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잎새 - 달라지는 것들,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나면, 잠시 세상이 정지한다.

  바쁘고 분주하게 머릿속을 떠다니던 것들이 순간 어디론가 증발해버리고 만다. 오직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 하나만, 그 말 한마디만 등대처럼 명멸한다.
  언제나 그건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다. 가족이나 형제, 혹은 친구들의 이름 뒤에 붙이는 사랑 따위도 꺼내어본 적 없어, 내가 아는 언어 속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TV 속에서, 책 속에서 사랑을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 반짝거리고 예쁘기만 해서 누구도 만지지 못하도록 유리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한 번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안기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사랑의 몸집을 끌어안은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생전 처음 사랑의 결을 만져보는 것 같아서.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을 두 손에 담아보는 일은, 물 위에 비친 하늘 속 별을 건지겠다고 손을 담갔다가 따끔거리며 딸려 나온 별 하나를 보는 듯 놀랍고 경이로웠다.
  이제 나는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며 살고 있다. 그것이 보여준 행위 수행적 힘이 너무도 놀라와 나는 가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이 낯설어진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던 말들,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던 박재된 언어들.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나는 요즘 '사랑'이라는 말을 여러 번 쓰고 중얼거리며 사랑을 배워가고 있다. 사랑. 사, 랑. 사아 랑. 사아 라아앙.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나는, 웃고 있었다.


  "그거 알아? 얼굴 표정도 달라졌어."
  "무슨? 말도 안 돼!"
  과장되게 손을 휘젓고 있었지만, 나조차도 달아오르는 내 얼굴이 느껴졌다.
  "말이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누나 정말 달라졌다니깐? 뭐랄까… 편안해졌어. 예뻐진 건 아니니까 김칫국 마시지 말고. 헤헤."
  "이게?"
  몽둥이처럼 생긴 샌드위치를 들어 올리다가 안에 들었던 야채들이 후드득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새로 산 흰색 티셔츠에 얼룩이 지고 말았는데도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유, 내가 정말 못산다, 못살아!"
  "그 봐, 벌 받았다. 헤헤!"
  함께 웃고 있는 우리들 모습이 유리창에 비추었다. 웃는 나 때문에 따라 웃고 있는 유진을 보니, 그렇게 환한 모습의 그도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뭐야, 닭살 돋게!"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그가 몸서리를 쳤다.
  "그냥… 한 번도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너한테는 언제나 갚지 못한 빚 같은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줄 알면서도 고맙다는 이야기 한 번 제대로 해 준 적 없는 것 같아서."
  "이 여자가 왜 이래? 왜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고 이래?"
  "그렇지? 생전 안 하던 짓이지?"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투쟁하듯 살아야했던 것이 나의 삶이었다. 단 한 시도 쉬지 않고 세상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내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믿었다.
  "근데… 이렇게 되네.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나를 이렇게 바꿔버렸어. 나도 모르게… 단단하게 조여 있던 어딘가가 풀려버린 느낌이기도 하고. 모르겠다, 어쨌든 이상해. 아니, 신기해."
  "좋네, 사랑이라는 거… 정말 좋은 거기는 하네. 그런 누나 모습 보니까 내가 했었던 게 사랑이었나 싶기도 하고. 뭐… 기분이 좋은 듯 나쁜 듯, 이상하게 복잡하네."
  어느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 그의 눈빛이 자꾸 어두워졌다.
  "너는 그래도 그 동안 연애 몇 번 했잖아, 그러니까 너는 이미 여러 번 이렇게 변해왔던 건지도 모르지."
  "글쎄… 잘 모르겠다. 분명히 그 땐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자꾸 다른 모양이 되더라? 그 때에는 분명히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납작하고 미끄덩거리기만 해."
  갑자기 미안해졌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한다는 게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넌 왜 연애 안 해? 좀 찾으러 다니고 그래. 이태원에 게이 바에도 나가보고, 모임도 나가고."
  대답도 하지 않고 그는 힘없이 웃어버렸다.
  "귀찮아, 귀찮아져버렸어."
