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19. 산 - 시간, 낙하하는
‘밤’이라고 말하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태양’이라 말하고 하늘을 보면, 동그란 그것은 더욱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소나기’라고 말하며 맞는 빗방울은 더 거세고 찌르듯 아프다. ‘바다’라고 말하면 거대한 물덩어리는 더 막막해지고, ‘새’라고 말하면 하늘을 나는 그 날갯짓이 부러워진다. 어쩌면 ‘사랑’이라고 말하니 그건 그래서 더 달콤해졌던 건지도 모르고.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꾸 밀려오는 이 길고 나른한 잠이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이 그것에 ‘병’이란 이름을 붙여 놓았기에.
“뭐 했어요, 오늘?”
그녀는 사랑이란 말을 기다리고 있겠지만,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냥… 집에 있었어요.”
그녀가 기다리는 말은 사랑보다 먼저 미안한단 말일까? 그건 무얼 가둘까, 무얼 가릴까? 사랑처럼 나는 이제 미안하단 말도 하지 못한다.
“내가 집에 잘 갔는지… 궁금하진 않았어요? 전화라도 해주지 그랬어요.”
미안하단 말 속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몸이 아픈 게 아니다, 정신도 아픈 게 아니다. ‘병’이 아니다, 나는 갇히지 않았다.
“그날… 일을 생각해… 봤어요.”
“……”
“그래요, 힘들었어요. 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힘들었던 거… 맞아요. 나한테도… 그런 감정이 있어요. 절대 떼어낼 수 없는… 끊임없이 돌고 또 돌게 되는 어떤 생각이요. 아무리 거부하고 밀어내도… 항상 그 앞이에요. 맞아요, 힘들어요. 나도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죠. 아니, 지금도 힘들어요, 영원히 그럴 테고요. 남자일 수 없는 나… 여자일 수도 없는 나… 괜찮아, 뭐 어때? 그건 그저 삶의 두 가지 표식, 기호, 분류, 태도… 그러니까 그것 아닌 다른 곳에 너는 있고, 너는 결코 훼손되지 않아… 헌데, 단 한 번도 위로가 되지 않더라고요. 위로가 되었다고 확신한 날도, 돌아서면 뻥 뚫려 있어요. 다시 또 제 자리더라고요.”
돌고, 또 돌고 있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니 현기증이 났다. 순식간에 온 몸이 생각의 털로 뒤덮이는 것만 같았다. 겨우 제 자리에 서기 위해 미친 듯이 두 다리를 움직여야하는.
“자기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도 쳇바퀴를 도는 것 같았어요. 그냥 사랑이라고 믿어버리면 되는 일인데… 자기가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 걸까… 자기는 평범한 남자인데, 남자로 태어났던 나를 알고 있으면서, 나에게 사랑을 말하는 자기의 말은 과연 진심일까, 얼마큼이나 진심일까, 나조차도 알고 있는 내 정체성을 뛰어넘어 자기가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걸… 나는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걸까.”
그녀의 말은 어딘가를 계속 돌고 있었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어딘가, 계속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어딘가.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세상에서 제일 짧은 질주.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나를 위태롭게 하더라고요. 자기한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는 더 흔들려요. 믿으려면 가면을 써야하고, 확신 하려면 거짓된 내가 되어야해요. 나를 살리기도 하고, 동시에 나를 죽이기도 하는 어떤 약처럼요.”
그녀가 자신의 SNS에 적었던 낭떠러지가 생각났다. 내내 위태로움이라던 그 벼랑.
“나에게 사랑을 한다는 건… 그렇게 나 자신을 지워야하는 일이더라고요.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하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어요. 자기가 무기력하고 우울한 시간들을 지워내고 삶을 지켜야하는 것처럼요.”
“사랑이… 아니죠.”
“네?”
“자신을 지워버린 사랑은… 사랑일 수 없죠.”
“……”
“내가 없는데…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게 어떻게 사랑이죠?”
“……”
“내가 없는데, 내가 왜 내 삶을 지켜야하는 거냐고요? 삶이 뭐라고… 사랑이 뭐라고… 왜 내가 그걸 지켜야하는 건데요?”
사랑이면서, 사랑 아닌 것. 살아있지만 삶이 아닌 어떤 시간. 나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아니라고 말하는 나를 택했다.
“사랑 아니에요, 그거. 그렇게 사는 건 사는 것도 아니고요. 아니에요, 사랑. 지켜야하는 삶 같은 것도 아니라고요.”
