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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렛세이LETSSAY14

[LETSSAY] 6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빨강 차쨩 목소리만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희미하고 뿌연 사진으로 기억하고 있다. 단발과 컷트머리 사이의 애매한 경계, 은색 안경, 쭉 뻗은 콧대와 오밀조밀한 붉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키는 167.5라고 했다. 한사코 쩜오를 강조했다. 자기는 얼굴이 못생겨서 내세울게 키밖에 없다며.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 그녀의 키가 정말 167.5인지 알 길이 없다. 그녀가 말을 할 때는 어떤 몸짓을 취하는지, 어떤 향수를 쓰는 지, 심지어 그녀의 진짜 이름조차도 알지 못한다. 낮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너 참 예쁠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를 만난 것은 한 채팅 사이트였다. 23살 차쨩이예요. 왜 차쨩인가요... 2015. 6. 19.
[LETSSAY] 5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빨강 피어오르다 12살이었나, 그 해 내 달력은 한 인테리어회사에서 받은 것이었다. 모던한 분위기의 침실과 부엌이 매달 교차했다. 그 중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7월의 부엌이었다. 화이트 톤의 모던한 수납장과 아일랜드 식탁, 무광 스테인리스 후드와 4구짜리 가스오븐, 그곳에서 만드는 음식은 어디 레스토랑에 내어놓아도 뒤지지 않는 맛이 나올 것만 같았다. 본격적으로 부엌에 들어간 것도 그 해였던 것 같다. 프라이팬 한 가득 달걀을 부쳐내서는 밥그릇에 올리고, 그 안에 볶음밥을 담아서 동그란 오므라이스를 만들기도 하고, 밀가루-계란물-빵가루를 차례로 묻힌 돈까스를 튀기기도 했고, 손에 하얀 밀가루를 잔뜩 묻히고 만두를 빚기도 했다. 전자렌지로만 쓰던 컨벡션오븐에 빵을 구워본 것도 그쯤이었다. 밀가.. 2015. 5. 21.
[LETSSAY] 4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빨강 춤 낡은 집에는 먼지가 더 빨리 쌓이는 것만 같다. 수치화된 사실도 아니고, 관련 연구가 진행된 적도 없고, 내 지인 중 하나는 그럴 리가 없다며 손사래를 치기까지 했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낡은 집의 창문이, 그 집의 오래된 거울이, 그 집의 텔레비전 화면이 더 뿌옇고, 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런 집에서 먼지는 얹혀 지내는 백수 삼촌처럼 불편하게 집안 곳곳에 들러붙어 있다. 어렸던 나는 스무 살이 되면 당연히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트콤 논스톱에 나오는 것처럼 예쁜 가구가 있는 원룸에서 아침에는 모닝커피를 마시며, 변신하는 세일러문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아름다워 질 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달콤한 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뭐 그런, 장.. 2015. 4. 21.
[LETSSAY] 3월의 렛세이 빨강단숨 붉은 커튼, 닳은 의자, 두꺼운 사진집, 나무 창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카페 구석구석 오래된 담배 냄새가 배어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테이블에서 글을 쓰면서 담배를 피울 수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유독 예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왔었다. 기타 줄을 퉁기면서, 스케치를 하면서, 노트북을 펼쳐 놓고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내뱉은 하얀 날숨에는 각자의 꿈이 한 모금 씩 담겨있었다. 그러니까 그 꿈들이 카페 구석구석마다 진하게 스며들어서, 내 꿈도 한 번 뱉어보고자 담배를 더 피워 댔던 거다. 나는. 처음 담배를 피웠던 곳도 카페였다. 열다섯 살, 여중에 다니던 때였다. 우연히 짝이 되어 친해지게 된 아이는 여자 친구가 있다고 고백해왔다. 그렇게 어느 날 기어이 학원을 땡땡이치고 그 아이의 손에 이.. 2015. 3. 15.
[LETSSAY] 2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빨강봄꽃작별 그녀는 외쌍꺼풀이었다. 나는 쌍꺼풀이 없는 그녀의 왼쪽 얼굴을 좋아했다. 내 나이, 그녀의 나이 열일곱, 나른했던 봄날, 아무도 찾지 않는 새하얀 자리들, 밀려 내려온 꽃들이 우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빙글빙글 돌았던 것 같다. 그녀가 내게 입을 맞췄던 순간. 그녀와 나는 짝이었다. 봄눈이 내릴 때부터 꽃이 만개할 때까지 나란히 앉아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조잘대다 보니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어.” 내가 들은 대답. “너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아.” 지은 지 오래된 학교의 복도는 한 사람만 걸어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음의 크기가 서로 같지 않음에, 그 간격에, 그 높은 벽에, 그 거리에 순식간에 내 마음은 위태롭게 삐걱거렸다.. 2015. 2. 14.