  "뭐야, 사랑이 귀찮으면 어떡해? 싫은 것도 아니고… 너 정도면 웬만한 게이들도 침을 질질 흘릴 텐데."
  "그렇지? 내가 좀 괜찮기는 하지? 헤헤."
  손으로 알 주먹을 만들어 그의 팔뚝을 퍽 쳤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그는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 쳐다보게 만드는 반듯한 매력을 지녔다. 그와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더욱 더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을 일이었다.
  "근데 왜 그러냐? 적극적으로 좀 찾아다녀, 적극적으로!"
  "모르겠다, 그냥 이상해. 그런 마음 알지 모르겠는데… 정말 간절히 외로운 것 같은데 누군가를 만나기는 싫고, 여기가 싸 하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걸 하면 좀 나을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바라는 것이 정말 사랑이 맞는 걸까 싶기도 하고."
  그는 그렇게 말해놓고 오래도록 자신의 심장 근처를 어루만졌다.
  "이성애자들도 마찬가지일까? 이런 기분 말이야.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은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야.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사랑에는 없는 느낌말이야."
  다를 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이나 2세의 생산이 목적이 아니라면,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다. 그것에 테두리를 만들거나 선을 긋는 일은 어떤 목적을 가진 생존 전략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 것일 뿐, 그것이 사랑은 아닐 것이다. 사랑은, 그저 사랑이다.
  "그거하고는 상관없을 거야, 그건. 그게 만약 그런 것과 상관이 있었다면 이성애자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모두 진짜 사랑이어야 하는데, 아닌 경우도 무수히 많잖아? 그러니까 그건 이성애자니 동성애자니 그렇게 나누어야할 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나누어야할 거야. 나누어야한다면 말이야. 동성애나 이성애가 아니라, 진성애와 가성애, 뭐 그런 거? 풋!"
  유진이 무표정하게 내 어깨 너머 어딘가를 봤다. 의미 없이 떠벌리는 내 이야기에 웃어줄 만도 한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표정이 지워졌다.
  그가 떠올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가 바라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그와 사랑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자연스레 알게 되는, 어떤 조우일 것이다. 당연히 그 사람의 성별이나 나이 따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어떻게 말해도 여전히 똑같고 조금도 다를 필요가 없는. 그래, 그건 사랑이다.

  "뭐해요?"
  "번역 작업이요. 다음 달이 마감인데 너무 손을 놓고 있었더니 머리가 안 돌아가요."
  흙냄새가 나는 오래된 책은 나른하고 포근한 일상의 묘사뿐이었다. 미국의 어느 목사가 에세이 형식으로 썼다는 그것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잔잔한 일상 속 신의 손길을 깨우치는 걸작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심심하고 재미없는 먹고사는 일에 불과했다.
  "돈은 많이 받아요?"
  "원고지 한 장 당 삼천 원 정도? 그 정도면 많이 받는 거죠. 처음 일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것도 못 받아요."
  어느 문장 끝에 매달린 'two back in a growing line'이라는 표현에서 나는 꽉 막혀 있었다. 분명히 주인공이 차를 몰고 가는 도중에 신호를 기다리며 차 안에 앉아있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중간에 불쑥 드러난 그 표현은 너무 모호했다.
  "자기도 자기 이름 걸고 글 같은 걸 써보지 그래요? 자서전 같은 거 말고요."
  '자서전 같은 거 말고요.'라는 그의 말이 아팠다. 토해놓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듯했다. 한 권의 책으로 손에 잡힌 시간들을 들여다보면서 나조차도 마음이 답답했었다. 지나간 시간이란 나에겐 그런 것이었다. 결코 말짱한 모습으로 기분 좋게 건져질 수 없는.
  "번역하는 사람들이나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런 일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집에서 자판하고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도 다 그런 바람이 있을 걸요? 쉽지 않은 일이죠. 나도 그렇게나마 책 한 권 낼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은 축에 드는 걸 테고요."
  그럴 필요 없는데 자꾸 자조적인 말투가 되어갔다.
  "앞으로 써 봐요, 계속해서요. 내가 응원해줄게요."
