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16. 데리다 - 디페랑스, 세상에 없는
"뭐야, 이 분위기? 다들 왜 이래, 재미없게?"
"조용히 있어, 너는. 그래도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평소처럼 끼 떨고 그러는 모습 보이고 싶냐? 오늘은 좀 점잖게 잠자코 있어."
"어머머, 이 언니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땍땍하게 굴어? 그런다고 언니의 기갈이 감춰질 수 있을 것 같애? 그런다고 감춰질 거였으면 언니가 이 바닥에 이렇게 오픈해서 나올 수 있었겠어? 일반들 사이에서 포비아인 척하며 살지. 형 외모만 보면 완전 성질 더러운 포비아같애, 그거 알아?"
"이게 정말? 오늘은 쫌 그만하자, 응? 새로 오셨잖아, 새로! 그러니까 우리 모임을 위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좀 그렇잖니, 안 그러냐?"
"아야야, 왜 발을 밟아? 씨, 우리 원래 이렇게 안 조용해요. 만나기만 하면 수다에 싸움에 정신이 없는데, 오늘은 그 쪽 온다고 해서 다들 이렇게 점잔 떨고 앉아있는 거라고요, 이런 모습 앞으로는 전혀 없을 거예요. 아야야!"
"못산다, 정말. 내가 말했죠? 우리 모임 사람들 정말 특이해요. 다 다르기도 하고. 어쩌면 이렇게 다들 다른지, 근데 뭐… 그냥 보면 다 똑같지 뭐.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걸 다르다고 말하는 건 우스울 것 같기도 해, 그치? 누구에게 끌리든 누구와 잠자리를 하든 도대체 그게 왜 중요해야하는 건데, 안 그래요?"
"맞아, 맞아. 그거야 개인의 몫이지, 그 혼란이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누군가의 위로와 지지가 필요하다면 그걸 기꺼이 내줄 수 있는 게, 이 사회와 주변 사람들의 몫일 테고."
"그걸 누가 모르나요?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잘라내듯이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지요."
"그래, 너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겠지. 근데 그게 자랑은 아니지. 정체성이라는 게 뭐냐? 나를 표현하는 거잖아? 나를 알아야 나를 지킬 수가 있는 거고, 정체성이 없다는 건 어째 용기가 없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냐?"
"왜 정체성이 없어요? 나는 그 누구보다 내 정체성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모르는 걸 아는 게 확신이라고? 모르는 것과,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과연 차이가 있기는 한 거냐?"
"상우야, 그만하자. 오늘까지 그럴래? 미안합니다. 우리들이 원래 이래요. 서로 개성들이 워낙 강해서."
"아닙니다, 저도 많이 긴장을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잎새 씨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저 누나 또 우리들에 대해서 얼마나 씹었을까? 그치, 우리들 이야기 막 하면서 씹고 그랬던 거지?"
"하여간 저 피해의식… 그러니까 네가 매번 그런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너는 처음부터 무언가를 너 스스로 만들고 쌓아가는 주체적인 자아의식이 부족하니, 그렇게 기존의 권위를 찾아 돌아다니기만 하는 거야. 실은 그저 가볍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하면서도, 또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볍게 보이는 게 싫으니 거기에 집착하고 매달리면서 스스로의 피해의식을 보상받고 있는 거지."
"그러는 형은,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고 키 백 팔 십이 넘는 아이들만 건드리면서 자기가 지키려는 보상심리가 뭔데?"
"그건 보상 심리가 아니라 피 가학적 욕망 같은 걸 거예요. 자기가 어떤 것에 지배당했던 고통을 알고 있는 피해자이면서도, 반대로 고스란히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가해자의 역할을 하려는 그런 욕망이요."
"어쭈? 그래, 넌 그새 철학책 좀 들여다봤냐? 데리다 형이 철학에 관심이 있다니까, 데리다 형 눈에 들려고 그 동안 철학 공부 좀 하셨어?"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만 좀 하자, 제발. 새로운 사람 데리고 온 내가 다 창피해지네, 정말."