[LETSSAY] 12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달애기 취급 하지마! 시간을 거슬러 9월 말, 야자 중간에 뛰쳐나온 세 인물, 나와 수민과 도경을 다시 무대에 세운다. 배경은 어두컴컴한 학교 운동장으로, 을씨년스러운 낡은 건물, 맨 꼭대기 층만 희멀겋게 불을 켜놓은 음침한 교사를 세우고, 닳아빠진 스탠드와 흙바닥 가득 먼지가 이는 운동장을 깐다. 나에게는 짤막한 반바지를 입히고, 수민에게는 하복셔츠, 도경에게는 얇은 가디건을 입힌다. 그렇게 무대가 갖춰지면 인물이 등장하고 대사가 읊어지기 마련, 오늘의 대사는 도경이 먼저 뱉도록 되어있다. 여잔데, 여자도 좋아는 하는데, 스킨십도 하고 싶은데 어떤 성적인 관계까지는 거부감이 든다면, 그걸 양성애자라고 할 수 있어? 새카만 하늘에는 흐르는 별과 구름 몇 점을 올린다. 아직 밝게 빛나지 않아 노르.. 2014. 12. 8.
[LETSSAY] 11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달 집단 우울증 나는 십대. 청소년. 미성년자. 아직은 어리다는 말을 뒤집어쓰고 헛짓거리를 할 수 있는 나이. 물론 지극히 주관적 생각이라 주변 사람들은 속 터져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열아홉이라는 말에는 무슨 저주라도 붙어있는지. 반복해서 말하듯 주위에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라곤 없다. 청소년 네 명 중에 한 명은 자살시도를 해 본적이 있대. 누군가 우울해지라고 급식에 약을 탄 것도 아닐진대, 우리는 집단 우울증이라도 걸린 듯 되묻는다. 그 뿐이 안 돼? 네 명중 셋쯤은 될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 모인 넷, 다들 시도를 해봤다는 그 한 명을 자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네 명의 친구들이 모이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아. 그들.. 2014. 11. 11.
[LETSSAY] 10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달가느다란 담배, 가느다란 손가락. 세상에는 너무 슬픈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많다. 묻혀갈 인생을 노래한 김광석, 빈집에 갇힌 기형도, 가느다란 담배와 그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윤여정. 왜 타인의 삶은 슬프게만 보이는지. 당장에 고개를 쳐들면 빽빽이 들어앉아있는 고삼들이 보인다. 그네들의 삶은 왜 그렇게 슬플까. 아니, 나는 왜 슬프다고 느끼고 있을까. 어쩌면 내 삶을 가엾게 여기지 않기 위해, 타인의 삶을 동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슬픔들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당하다고나 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내 감정이지만, 타인의 삶은 슬프기 그지없다. 그 슬픔이 섹시해보일 때가 있어. 윤여정의 손가락에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윤여정과의 인터뷰를 정리하던 한 기자는, 슬.. 2014. 10. 15.
[LETSSAY] 9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달 시계도 시간이 흐르면 고장이 난다. 셔츠와 넥타이와 손목시계는 어린 내가 좋아하던 것, 그리고 가지지 못했던 것. 시간이 흘러 청소년기를 맞이하며 세가지를 모두 가지게 되었다. 새하얀 셔츠의 감촉과 살짝 목을 죄는 넥타이, 손목을 감싸 무게감을 드러내는 검은 손목시계. 교복 셔츠에 교복 넥타이, 입학선물로 받은 몇만원짜리 시계였지만 그 만족감은 왜 그렇게 컸는지. 5년 반. 학교에도 사복을 입고 다니면서 셔츠와 넥타이는 멀어지고, 생활방수라지만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물을 먹던 손목시계가 망가지는 시간. 지하철을 타고 도계를 넘어가 수리를 받아왔지만 원인불명의 고장이 번번히 일어났다. 손목시계에 맞닿아 있던 살갗은 반들거리게 닳아있고 타지 않아 하얗게 바래있다. 5년 반은 그렇게도 긴 시간이다... 2014. 9. 10.