  자판을 두드리다 말고 나는 작은 액자에 담긴 사진 속 그를 봤다. 내가 맨 처음 부산에 내려갔을 때 서면 근처의 도넛 가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우리… 시간은 얼마나 오래 갈까요?"
  "글쎄요."
  "어떤 감정이든 변하게 마련이잖아요? 사랑은 더더욱… 지금 우리들의 눈에 쓰인 어떤 것이 벗겨지고 나면, 우리는 어떤 감정으로 서로를 지키며 살게 될까요?"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다. 생각의 밑바닥에 억지로 묻어 둔 것이었다. 반드시 다가오게 될 어떤 순간, 사랑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존재하리라 믿고 싶지 않은 그런 순간. 미래의 어떤 시간에라도 결코 온전히 건져질 수 없을 너덜너덜해진 시간.
  "그 땐 의리로 사는 거죠."
  시골집 아랫목도 아닌데, 배를 깔고 엎드린 침대 위에서 갑자기 뭉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서툴고 투박하지만 자꾸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어떤 온기.
  "그 동안 같이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그 때에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로 의리를 지키며 사는 거겠죠."
  사람들에겐 그 말이 '사랑'을 훼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 말이 참 믿음직스러웠다. 아무리 변하고 흐트러져도 제 자리에 있어주겠다는 그 말은, '영원'이나 '불변'의 가면을 뒤집어 쓴 사랑보다 훨씬 더 반가웠다.
  "나야말로 자기 만나고 나서 많이 편해졌는걸요? 믿음직한 친구한테 매일 응원 받는 느낌이에요. 그러니까 나도 응원을 해주고 싶은 거고요."
  언제나 안 된다는 이야기만 듣고 살았는데, 그 곳은 위험한 길이며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말들뿐이었는데.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흔들리지 말아요. 아니, 흔들리는 건 괜찮아요. 흔들려 쓰러지게 되더라도, 내 쪽으로 쓰러지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어서 일을 끝내야하는데, 아직 읽어내야 할 표현과 문장들이 수 십 페이지로 차곡차곡 쌓여있는데 자꾸 눈앞이 흐려졌다. 가뜩이나 이해할 수 없었던 모호하고 흐릿한 표현들이 이제는 서로 뒤엉키며 그저 얼룩덜룩하게만 눈에 들어왔다.
  "큰일이다, 일해야 하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일하기 싫을 것 같아요. 자기랑 그냥 이렇게 수다 떨면서 잠자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억지로 할 필요는 없죠, 뭐. 내가 노래 불러줄까요? 오늘 직업 교육원에서 수업 듣고 오다가 버스에서 들은 노랜데, 옛날 노래 같은데 자기한테 들려주고 싶었어요."
  휴대폰 건너편에서 그는 벌써 목을 풀고 있는지 큼큼거렸다.
  "뭔데요?"
  "잠깐만요. 흠, 흠!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내게도 사랑이… 가만히 있어보자, 그 다음이 뭐더라? 잠깐만요."
  컴퓨터에서 무언가 찾고 있는 중인지 똑딱거리는 자판 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함중아… 함중아라는 가수가 있었나? 근데 이거 트로트인가? 아닌데, 버스에서 들었을 때에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잠깐만요. 세월이 흘러서 가면, 그 시절 생각이 나면, 못 잊어 그리워지면, 내 마음 서글퍼지네. 원 투 쓰리 포!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먼 거리를 뛰어넘어 서툴고 더듬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흐릿하고 모호해도 괜찮을 듯했다. 이렇게 오롯이 만져지는 진심인데, 이렇게 또렷하게 들려오는 마음인데.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잎새뿐이라오. 히히… 좋죠, 그죠? 잠깐요, 다른 노래도 불러 줄게요. 이번에는 최신 곳으로… 잠깐만요."
  그는 또 다시 무언가를 찾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two back in a growing line'을 머릿속에 그대로 담은 채, 나는 침대 위에 누웠다. 그의 노랫소리를 기다리며, 여전히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그 시간들에 몸서리치도록 감사하며.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 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장편소설 [빠쓰정류장]을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데 함께 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