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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렛세이LETSSAY

[LETSSAY] 3월의 렛세이

by 행성인 2014. 4. 1.

렛세이어 달

<다시 처음으로 만날>


너와의 첫 만남은 시더분한 여느 날들과 다르지 않았나보다. 열두 살, 어린 기억에도 적지 않은 일들이 손에 걸리는 것을 본다면, 아무런 인상도 기억도 남지 않은 너는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여린 모습만을 보여줘 왔던 너는 이렇게 말한다면 분명히 상처받겠지. 그런 너를 상상해보며 일부러 나쁘게 말해본다. 어차피 네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 


내가 지금 앉아있는 경전철의 창 밖에 너의 집이 비친다. 경전철이 한창 지어지던 2009년 7월, 너는 경전철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딱 이 자리에서 사고가 났었는데, 그런 생각을 해보며 약간 불안한 눈빛을 보낸다. 처음으로 시공되던 2009년부터 경전철은 항상 문젯거리였다. 언제나 말하듯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평범함과 무난함 속에서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경전철이 들어 선 후로는 종종 9시 뉴스를 탔다. 공사 중에 무너진 건 있을 수 있는 사고였다. 하지만 철마다 말썽을 부리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경전철은 눈이 많이 오면 운행을 멈췄다. 승객들은 지상 6층 높이의 레일을 걸어야 했다. 비가 쏟아지던 날 경전철은 또 멈췄고, 불만은 쌓여갔다. 어느 날은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날이 너무 더워서 멈추었다. 처음 몇 차례는 뉴스에 나왔지만, 그 일이 거듭된 후에는 그 흔한 인터넷 기사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멈춰있는 경전철을 볼 때마다, 저것 봐, 또 멈췄어. 하고 몇 마디 할 뿐이었다. 그 뿐이면 다행이었다. 요금이 비싼데다 일반 대중교통과 환승이 되지 않아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그건 그대로 적자로 남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아직까지도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경전철이 문젯거리로 남아있다. 마치 너처럼. 


너와 나는 우리가 된 적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큰 비약일까. 너를 처음 만난 것은 열두 살, 아니면 열세 살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열한 살이었을까? 어쨌든 초등학생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너와 나는 안면을 트고 일 년이 넘어서야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우연히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 같은 계열을 선택했지만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너는 나를 잊지 않았다. 언제나 나에게 찾아왔고, 나와는 다른 너의 고민거리를 털어놨으며, 나를 보고 웃곤 했다. 나는 달랐다. 친구와 지인의 구분을 뚜렷이 하는 나에게, 접점이 얼마 없는 너는 친구일 수 없었다. 너와 나의 대화는 항상 똑같았다. 너는 너의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듣는다. 그리고 서툰 위로와 웃음을 보낸다. 그러고는 끝이다. 너를 처음 만난 열두 살 때부터 열아홉인 지금까지, 너와 나의 대화는 거의 같았다. 다른 대화는 있을 수 없었다. 너는 너의 이야기를 했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친구였고 너는 나의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는 경전철처럼 사고의 소식만을 전해주었고 나는 상투적 위로만을 내뱉었다. 너는 나를 우리라고 느꼈을 지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에 너와 나는 우리인 적이 없었다. 우리일 수 없었다. 


경전철은 문제투성이지만 여전히 운행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사고도 잦아들었고 빠른 속도와 쾌적함은 그 까짓 몇 백 원쯤이야 더 쓴다고 상관없겠지, 하는 유혹을 만들어 냈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 사이사이에 뿌리박힌 판잣집이며 고물상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것도 한 몫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2열밖에 되지 않는 작은 열차라 사람이 많을 때도 있지만, 그때는 그냥 다음 것을 타면 될 정도로 열차 간 시간차도 짧은 편이다. 개통 초기 쌓아왔던 이미지는 경전철의 이점까지 가려버린 것이다. 


네가 이 글을 볼 리는 없다. 그래서 일부러 경전철과 비교하며 네가 기분나빠할 말들을 했다. 그렇다고 네가 싫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을 뿐이다. 너에게 미안했기에, 7년간 알아오면서 한번도 나를 저버린 적이 없는 너를 친구가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 미안했기 때문에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상의 너일 뿐이다. 


