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3. 산 - 임브레이스, 브로큰
치유는 가능할까. 시간이란 그토록 힘 센 걸까. 목숨을 버릴 만큼 절박했던 감정마저 아무렇지 않게 되어버릴까, 미완의 시간을 내려놓을 만큼 우리는 강해질 수 있을까. 레나라는 주인공 여자를 둘러싼 감정들을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슬픔이나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의심이 먼저였다.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아득한 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 남자 주인공의 눈물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아서. 아니다, 어쩌면 부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그 긴 시간 뒤에 다가올 ‘포옹’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기꺼이 ‘부서질 수 있는’ 그들의 투신이 부러워서.
“감독 얘기네요, 그죠?”
영화 안내문을 들여다봤다. 어디에도 자전적 이야기라는 설명은 없었다. 스페인의 섬 란타로사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이 영화가 시작되었다는 해설이 있긴 했다. 절벽 위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한 사람, 그의 뒤에서 매달리듯 포옹한 또 한 사람.
“그럴까요?”
“창작자라는 건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아무리 다른 얘기를 하려고 해도 결국 묻어나겠죠.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거짓말일 수밖에 없어요. 자기 안에서 나왔는데, 자기가 아니라니.”
그녀의 두 볼이 짧게 달아올랐다가 식었다. 짧은 커트 머리,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를 걸치고서 짧은 회색 재킷 차림이었다. 그녀의 겉모습은 남자인 내겐 익숙한 것이어서 낯선 지도 몰랐다. 감정적이고 정돈되지 않은 그녀의 자서전을 읽은 건 작년 가을이었다. 그녀의 블로그에 글을 남겼던 이유는 그녀가 추구하는 모호한 삶에 대한 응원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호기심도 더해졌을 것이었다.
“이건 뭐 대놓고 영화감독에 정부에… 등장인물들이 다 그렇잖아요?”
그러나 그때의 그 호기심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만큼 갑작스런 만남이었으니, 허름한 관심조차 없던 게 사실이었다. 그저 같이 앉아 같은 영화를 보았는데, 서로 다른 영화를 보았나 싶은 기분이 낯설었다. 나는 아팠는데, 그녀는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마찬가지였을까? 나는 아파할 필요가 없던 것에 그녀가 그토록 오래 아파했었다는 사실은.
“어, 비 오네? 우산 가져왔어요?”
“예? 예.”
가방 속에서 나는 여러 번 접힌 우산을 꺼내 펼쳤다. 내가 챙기지 않고 엄마가 챙긴 우산이었다.
“같이 써요.”
대답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이 내 팔꿈치 아래로 파고 들었다. 무기력하게 늘어졌을 내 팔뚝이 순식간에 단단해졌다. 그녀의 체온을 겨드랑이 아래 끼우고 빗속으로 걷는데, 몸이 더워졌다. 처음인가, 그런가? 까마득한 기억 속 어디에도 그런 시간을 찾을 수 없어, 그렇구나 알게 될수록 자꾸 더워졌다. 축축한 습기가 파편처럼 온 몸에 들러붙었는데, 그녀와 내가 나란히 선 우산 아래만 열대였다. 온통 깜깜한 밤인데, 눈앞만 환해진 이상한 밤이었다. 고독하다는 말 때문이었다. 기억났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고독과 다른 고독을 가진 채 살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세상이나 타인으로 인해 고독해지는데,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고독해진다고. 맞다, 그 때문이었다. 숨어들었던 책 한 권에서 작가의 블로그 주소까지 찾아가 글을 남겼던 이유는.
“책을 많이 읽으시나 봐요?”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나도 그런데.”
“네?”
“번역 원고는 먹고 살아야하니까 억지로 읽는 거고요. 그거 말고는 딱히… 가뜩이나 우울한데 더 우울해지는 책들은 읽기 싫고, 잘난 척하는 책들은 더 싫고…”
그녀의 대답은 거짓말 같았다. 있지도 않은 어린 시절에 관해 말하며 가짜 공감을 만들어냈던 몇몇 가짜 상담가들처럼.
“번역도 하세요?”
“종교 관련 서적들인데… 희망이니 평화니 구원이니, 머리 위에서만 찾는 그런 이야기 재미없어요.”
희망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처음인가, 그런가? 다시 몸이 데워지는 것 같아 커피 잔을 들었다. 차디 찬 커피가 손 안에서 너무 뜨거웠다.