낭떠러지 너머로 몸을 날렸는데, 나는 어디로도 곤두박질치지 않았다. 내 두 발은 여전히 단단한 데를 딛고 있었다. 돌아보니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고, 나는 혼자 낭떠러지 위에 서 있었다.
“아니….에요, 사랑?”
절벽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간신히 기어올랐다.
“나도 거기에 없고… 그쪽도 거기에 없다면서요? 이제 거기엔 아무도 없는 거잖아요? 거기에 아무도 없는데… 처음부터 거기에 아무도 없었던 건데… 그게 사랑일 리는 없잖아요?”
대답이라도 하듯 침묵도 사라진다. ‘밤’이라고 말하니 더 어두워졌던 것처럼, ‘태양’이라고 말하니 더 찬란하게 빛나고, ‘사랑’이라고 말하며 더욱 나를 중독시켰던 것처럼, ‘침묵’이라고 말하니, 그건 한 번 더 멀리 사라진다.
“저기요… 근데요, 저기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사라지고 또 사라진 그걸 붙들고 있을 뿐인데, 자꾸 눈물이 났다. 오래 전에 깨트렸던 유리병 조각을 이제야 밟은 것 같았고, 마침내 바닥에 내려선 심연에 가 닿은 거라고 믿었는데, 더 짙은 암흑이 보였다. 어딘가에 박힌 통증은 더 깊이 몸을 밀고 들어왔다. 이제야 알게 된 정답이라면 박수소리가 들려야하는데, 눈앞이 보여야하는데, 뻐개지던 심장도 괜찮아져야하는데, 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고, 몸 한 가운데가 쪼개지듯 아팠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내리치고, 쾅쾅 발로 바닥을 짓밟으면서, 아악아악 내가 나에게 들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나는 끝내 침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나니,
더욱 또렷해진 ‘사랑’이었다.
자꾸 잠에서 깨었다. 악몽이었다. 나는 어딘가에 깔려 있었다. 돌 같은 것도 아니었고 물같은 것도 아니었는데, 심장이 짓눌려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었다. 거인의 손아귀에 뭉개지듯 우두둑 소리를 내며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끔찍하고 지독한 새벽, 땀으로 범벅이 되어 나는 침대에서 도망쳐 나왔다.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모두 다 들이켜고 난 후에야 간신히 딸꾹질 같은 숨이 쉬어졌다. 아가미가 돋아난 것도 아닌데, 나는 자꾸 생선처럼 물만 들이켰다.
“깼니?”
그것은 들려온 말이 아니었다. 물속처럼 웅웅거리는 소리였다. 내가 들은 거라곤, 엄마의 방문 소리, 발자국 소리, 걱정 소리, 염려 소리, 다시 또 나를 짓누르고 가두는 소리.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상관하지 마세요, 아무 일 아니라고요! 날 그냥 내버려 두라고요!”
아니다, 이건 결국 지나게 될 시간이다. 끝까지 달리지 않고, 완주한 사람들은 분명 어딘가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승리하지 않고 이긴 자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시대가 아닌가, 사람을 잃어버린 자들이 인간을 설득하고 위로하는 시대가 아닌가. 이렇게 밤마다 무언가에 짓눌리는 날들이 이어져도 새벽은 올 것이다. 그 새벽에 다시 짓눌리더라도, 짓눌린 채 숨을 쉴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희망이 아니더라도, 삶이 아니더라도.
나는 온 힘을 다 해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온 거실의 공기를 끌어 모으듯 천천히, 공기의 알갱이를 새듯 집요하게 조금씩.
거짓말처럼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휙 몰아쳤다.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키던 내 콧속으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신선한 공기가 훅 치밀고 들어왔다. 나의 믿음을 증명하듯 거실에 휘몰아치는 공기의 반역이 나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만 같았다. 뜨거운 열기가 식어가고 숨을 쉬지 못했던 입가가 조금씩 터져나갈 즈음, 참으로 오랜만에 웃음이 허락된 것만 같았다. 나를 짓눌렀던 그 모든 것들로부터 마침내 빠져나와, 비로소 진짜인 내 믿음의 공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쿵!
천천히 눈을 떴다. 그토록 고마웠던 시린 공기를 뛰어넘어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발코니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서 환호성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악!”
나를 들어 올렸던 시린 바람을 가르며, 나는 천천히 바람 쪽으로 다가갔다. 열려있던 발코니 문에서 차가운 바람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고맙고 반가운 바람을 맞으며 창가로 다가가는데, 이상하게도 내 두 다리는 벌벌 떨고 있었다. 발코니 창가에 매달리는 내 발 밑이 신기하게도 따스했다. 그곳은 방금 전까지 엄마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김비: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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