작년 3월 4일. 새 학기가 시작하던 날, 너는 나에게 편지 한 통을 줬다. 분홍색 봉투에 담겨 하트모양 스티커로 봉해진 그 편지는 경전철에서 처음으로 뜯어졌다. 너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여러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너는 나에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다. 생일이 지난 지 열흘이 넘었었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던 네가 내 생일을 기억한다는 것에 놀랐다. 물론 나도 네 생일을 기억하고 있긴 했다. 같은 빠른년생 중에서도 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은 드물었고, 딱 일주일 차이가 났고, 2월의 마지막 날인데다 네말대로라면 한시간만 늦게 태어났어도 3월생이라 한 학년 빨리 입학할 수 없았다는게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너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통의 문자도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게서 편지를 받았다. 그때서야 나는 너와 내가 친구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네가 언제나 내 친구들을 질투해 온 이유가, 너와 내가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답장을 써줬다. 


작년 12월, 너와 내가 같은 계열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는 나와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다. 같은 중학교를, 같은 고등학교를, 또 2학년 과목에서의 같은 계열을 선택했을 때 마다 네가 했었던 말이다. 지금까지의 나는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하지만 그 편지를 받은 나는 그래서는 안되었다. 그게 9달이 지난 일이어도 상관없었다. 네가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기억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가식적이지 않게, 그렇지만 다정하게 대답을 했다. 


경전철은 애용하는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학생이 타기에는 비싸고 접근성이 좋지 않은데다, 안전성도 불안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경전철의 여러 장점에 이끌려, 꽤나 자주 타고 다니게 되었다. 너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싶다. 언제나 여러 문제거리를 늘어놓으며 귀찮게 하는 지인이라고 여겼지만, 딱히 정들지도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친구임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런 사람. 그리고 며칠 전 너와 나는 같은 반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 말대로 7년간의 인연이 학교생활의 마지막에 와서야 닿은 것이다. 같은 반이 되어 가까이에서 직접 보는 너는 7년간의 너와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대한다, '우리'반에서 다시 처음으로 만날 너를. 



렛세이어 불


 가끔 매우 하찮은 일들을 그만둬야 하는 때가 아쉬워지는 경우가 있다. 아무데도 초점을 맞추지 않고 멍하니 모든 곳을 응시하면서 손등의 툭 튀어나온 혈관을 만지작거리는 일이나, 책상에 뺨을 대고 누워 나무 문양 시트지의 나이테 개수를 세는 일, 종이컵의 입 데는 부분을 돌려가면서 자근자근 씹어대는 일. 나는 그런 일들을 그만둬야했을 때 마다 그 상황을 기억해두고, 나중에 시간이 많을 때에 다시 꺼내두곤 한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방바닥에 몸을 완전히 밀착하고, 오른쪽 뺨을 누런 장판에 붙이고, 방구석 끄트머리 깔끔히 마감되지 못한 곳의 붕 뜬 장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 방학은 아쉽게 그만두어야 했던 일들을 복습하는 기간으로, 나는 상당히 이 시간들을 즐기고는 있으나 엄마가 보기에는 아닌가보다. 뒹굴 거리는 몸뚱이는 강력한 등짝 스매시 몇 번에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근처 카페로 도망 나왔다.

 

 방학은 내가 나를 완전히 풀어버리는 기간으로 아예 정해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대학교 첫 방학 때에는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기대에 못 미치는 방학 기간 때문에 우울해지기까지 했었다. 그런 일을 두어 번 겪다보니,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쪽이 심신에 좋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내 방학은 참,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가운데 많은 일이 일어나는 두어 달이 되고 있다. 화장은 아주 가끔 시내에 나갈 때 정도만 하고, 집 밖에 나가는 일도 일주일에 몇 번 없다. 방은 무질서의 질서를 지키고 있고, 머리는 마구잡이로 길어져서 바람에 헝클어진다. 손톱, 발톱도 귀찮아서 깎지 않고 부러지면 부러지고 뜯으면 뜯는 대로 두었더니 엉망이다. 눈썹정리도 안한지 한참 되었고, 자주 입는 겉옷은 그냥 방치해두어서 담배 냄새, 술 냄새에 찌들어있다. 하루 12시간정도를 잠을 자며 보내고, 나머지 시간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바쁠 때에 아쉽게 그만두어야 하는 일들을 하면서 보낸다.