"그래, 잎새 말이 맞아. 정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나중에 철학책 하나 골라서 같이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정식으로 만들어보던가. 어쨌거나 반가워요, 나는 송현아예요. 환영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근데 형은 취향이 어떻게 되요?"
"예?"
"성적 취향이요, 성 정체성이요. 바이섹슈얼이세요?"
"그게… 뭐죠?"
"양성애자요. 동성도, 이성도 다 끌리는… 그러니까 잎새 누나를 좋아할 수 있게 된 거 아닌가요?"
"뭐야, 인마? 너 바이섹슈얼을 그런 뜻으로 알고 있는 거야?"
"그럼 아니에요?"
"맞지, 맞기는 한데… 트랜스젠더를 좋아한다고 바이섹슈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지. 엠 투 에프 트랜스젠더에게 사랑을 느끼는 남자라면, 오히려 그건 이성애자에 가깝겠지."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요? 양성애자가 트랜스젠더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양성애자는 남자도 여자도 다 좋아할 수 있으니까 트랜스젠더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기는 한데… 꼭 그렇지는 않다는 말이지."
"내 생각에는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은데요? 양성애자라면요, 아무래도 트랜스젠더들은 양성적인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는 존재이니만큼, 양성애자들에게는 그만큼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트랜스젠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러버라고 하지 않냐? 트랜스 러버, 뭐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던데?"
"그렇죠, 트랜스젠더들 모임에서는 그렇게 불러요. 특히 엠 투 에프 트랜스젠더들에게 껄떡대는 남자들을 그렇게 부르죠. 에프 투 엠 트랜스젠더들에게 호감을 느끼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트랜스 러버라고 잘 부르지는 않던데… 뭐,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 말에는 이상한 뉘앙스가 있어요. 별로 좋지 않은 그런 거요."
"용호 너는 어때? 너는 바이섹슈얼이니까 트랜스젠더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냐?"
"난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뭐 상관은 없겠지만, 꼭 그래서 끌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바이섹슈얼이라고 하면서도 의미적으로 완벽하게 딱 떨어지는 양성애자는 아니고, 트랜스젠더 러버라고 하면서도 그러한 정의 너머 어딘가에 다다르는 또 다른 의미를 갖기도 하고…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사랑의 참된 의미를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오로지 종족 번식을 위한 사랑만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며 그렇지 않은 모든 다른 감정들은 더러운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일이라니… 참!"
"그래서인 것 같지는 않아요."
"뭐가요?"
"제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낀 거요. 이 사람이 여자라거나 남자라거나… 혹은 트랜스젠더라거나 동성애자라거나 뭐 그런 걸 생각하면서 사랑을 하게 되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 거죠?"
"그럼 형은 그 감정에 불편함이나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잎새 누나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 거에 대해서 어색하다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뭘 그렇게 빤히 봐요, 자꾸 그렇게 보지 말아요."
"글쎄…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냥 손을 잡고 싶었고, 손을 잡고 나니 안고 싶었고, 그래서 입 맞추고 안아주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니 이 사람의 곁에 오래도록 있고 싶다, 이 사람이 없는 시간은 너무 힘겹고 공허할 것 같다, 그런 깨달음을 얻었고, 그래서 당연히 그 감정을 소중히 간직하고 이 사람을 내 삶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다 하는 생각을 느꼈던 것 같고요."
"그럼, 형의 사랑은 무어라고 불러야 하나? 동성애는 분명히 아닌 거고, 이성애라고 하기에는 누나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조금 걸리고, 그렇다고 트랜스 러버라고 하기에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와는 다른 지점인 건 같고… 데리다 형, 형이라면 그걸 뭐라고 불러야할 것 같아요?"
"사랑이지."
"예?"
"그냥… 사랑인 거지, 그건."
김비: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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