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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김비 장편소설 연재]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28. 새, 산 - 찾아서, 대리 보충을

by 행성인 2015. 7. 8.

長篇小說

金 飛

 

 

28. 새, - 찾아서, 대리 보충을



 소설을 쓰는 사람이고 싶던 때가 있었다. 아니 소설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들은 모두 별이 된다는 유치한 문장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득히 어딘가에서 자기만의 광량으로 빛나는 미약하지만 끈질긴 존재가 되고 싶다는 믿음 말이다. 사실은 빛이 아니어도 좋고, 하루 온 종일 빛나던 순간이었는데 빛일 리 없다고 해도 좋고, 보이지도 않는 그 빛이 어떻게 빛일 수가 있느냐고 어쩔 수 없는 불가능이어도 괜찮은 그 빛 말이다

 말을 잃어도 우리의 말이 있고, 언어를 잃어도 우리의 언어가 있듯이, 빛을 잃더라도 우리의 빛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그 확신. 아마도 나는 그 확신을 제대로 적기에 소설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내 소설을 쓰지 못했던 것은 쓰는 사람이 되지 않고, 소설만 쓰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되어야할 것은 따로 있는데, 그 확신이 필요하니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지도

 소설이 아니더라도 쓰지 못하는 나를, 나는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거짓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보다 더 온전한 확신을 딛고 일어서야한다는 걸 나는 몰랐다. 소설을 쓰기 위해, 쓰는 몸이 되어야한다는 걸 몰랐다. 아니, 된다는 말도 틀렸다. 내 안에서 소설을 발견하고, 소설을 찾고, 소설로 울고, 소설로 뛰고, 소설로 돌아오고, 소설로 도망치는 소설을, 아니 그런 몸을. 소설이 아니라, 쓰는 나를 먼저 찾아야했던 건지도 몰랐다. 거기 점 하나도 아닌 찰나의 빛으로, 수억 년의 시간은 가뿐히 뛰어넘어 여전히 누군가는 믿지 않아도 괜찮은, 쏘아진 것, 쓰인 것에 불과할 나를

 

 “보고 싶지는 않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누나 말이야, 그 사람보고 싶진 않냐고.” 

 

 ‘보고 싶다는 언어는 어떤 빛을 대신한 걸까. 내 안에 그 빛은 있었나

 

 “글쎄.” 

 “보고 싶든 보고 싶지 않든 상관없지 뭐.” 

 “유진이 너는 어떤대? 너는 옛날에 만났던 사람들이 갑자기 그리워질 때가 있니?” 

 “생각나기는 하지. 근데 그게 단순한 생각인지 그리움이라고 말해야하는 건지아니면 다시 또 호르몬의 장난질에 놀아나는 일인지그게 확실치가 않지.” 

 

 보이지 않는 빛을 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그는 뿌연 하늘을 잠깐 올려봤다

 

 “사랑이없어.” 

 

 도로를 가득 매운 사람들 사이를 걷다가,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점점 사랑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두려워. 겁에 질리고 나니까, 그 옛날 그것도 사랑이란 게 맞나사랑이었나의심스럽고그러니까 더 두려워지고, 겁에 질리고.” 

 

 ‘너도?’라고 묻고 싶은 사람처럼 나는 겁에 질린 그를 봤다

 

 “뭐가 됐든 간에좀 쪽 팔려. 사랑은 개뿔, 그거 없어도 살지 뭐 그랬다가, 기분이 더러워져. 사랑이 있다고 말할 때보다 훨씬 더 기분이 더러워져서, 내 꼴이 우습고, 겨우 이 따위인 내가 쪽 팔려 미치겠고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모르겠다는 말만 늘어가는 것도 쪽 팔리고… ‘근사하게는 개뿔더러워진 꼴을 추스르며 살아야할 것 같으니까, 지랄만 더 느는 것 같고.” 

 “결핍증인가 보네.” 

 “? 그게 무슨 말이야.” 

 “뭔지 모르지만너나 나나 다 결핍증에 걸린 모양이라고. 그러니까 그나마 결핍되지 않은 거라도 잘 지키면서 살아보자. 더 잃어버리거나 놓치지 않게.” 