“서울에는 자주 오셔요?”
“아뇨, 책모임 때 가끔요.”
“저는 되게 날카롭고 그런 분인 줄 알았어요.” “제가요?”
“블로그에 올리신 글 보면요. 글에서도 인상이라는 게 있잖아요? 사람에게 풍기는 그런 느낌처럼요. 그래서 조금은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분인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거하고는 많이 다르네요.”
느낌이라는 말은 언제나 두려웠다. 예감이나 기대도 마찬가지다. 내가 미처 준비하거나 가늠할 수도 없는 사이, 누군가에 의해 정리되고 줄 세워지고 결론 나버리는 그런 마음들.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투명한 커피 잔에 시커먼 속을 들여다봤다.
“저는 어떤가요?”
“예?”
“저 같은 사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일 거 아녜요, 그죠?”
그녀의 책 속에서 읽었던 ‘우리 같은 것들’이란 자조적인 어투가 생각났다. 타인에게 먼저 경계를 지워 선을 긋는 그녀의 문장이 나는 좀 불편했다.
“예, 그렇죠.”
“다른 애들은 안 그래요. 다른 애들은 예쁜 애들도 많고, 티 안 나는 애들도 많고…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말도 이해는 가지만, 그거 우리한테는 중요하긴 하거든요.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거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요. 뭐… 다들 어느 정도 선입견이 있긴 하겠지만.”
그러나 그건 사람들의 선입견이기도 할 테고, 그녀 자신의 선입견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고 싶어 하면서 말하지 않으려는 언어, 드러내며 오히려 감추고 싶어 하는 욕망.
“저는 뭐 딴 수술은 안 했고 옷도 그냥 예전에 수술하기 전에 입던 거 입고 다니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무슨 트랜스가 그러냐고 욕먹기도 하고… 흐흐… 트랜스계의 왕따죠, 왕따. 흐흐흐.”
가장 더럽고 축축한 어둠 속에 스스로를 흠뻑 담가 그녀가 얻는 건 뭘까. 나는 다르다, 그거 아니다, 입 조심해라, 어차피 너흰 모른다,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고서 고독을 견딜 수 없다고 손을 들 때, 그녀가 기대하고 바라는 상대의 태도는 어떤 걸까. 말하고 싶어 하면서 말하지 않으려하고, 드러내면서 오히려 감추고 싶어 하는 그녀의 반어(反語). 모두가 갇혔다고 믿으면서 스스로를 가둔, 그 무엇보다 유해한 피해자의 선입견.
“손이 참 크시네요?”
“예?”
“나도 남자 태생이라 손이 엄청 크거든요. 우와… 정말 크네요, 손!”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커피 잔을 쥔 것도 아닌데, 크기를 재는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내 손이 자꾸 뜨거워졌다. 이제 식어야하는데, 식지 않았다. 그녀의 냉기도 내 열기도 맞닿았으니 식어야 하는 게 맞는데, 각자의 온도로 더욱 치솟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은 더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내 손은 불처럼 뜨거워졌다. 그래서였을까, 더 오래 서로의 손을 잡고 있어야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카페를 나와 나는 그녀를 정류장까지 바래다주었다. 이제 내 두 손엔 훨씬 더 뜨거워진 온기가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가을 날씨는 부쩍 쌀쌀해 졌는데, 그녀는 새빨갛게 얼어가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도 않고 꼭 쥔 채였다. 그러고 보니 구겨진 회색 재킷에는 스티커 같은 주머니가 가슴팍에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끌어 잡았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얼음이 있다면, 그래서 그 얼음은 투명하거나 새하얗지 않고 빨갛게 언다면, 그녀의 손이 지금 그 얼음처럼 빨갰다. 나는 더 힘 있게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걱정하거나 망설이진 않았다. 그 사람은 너무 차가웠고, 나는 너무 뜨거웠을 뿐이었다.
그녀가 나를 올려봤다. 손을 빼지는 않았다. 불쑥 용기가 생겼다. 일요일 저녁 서울 종로는 오지 않은 피로를 견디느라 절망이 극에 달한 얼굴들뿐이었는데, 우산도 없이 우리 둘만 서로에게 맞닿아 안심이었다. 나는 그녀가 타야할 버스 정류장에 다다를 때까지 한 번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둘만의 ‘포옹’이었는지 모르지만, ‘부서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김비: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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