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산 - 시간, 낙하하는

 


 

  '밤'이라고 말하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태양'이라고 말하며 하늘을 보면 동그란 그것은 더욱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듯하고, '소나기'라고 말하며 맞는 빗방울은 더욱 거세고 찌르듯 아프다. '바다'라고 말하며 거대한 물의 덩어리 앞에 서면 파도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고, '새'라고 말하며 하늘을 나는 생명을 가리키면 그 날갯짓은 더욱 우아해진다. 당연히 '사랑'이라고 말하고 나니 그건 그래서 더욱 달콤해졌을 테고.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자꾸 밀려오는 이 길고 나른한 잠이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이 그것에 '병'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기 때문인지도.

  그러나 '사랑'은 그러지 말아야했다. 사랑이라는 말로 중독되는 세계를 나는 너무 오래 간과해왔다. 첫 번째 사랑은 서툴렀고 두 번째 사랑은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달랐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나도 함께 성장하며 키를 키웠다고 믿었다. 세 번째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사람들이 말하고 세상이 규정하는 사랑과는 다른 무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닮았지만 '사랑'이 아닌 무언가. 현혹되거나 과장되지 않으며, 중독되거나 최면 당하지 않는, 내 온 몸을 씻어내는 물 같은 무언가. 아마도 나는 자궁 속에서 나를 감쌌던 양수처럼 고귀하고 아름답지만 깨끗하거나 맑지 않은 그런 사랑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사랑'보다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언어란 존재하지 않아서 그렇게 불렸던 것일 뿐 처음부터 그것은 인간의 언어 속에 갇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던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나는 더 이상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속에 갇혀버리게 될 것을 알기에. 내 깊고 아뜩한 잠이 '병'이라는 이름에 갇혀버렸듯이 '사랑'이라는 말 속에 나의 진심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갇혀버릴 것만 같았기에.

  "뭐했어요, 오늘?"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거워진 감정으로 짓눌렸는지 더욱 힘없고 보잘 것 없이 들렸다.
  "그냥… 집에 있었어요."
  어쩌면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해줄 수가 없다. 굳이 그럴 수 없는 이유를 말하라면 그것 역시 분명히 내가 원하지 않는 감정 속에 나를 가두어 놓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집에 잘 갔는지… 궁금하진 않았어요? 전화라도 해주지 그랬어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그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묻고 있는 그녀는 나를 야유하는 듯했다.
  "그 날… 일을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생각의 에너지는 지금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요, 힘들었어요. 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힘들었던 거… 맞아요."
  버려질 일만 남은 듯 그녀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지만, 이미 나는 오래 전에 모두에게서 버려진 삶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감정이 있어요. 절대 떼어낼 수 없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돌게 되는 어떤 생각이요. 아무리 거부하고 밀어내도 결국엔 내가 맞닥뜨려야하는 수밖에 없어요. 내가 밀쳐낸다고 하더라도 그게 어디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더라고요. 맞아요, 힘들어요. 나도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죠. 남자가 아닌 나, 여자가 아닌 나…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결국 그건 내게 주어진 내 몫의 삶이겠죠."
  돌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기증이 났다. 순식간에 온 몸이 생각의 털로 뒤덮이는 듯했다. 겨우 제 자리에 서기 위해, 쉬지 않고 두 다리를 움직여 열심히 뛰고 돌아야하는.
  "자기에게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자기에 대한 내 마음도 언제나 그렇게 쳇바퀴를 도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냥 사랑이라고 믿어버리면 되는 일인데… 자기가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 걸까, 자기는 평범한 남자인데 남자로 태어난 내 태생을 알고 있으면서 나에게 사랑을 말하는 자기의 말은 과연 진심인 걸까. 나조차도 알고 있는 내 정체성을 외면하면서 자기가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걸 믿어야하는 걸까."
  그녀의 이야기는 어딘가를 계속 돌고 있었다. 아무데도 갈 수 없는 어딘가. 고작 제자리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는, 결코 끝나지 않는 질주.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은 매번 나라는 존재를 위태롭게 만들었어요. 분명히 내게는 참으로 신기하고 고마웠는데, 그건 또 다시 나를 위협하는 칼이 되기도 해요. 나를 살리기도 하고, 동시에 나를 죽이기도 하는 어떤 약처럼요."
  그녀가 언젠가 적어놓았던 낭떠러지가 떠올랐다. 내내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던 그 사랑이라는 관계의 낭떠러지.
  "나에게… 사랑을 한다는 건 그렇게… 매번 나 자신을 지워야하는 일이었어요. 사랑을 믿기 위해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을 지워야했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하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어요. 자기가 무기력하고 우울한 시간들을 지워내고 삶을 지켜내야 하는 것처럼요."
  "사랑이 아니죠."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나는 그녀와 내가 서 있던 낭떠러지 밖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뭐라고요?"
  "자신을 지워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죠."
  "네?"
  "내가 없는데…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게 어떻게 사랑이죠?" 
  나도 모르게 나는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
  "내가 없는데 내가 왜 내 삶을 지켜야하는 거냐고요? 삶이 뭐기에… 사랑 따위가 뭐기에, 왜 내가 그걸 지켜야하는 거냐고요?"
  사랑이면서 사랑이 아닌 것.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 살아있으면서 삶이 아닌 어떤 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야 또렷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사랑 아니에요, 그거. 그렇게 사는 건 사는 것도 아니고요. 아니에요, 사랑. 지켜야하는 삶 같은 것도 아니라고요."
  낭떠러지 너머로 몸을 날렸는데 나는 어디로도 곤두박질치지 않았다. 내 두 발은 여전히 단단한 무언가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저 무언가 사라진 듯 서늘한 침묵이 절벽 위의 풍경을 감쌌다. 돌아보니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혼자서 낭떠러지 위에 서 있었다.
  "아니… 에요, 사랑?"
  보이지 않는 절벽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간신히 기어올랐다.
  "나도 거기에 없고… 그 쪽도 거기에 없다면서요? 이제 거기엔 아무도 없는 거잖아요? 거기에 아무도 없는데… 처음부터 거기에 아무도 없었던 건데… 그게 사랑은 아니잖아요?"
  대답이라도 하듯 침묵이 사라졌다. '밤'이라고 말하며 더욱 어두워졌던 것처럼, '태양'이라고 말하며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사랑'이라고 말하며 더욱 나를 중독 시켰던 어떤 것처럼, 이제야 나는 '사랑'이 아닌 선뜩한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통증이 밀려왔다. 오래 전에 깨트렸던 작은 유리병 조각을 밟고 섰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상처 밑으로 쪼개지는 고통이 파고들었다. 분명히 사랑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오래도록 나를 현혹시켰던 공허하고 쓸모없는 어떤 것이었는데, 고요했던 풍경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엇이 나의 시간을 짓누르는지 가슴이 뻐개지는 듯 아팠고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내리치며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니,
  더욱 또렷하게 만져지는 '사랑'이었다.