 

 하늘을 보지 않고, 한 낮인 지금엔 빛이 아닌 그 빛을 보지 않고, 그는 나를 봤다. 왜 내가 결핍증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그는 고개를 까딱 했고, 우린 다시 인사동 쪽으로 나란히 걸었다



 새로 만든 데리다 카페 입구는 시위라도 하듯 투명한 통창이었다. 사장인 데리다 오빠는 이제 벽 여기저기에 마음대로 색색 깔의 것들을 걸었다. 복사본이긴 하지만, 여러 개의 동그란 무지개가 각자의 칸에 담긴 칸딘스키 그림이며 여러 색이 겹쳐진 쿠션이며 테이블 위에 장식품까지, 모두 무지개 색이었고 또한 더 많은 빛깔을 품은 무지갯빛이었다. 나는 그 무지갯빛들 사이에 지금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빛들이 더해진 것만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보는 일, 거기에 그 빛이 있다고 믿는 일, 그게 결국 쓰는 사람의 일일까

 나는 분위기가 확 바뀐 데리다 카페를 들어서면서 이제 항상 쓰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그냥 좋은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골목이 내다보이는 바깥 쪽 창에 혼자 앉아 수첩에 이것저것 그리고 적었다. 빛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아직 빛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놀이터의 녹슨 그네 끄트머리가 보이는 쪽에 서 있는 그 사람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그리던 것이 실제로 현현한 줄 알았다. 나른한 햇살 덕에 잠시 잠에 빠졌거나, 보이지 않는 빛을 보겠다고 대낮의 하늘을 너무 오래 올려다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거짓이거나 보이지 않는 빛이거나 그 형상이 내 쪽으로 걸어왔을 때, 나도 모르게 내 몸은 천천히 일어났다. 데리다 오빠가 또 밖에 사고가 났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데리다 오빠와 어색하고 낯선 인사를 까딱하고 말았을 때, 아무거나 그리고 썼던 내 수첩 앞에 앉았을 때까지, 나는 이 기분 좋은 거짓이 오래간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쪽 다리를 테이블 아래로 끼워 넣지 못하고 통로에 편 채로 어루만졌을 때, 그제야 꿈처럼 흐르던 그 시간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는 일을 하다가 좀 다쳤다고 했고,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럼 이제 진짜 자기 글 쓰는 거예요?” 

 “, 아니에요. 그냥이것저것 막 끼적이는 거예요. 여기 많이 달라졌죠?” 

 “그러게요. 인테리어를 새로 하셨나봐요. 훨씬 밝고 좋으네요. 밖에도 보이고.” 

 “우리 이야기 소설로 써도 돼요?” 

 “뭘요?” 

 “그냥우리 만났던 얘기, 있었던 얘기여기에서 사람들 만난 얘기내 얘기뭐 그런 얘기요.” 

 “아 그건 쫌…” 

 “왜요, 싫어요? 실명은 공개하지 않을 게요.” 

 “그럼… ‘라고 해주세요.” 

 “‘? 하늘 나는 그 새요?” 

 “, 그 새요.다른 새아니고요.”

 “……” 

 “……”  

 “그럼 난 이라고 해야지.” 

 “산이요? 산이 왜요?” 

 “그냥 자기가 라고 하니까 난 이 생각났어요.”  

 “네 그래요, 그럼. 산에는 새가 있고, 새는 산에 살고, 그러니까요.”

 “난 그거 아닌데?” 

 “뭐가요?” 

 “산 사람’ ‘산 몸’ ‘산 세월’ ‘산 주민’ ‘살아있다의 그 인데…” 

 “하하그래요? 그럼 나도 는 그 새 아니고, ‘새 신발’ ‘새 옷’ ‘새 집’ ‘새 마음할 때의 그 로 할게요.” 

 

 우린 조금 큰 소리로 웃었고, 무심한 척하던 선한 얼굴의 사장님은 놀란 눈으로 우리를 보지 않은 척 보았다. 그 사람이 한 말 중에 나는 산 몸이란 말이 좋았다. 내가 한 말 중에는 새 마음이란 말이 그 사람에게 가 닿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수첩 사이에 펜을 끼워 놓고, 옆으로 밀어 놓고, 우린 서로 만나지 못한 사이, 서로에게 일어난 일들에 관해 말했다. 다쳤던 직장에 다시 되돌아가 일하기로 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서, 그녀는 좀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다치고 났으니 이제 다시는 그럴 일 없다고, 그러니 거기가 나에겐 가장 안전한 자리라는 걸 이제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은 안도하는 것처럼 천천히 몇 번 숨을 내쉬며 까딱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에도 별이 뜨는 줄 몰랐는데, 그 사람이 가리킨 곳에 반짝이는 점 하나가 보인 것 같았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고, 우리는 보일락 말락 너무 흐릿한 그 점에 관해 또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사람은 이것도 소설에 넣어야겠다며 수첩을 들어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무언지 모르지만 산 몸에 관한 것이고, ‘새 마음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라 확신했다

 다시 돌아와 만나기로 결정한 건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불안만 떠돌던 주기가 지나가고,이제는 어떤 삶의 주기가 시작된 걸까? 나는 까마득히 먼 곳에서 지긋지긋하게 오랫동안 달려왔을 그 빛의 질주를 생각했다. 마침내 우리들 곁에 반짝거리며 도착한, 그 거짓, 없음, 부재를.  

 

 

 

김비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