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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김비 장편소설 연재]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20. 데리다 - 침입, 생각의

by 행성인 2015. 5. 2.

長篇小說

 

金 飛

 

 

20. 데리다 - 침입, 생각의 



 “그건 너무 쓸데없는 생각이다. 생각이나 고민이란 건 해답을 찾기 위한 거 아냐? 근데 그거에 그렇게 매달리는 건 비효율적이다.” 

 “그게 생각처럼 되냐? 생각처럼 안 되니까, 그게 사람이지. 결과 값이든 오류든 툭 떨어지면 그게 사람이냐고?” 

 “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생각을 감지할 수는 있지 않을까? , 내가 지금 소모적인 생각에 붙들려 있구나. 내가 가진 게 이것뿐이구나. 그러고 털어버리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말이야.” 

 “완벽히 검은 색 꽃은 왜 없는 걸까, 네모난 생명은 왜 존재할 수 없는 걸까뭐 그런 생각, 도움이 안 되긴 하지.” 

 “왜 도움이 안돼요? 도움이 될 수도 있죠.” 

 “도움이 되긴 무슨 도움이 되냐? 호기심이란 것도 너희들처럼 창창한 애들한테나 도움이 되지, 나이 들어 그런 건 추하기만 하지. 에너지 낭비지.” 

 “형이 지금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과거의 쓸모없던 상상이나 판타지로부터 나온 거라는 거 몰라요? 쓸모없는 생각이란 게 어디 있어요? 그걸 너무 간단하게 폐기시켜버리는 낡은 세대들의 몰이해가 더 쓸모없는 거죠.” 

 “나도 용호 말에 동감.” 

 “이 자식들이 또 시작이네? 너희들은 걸핏하면 낡았네, 몰이해네, 쓸모없네, 그러면서뭐가 됐든 너희들이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세상도 그런 세대들의 거듭된 경험과 실패와 희생을 바탕으로 세워진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냐? 그게 가볍게 쓸모없다고 치부해버리고 끝날 일이냐?” 

 “우릴 이런 불합리하고 이기적인 세상으로 몰아넣은 것도, 그런 세대들의 거듭된 경험과 실패와 희생의 결과기는 하죠.” 

 “저게 또?” 

 “뭐 어느 쪽에도 완벽히 동의할 생각은 없지만, 잎새의 그런 고민이 스스로를 너무 옥죄는 거라는 데리다 선배의 말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날아오르려면 날개를 펴면서 몸을 들어 올려야지, 오히려 발톱으로 뭘 꽉 움켜쥐고 있으면 어쩌냐? 놓을 건 놔야지, 몸을 띄우는데 집중해야지.”  

 “항상언제나 그런 식이었던 것 같아요. 두 번째 계단을 오르려면 반드시 첫 번째 계단을 올라야하는데, 그 첫 번째 계단이 결코 올라가지지 않는 거요.” 

 “아냐, 누나 두 번째 계단부터 오를 수 있어. 다리 쫙 펴고더 다리를 쫙 펴면 세 번째 계단까지 한꺼번에 오르는 것도 가능할 걸?” 

 “이게 지금 장난할 때냐?” 

 “흐흐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냥그렇다고...” 

 “우경이도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어. 그거 가능하지 않다고, 자긴 그런 거 할 줄도 모르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괜히 에너지 낭비하지 말라고.” 

 “, 그 무성애자 애인이요?” 

 “애인 아니지, 아직 같이 자질 못했는데 무슨 애인이냐?” 

 “저거, ?” 

 “아니지, 나한테는 분명 애인이지, 사랑하는 사람이지. 지금은 우경이도 나랑 사귀는 데는 동의했는걸? 아직 손잡고 포옹하고 입 맞추는 정도가 전부지만…” 

 “우와! 대박!” 