[LETSSAY] 7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달 불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모공을 바라본다. 몇 달째 깎지 않은 손톱을 세워 털을 잡아당긴다. 씁쓰름한 기분이 들어 다시 눈을 감는다. 존재의 서러움은 몸을 불려나간다. 생의 이유는 우울도 슬픔도 아니었으나, 어떤 이유일지라도 상실은 필연적으로 외롭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함으로써 동물이 아니 기로 한 거야. 포기한 건지, 상실한 건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동물이 아니기에 찾아오는 외로움은 누구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로서 서러워지는 인간의 숙명은 털이 퇴화한다는 것을 발견 했을 때 더 더욱 심화된다. 짐승의 손톱을 세운다. 야성의 털을 일깨운다. 그럼에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스스로의 울부짖음을 잊고 조밀한 발음을 구사하라 강요당했고, 본질의 바탕을 잃도록 억지로 만들어진 이름.. 2014. 7. 17.
[LETSSAY] 5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달 우리는 무의식 속에 상투적인 말들을 수 없이 가지고 있다. 시네마천국, 흩날리는 벚꽃,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슬픔, 삶의 애환,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저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처음에는 인상적이었을 그 말들. 아직도 주체할 수 없는 매력 또는 미련으로 남아 수 없이 반복되는 상투구. 짧은 말들을 하나하나 매만지며 상투의 출발점을 기억해내 본다. 영화 제목, 소설의 한 구절. 다들 고만고만한 출생지이다. 저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이런 문장 하나마저 나에게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구절로 느껴질 뿐이지 어떤 종교적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시험은 종교적 선을 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이다. 종교적 선? 종교적 선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 2014. 5. 26.
[LETSSAY] 3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달 너와의 첫 만남은 시더분한 여느 날들과 다르지 않았나보다. 열두 살, 어린 기억에도 적지 않은 일들이 손에 걸리는 것을 본다면, 아무런 인상도 기억도 남지 않은 너는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여린 모습만을 보여줘 왔던 너는 이렇게 말한다면 분명히 상처받겠지. 그런 너를 상상해보며 일부러 나쁘게 말해본다. 어차피 네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 내가 지금 앉아있는 경전철의 창 밖에 너의 집이 비친다. 경전철이 한창 지어지던 2009년 7월, 너는 경전철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딱 이 자리에서 사고가 났었는데, 그런 생각을 해보며 약간 불안한 눈빛을 보낸다. 처음으로 시공되던 2009년부터 경전철은 항상 문젯거리였다. 언제나 말하듯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평범함과 무난함 .. 2014. 4. 1.
[LETSSAY]2월의 렛세이 렛세이어 달, 똑같은 목도리들. 아무렇지도 않게 비가 내린다. 이렇게 성긴 눈발은 비라는 이름이 붙어 마땅하지 않을까. 미적지근하고 메마른 위성도시에 비슷비슷한 눈이 내린다. 눈은 딱딱한 아스팔트를 적시지도 못하고 녹아내린다. 진눈깨비는 눈이 아니래, 어느 어린 기억. 마른 눈발은 점점 더 굵어져만 간다. 버스 창밖으로는 우산 하나를 나눠 쓴 세 명의 여자들이 보인다.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새빨갛게 칠한 입술은 지나온 세월을 가려주지 못한다. 나는 눈을 맞이하며 마른 입술을 뜯는다. 추위는 무섭지 않다. 무서움, 공포, 두려움, 기피, 포외, 불안. 무서움과 비슷한 말들을 나열해본다. 추위라는 말에 붙기엔 무겁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무거움이 어색해서 나는 추위를 타지 않는다. 패딩은.. 2014. 2. 26.
[LETSSAY] 우리가 느낀 나날들 달, 물, 불, 나무, 돌 (레즈비언 에세이 LETSSAY) 달(月) : 저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이름 석 자 마저 나에게 맞춘 듯, 내가 좋아하는 글자로만 이름 지어진 그런 여자가 있다. "달" 이라는 잘 어울리는 가명까지 선택했지만, 가명을 쓰는 게 슬프리만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달. 둥그런 달처럼 빛나는 그녀, 달. 내 사랑하는 여자는 달이다. 짝사랑은 아니다. 나는 달을 사랑하고 달 역시 나를 사랑해주니까. 그렇다고 연인관계도 아니다. 달은 남자친구가 있었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단 한 번도 우리는 사귄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으니까. 우리는 자매도, 친척도 아니다. 서로 사랑하는 친구일 뿐 이다. 악연. 새 학교 새학년 .. 2013.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