래, 저 정신이면 칠십이 아니라 팔십 구십까지 살겠네. 허허허.”
“그럼… 그래볼까? 이십칠 년 말고, 사십칠 년 정도?”
“어어… 저 형 왜 저렇게 귀여운 척을…”
“형, 이러지 마!”
“형, 그건 내 컨셉이야, 내 거!”
“연애가 확실히 인간을 개조하긴 하네, 정말! 허허허!”
김비: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
'무지개문화읽기 > [김비 장편소설 연재]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29. 에필로그 - 행위, 문학의 (0) | 2015.07.20 |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28. 새, 산 - 찾아서, 대리 보충을 (0) | 2015.07.08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26. 산 - 그리워하다, 사랑하다 (0) | 2015.06.19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25. 새 - 적의(敵意), 여기 (0) | 2015.06.10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24. 산 - 자유로운, 부유(浮游)하는 (0) | 2015.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