 “나도 처음엔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가능 하더라고. 어쩌면 우경이보다 내가 더 이건 아니라고 물리치고 싶은 마음이 컸을지도 모르는데가능해지더라. 물론 이전에 하던 사랑의 방식과는 다르지. 완전 다르고, 전혀 다르지. 그래도 내 마음이 사랑이란 건 알겠더라. 처음에는 나를 완전 무시하다가, 조금씩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우경이 눈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 이 사람이 왜 이럴까, 나한테 왜 이럴까, 그러면서도 조금씩 흔들리고, 마음을 내주는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이 사람을 사랑하길 잘 했구나 싶지.” 

 “소름. 아닌가, 오글거리는 건가?” 

 “허허허허. 그치, 오글거리지? 맞아, 오글거리는 거야. 나도 가끔 그렇거든. 근데 있잖아, 그거 행복해진다? 맞다, 이게 사랑이지. 까맣게 잊고 있던 뭔가를 알게 된 것 같고내가 지금 당장 뭐가 필요하든, 내 육체가 뭘 간절히 원하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고기다린다는 거,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기다린다는 거, 엄청 힘 센 거더라?” 

 “맞아요, 엄청!” 

 “, 오민수!” 

 “그러니까이래서 불가능하고, 이래서 못하고, 이러니까 할 수 없고 그런 거 말고아니, 이래서 가능하고, 이러니까 할 수 있고, 그런 것도 말고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처럼 가. 사랑이란 게 그렇잖아?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 사랑을 해도, 새로운 사랑 앞에 우린 언제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거잖아, 안 그래? 쫌 오글거리면서흐흐흐.”   

 “현아 누나, 오늘 쫌므찌네?” 

 “정력왕, 난자왕인줄만 알았더니만…” 

 “이게 넌 좀 그만해라, 그만!” 

 “그래서, 그 형한테는 연락이 아예 안 와?” 

 “사랑이 아니라잖냐? 사랑이 아니라는데 연락은 무슨 연락을 해?” 

 “사랑하다 싸울 수도 있는 거지 뭐.” 

 “사랑이 아니라니까.” 

 “왜 사랑이 아니야? 사랑이지.” 

 “이 사람들이 왜 이래? 언제는 본인 입장이나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그렇게 감싸고 돌 때는 언제고어쨌든 잎새가 자기 스스로 사랑이 아닌 것 같다잖아? 사랑을 믿어버리면 정체성이 흔들리고, 정체성을 믿어버리면 사랑에 확신을 갖지 못하겠다잖아?” 

 “그렇다고 그걸 끝이라고 말하진 말잔 말이지, 내 말은.” 

 “잎새 누나가 할 말 있는 거 같은데요?” 

 “그래, 뭔데? 말해봐, 그 말이 끝이란 말 아냐?”  

 “왜요, 왜 자꾸 손을 들여다봐요, 누나?” 

 “, 악수하고 둘이 사랑하자고 계약이라도 맺었던 거야?”

 “악수 같은 게 아니겠지. 그거보다 찐한 거였겠지.” 

 “뭐 이런 거? 이렇게 끌어안고 입맞추는 거?” 

 “, 더러워! 뭐에요, ! 어디다가 입을 맞춰요?” 

 “왜 뭐가 어때서? 정용호, 이제 너랑 나랑 계약 맺은 거다, 알았지? 이렇게, 이렇게…” 

 “너희들 지금 심각한 얘기하는데, 어서오세요.” 

 “여기혹시 정용호…” 

 “아 정말, 저리 안 가요? 저리 가라고요!” 

 “왜 인마, 너도 좀 설레지? 내가 입으로 해줄까? 입으로…” 

 “정용호!” 

 “? 엄마?” 

 “, 이리 안 나와! 당장 그 더러운 구석에서 안 나올 거야! 나와아아아!” 

 “안녕하세요.” 

 “당장 거기서 나와! 엄마 혀 깨물고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 불결한 데서 나오라고! 당장! 지금 당장!” 

 

 

 

김비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