  자꾸 잠에서 깨었다. 악몽이었다. 나는 어딘가에 깔려 있었다. 돌 같은 것은 아니었다.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었는데 심장이 짓눌려 도무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집요하게 나를 내리누르는 밀폐. 거인의 손아귀에 뭉개지듯 우두둑 소리를 내며 쪼그라드는 압착.
  땀으로 범벅이 되어 나는 침대에서 도망쳐 나왔다.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모두 다 들이켜고 난 후에야 간신히 숨이 쉬어졌다. 아가미가 돋아난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자꾸 물고기처럼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깼니?'
  그것은 들려온 말이 아니었다. 물속처럼 웅웅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내가 들은 것이라곤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엄마의 방문 소리였다.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걱정스러운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익숙했던 것이어서 고작 기시감처럼 들려온 말에 나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상관하지 마세요, 아무 일 아니라고요! 날 그냥 내버려두라고요!"
  엄마의 방문이 열리며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긴 했다. '깼니?' 라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변함없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전히 나를 보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짜증스러웠다. 서른이 된 아들의 조금도 변하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도 무거웠겠지만, 서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똑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는 나 자신도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다, 이건 결국 지나가게 될 시간이다. 끝까지 달리지 않고 완주한 사람들은 분명 어딘가에서 환호를 지르고 있을 것이다. 승리하지 않고 이긴 자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시대가 아닌가. 인간을 잃어버린 자들이 인간을 설득하는 역설과 반역의 시대가 아닌가. 이렇게 밤마다 무언가에 짓눌리면서도 숲 속에 누운 듯 상쾌한 새벽은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 해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온 거실의 공기를 끌어 모으듯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새카맣게 어두운 한 밤중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밤이 아니라 새벽일 것이다. 새벽이란 또 다시 온 세상을 밝히는 아침의 증거일 테고.
  거짓말처럼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휙 몰아쳤다.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이켜고 있는 내 콧속으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신선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나의 믿음을 증명하듯 갑자기 거실 안의 공기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온 몸을 휘감았던 뜨거운 열기가 식어가며 숨을 쉬지 못했던 내 입가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웃고 있었다. 나를 짓눌렀던 모든 것들에게서 마침내 빠져나와, 나를 믿고 있는 공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쿵!

  천천히 눈을 떴다. 그토록 고마웠던 시린 공기를 가르며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베란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서 환호성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악!"
  나를 들어 올렸던 시린 바람을 맞으며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열려 있는 베란다 문에서 차가운 바람은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고맙고 반가운 바람을 맞으며 창가로 다가가는데, 이상하게도 내 두 다리는 벌벌 떨고 있었다. 베란다 창가에 매달리는 내 발 밑이 신기하게도 따스했다. 그곳은 방금 전까지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엄마가 서 있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 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장편소설 [빠쓰정류장]을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데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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