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23. 데리다 - 그리워하며, 환대를
“여보세요? 아, 아닙니다. 잘못 거셨어요. 아니에요,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습니다.”
“사장님 계십니까?”
“예, 무슨 일이신데요?”
“여기 가게를 내놓았다고 해서 찾아 왔는데요.”
“아닌데요, 저희는 가게 내놓은 적 없습니다.”
“사장님이세요? 아닌데… 건물 주인에게 아직 이야기를 못 들으신 건가요? 아, 아닌가? 박 사장이 아직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가? 이거 미안합니다. 나중에 확인을 하고 다시 오지요. 실례했습니다.”
“뭐예요, 가게 내놨어요?”
“아니, 아니야.”
“근데 저 사람은 뭐야?”
“모르겠어. 웬일이야, 내가 한 동안 모이지 말자고 문자 보냈는데, 못 받았어?”
“오지 말라고 하면 오지 말아야 하는 곳인 거야, 여기? 치사하게 왜 그래요? 뭐 그런 일 가지고 다들 모이지도 못하게 하고… 다들 순순히 오지 않겠다고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상우 오빠 정도면 그냥 잠자코 알겠다고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걔도 뭐 별 수 있냐? 걘 더군다나 공무원이잖아? 괜히 이상한 소문나고 그러면 곤란하겠지.”
“왜요, 공무원이면 더 안전 빵이지. 이 나라가 아무리 빡빡해도 그런 걸로 사람 자르고 그러면 더 문제가 커질 걸?”
“안정적인 직장이라 더 불안할지도 모르지. 앞으로 계속 그 불편함을 버텨야한단 말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여기가 무슨 신촌이나 종로 한 복판도 아니고, 대학로라고 이름 붙이기도 뭐한 돈암동 끄트머리 주택가에 붙은 손바닥만 한 가게에, 소문이 나면 무슨 소문이 나고, 또 그게 퍼져봤자 얼마나 퍼지겠냐고요? 다 마음이 없어 그렇지. 맨날 입으로는 제일 옳고 정의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처럼 그러면서, 실은 그 발꿈치에도 따라가지 못할 마음들이라 그렇지.”
“내가 싫어서 그래. 이젠 이런 일들로 주변 사람들 좀 덜 힘들게 하고 싶어서. 뭐 마실래?”
“오빤 항상 그게 문제야. 뭘 그렇게 남을 신경 쓰면서 살아? 힘들고 지친 게 어디 정작 당사자인 오빠만큼 힘들고 지친대? 오빠가 만날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낀다는 그 점잖고 젠틀한 오빠 아버지가, 당사자인 오빠 반만큼이나 오빠를 생각할 수 있는 거냐고요?”
“……”
“정의롭고, 진보고, 많이 배우고, 착한 사람이고 다 필요없어. 자기 가족이 퀴어라는 게 어디 탄로 날까 쉬쉬하고… 도대체 뭐가 두려운 건데? 누가 누굴 창피해하고 부끄러워해야하는 건데, 도대체?”
“아직이냐?”
“뭐가요?”
“아직 정리가 안 된 거냐고?”
“무슨 정리요? 난 도대체 무슨 얘긴지 모르겠네.”
“넌 지금 네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 사랑이란 걸 알면서, 그게 진짜 사랑일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누구보다 너가 너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움츠러들면서, 안 그런 척하고… 잠깐 힘들고 틀어졌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걸 내동댕이치고… 아냐?”
“아유, 우리 오빠 너무 멀리 가네. 아니에요, 절대… 절대 아니야.”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 그래야 이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는 너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깟 동성애자가 운영하는 카페라는 소문이 뭔데, 동성애자들만 우글거리며 모여 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따위가 뭔데, 갑자기 그 많던 손님들이 한꺼번에 끊겨버리다니… 단지 장마 기간이 시작되어 그럴 거야, 너무 갑작스럽게 폭염이 심해서 그럴 거야, 그렇게 믿고 싶은 내 마음이랑 똑같은 거겠지, 어차피.”
“그런 거… 아니에요.”
“솔직하자, 우리. 너나 나나 우리는 솔직해질 수 있잖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에 너무도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도 신물이 날 지경인데… 우리 서로에게는 좀 솔직해야하는 거 아니니? 내가 나 스스로에게만큼은 솔직할 수 있는 거 아냐?”
“……”
“……”
“좀 모른 체 하자,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믿고 살아보자고, 응? 어차피 우리한테 제일 무거운 게 남겨질 건 뻔 하잖아? 이래도 마찬가지, 저래도 마찬가지면, 좀 허물어지고 살자. 우리끼리는 좀 힘들다고 해도 돼. 허술하고 볼품없고 그래도, 우리끼리는 좀 이해하는 쪽으로 해보자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그 짓거리는 제발 그만 두자, 지친다, 지쳐.”
“아니 내 말은… 아니다, 미안해요, 오빠.”
“나한테 미안할 거 없어. 너 자신에게 미안해해야지. 그런 너 때문에 그동안 망가진 것들에 미안해해야지.”
“난… 난 그냥… 그래요, 이기적이긴 하죠.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먼저 납득시켜야하고… 무조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하고… 네 이기적인 건 맞아요. 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나를 수용하라고 하고, 복잡하게 얽힌 것까지 왜 읽어주지 못하느냐고 하고, 그래서 사랑일 리 없다고 하고… 근데요. 근데 그건…”
“……”
“사랑이란 거… 사랑이란 거 말예요. 어떻게 해도 불리하게 되잖아요? 아무리 잘해보려고 해도, 아무리 다른 길을 택해 잔머리 굴려 앞으로 나아가려고 해도, 언제나 제일 먼저 구덩이에 빠지는 건 나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그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게… 발버둥치는 게 잘못인 건 아니지 않아요?”
“빠지면 어때서?”
“하지만… 하지만 그건…”
“또 다시 네가 빠진 그 구덩이를 알고나 있냐고 묻고 싶은 거냐? 거기가 얼마나 어둡고 혹독한 덴 줄 상상이나 하고 있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거야?”
“……”
“그렇게 해서라도 제일 깊고 까마득한 구덩이에 빠진 스스로를 확인하고 싶은 거냐, 너는? 그럼 네 말이 맞네. 넌 사랑을 할 게 아니라, 그 구덩이를 혼자 올라오는 법을 먼저 깨우쳐야하는 거네. 도와 달라고 할 자격도 너한테 없는 건 알지? 누군가 손을 내밀면 그 자리에서 다시 또 다른 방향으로 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 틀어박히려고 할 테니까. 너 혼자, 오직 너 혼자 힘으로 어디 버텨봐, 거기서.”
“오빠는… 오빠는… 몰라요.”
“그래, 나는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동성애자일 거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내가 선 자리에서 앞으로 나갈 테니까. 여기 이 가게를 지키고, 내 몸을 지키고, 내가 빠진 구덩이를 제일 작게 만들어, 내 몫의 인생은 내가 지키고 말테니까.”
“……”
“어이, 장사 안 할 겁니까? 이거 분위기가 왜 이래요? 데리다 형, 정말 오랜만이네. 잘 지내고 있는 거예요? 어… 잎새도 있네? 근데 둘 다 왜 이래? 사람이 들어왔으면 반갑게 맞아야 하는 거 아냐?”
“……”
“어서 와라, 유진아. 앉아.”
“뭐야, 왜들이래? 환대를 바라는 내가 욕심인 거야, 이거?”
김비: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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