 

 그러한 하찮은 일들, 손목과 발목의 핏줄을 만지거나, 귀의 오목한 부분을 뒤집거나, 손톱을 까뒤집거나, 입술 안쪽을 뜯어먹는 일들, 그런 일을 할 때면 한도 끝도 없이 멍해지기도 하고, 아니면 오만가지 잡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한 가지 내가 특이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런 폐인 같은 생활에도 불구하고 외롭다는 생각만을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푹 늘어진 엿가락 같은 생활이 내 감정도 늘어지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기 중에 정말 정신없이 바쁠 때에는, 각종 과제와 모임에 잠 잘 시간도 없이 치이면서도 거대한 외로움이 뼛속 깊이 밀려오고는 했다. 잠시라도 혼자 있는 것이 싫었고, 시간이 조금이라도 난다싶으면 홍대로, 신촌으로, 강남으로, 무리하게 약속을 잡아가며 안 그래도 없는 잘 시간을 더 줄여가면서 사람 속에 섞여있고 싶어 했다. 휴대폰의 카페 어플들에는 이반 카페의 최신 글 알림이 잠시도 쉬지 않고 울려댔다. 그런 카페들에는 항상 새로운 여자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참 많았고, 나도 그 중 하나여서, 여기 잠깐 저기 잠깐, 문어발식 만남을 즐기고는 했다. 이런 인터넷상에서 어떻게 서로를 아는 연인을 찾겠다는 거야, 수많은 애인구함 글 목록을 죽죽 내리면서 혀를 찼다. 같은 여자끼리 뭐 이렇게 성향은 나눠대는 거고, 얘는 뭐 이렇게 계속 글을 올려대, 촌스럽게. 몹시 웃기게도, 오만가지 비난을 퍼부어대면서도 나는 계속 카페 글 새로 고침을 눌러댔다. 사람 속에 있으면서도 외로움은 가시지를 않았고, 계속 이 사이트, 저 사이트 옮겨 다니며 만남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갈구했다.

 

 외로움은 사막의 모래처럼 셀 수 없었고, 사람과의 만남은 그토록 찾아다녔던 오아시스인 줄 알았는데, 모두 허상이었나 보다. 몇 날 며칠째 켜지도 않은 휴대폰이었지만, 누구한테 연락할 생각도, 누구에게 연락이 오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족 외에는 만나는 사람도 없었지만,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나는 늘어진 시계바늘과, 누런 장판과, 차가운 베란다 유리창과, 담배냄새 배인 싸구려 카펫과 하나이다. 이 시간은 나에게 평온함과 여유, 졸림, 무기력함을 가져다준다. 사람 속에서 느꼈던 외로움, 질투, 슬픔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 외로운 정념의 알갱이들은 사막을 덮는 잔잔한 시간의 홍수에 가려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물기가 가시고 다시 모래폭풍이 불어오면 나는 또 오만 정념들에 휩쓸려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시간이 마냥 행복하다. 극과 극을 오가는 조절되지 못하는 감정의 흐름은 내가 아직 철없고 어리다는 표식일까.

 

 더 이상 생각하기가 귀찮다. 감기는 눈꺼풀을 비를 맞아 축축한 옷깃에 파묻었다.



렛세이어 물

<나>


‘ 네 자신을 찾아.’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거의 매 수업시간마다 듣는 말이다. 자아를 찾아라, 너를 찾아라, 네 주체성을 길러라, 등등. 하지만 근 10년 간 자아정체성이 제대로 사라져버린 나는 도대체 나를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취미도, 특기도, 장점도 약점도 모조리 ‘원래’ 내 것이었다기보다는 남의 것을 내가 가져온 거니까. 그것들에게서마저 내 냄새는 전혀 나지 않고, 오로지 너와 그녀, 그리고 수많은 타인의 냄새만 가득히 배어 있었다. 너무 오래 전부터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게 편하고, 좋았다. 아니, 사실 나는 내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나의 냄새가 무취(無臭)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첫사랑을 잃고 난 다음. 내 자신이 그녀와 너무 많이 닮아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다음에 알게 된 ‘나’의 부재는 나를 아주 오랜 시간,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가 방황하게 만들고 있다.


  나도 찾고 싶었다, 나를. 모든 일의 원인은 거기에 있었으니까. 내 자신이 완전한 타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데도, 그리고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전혀 좋을 게 없는 일인데도, 나는 그런 옷을 입으려고 애쓰고 있었으니 당연히 큼직큼직한 관계에서는 몰라도 조금만 가까워지면 그게 그렇게 어려워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을 내가 그은 것이 아니라, 그 두꺼운 타인의 가죽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든 벗어보려고, 나는 나를 마구 굴렸다. 그러니까, 고등학생 때의 우울했던 시절, 어떻게든 무슨 일을 벌려놓고 그 일을 끝낼 때까지가 내가 살아있는 기한이라고 우걱우걱 수명을 늘려놓던 시절에는 나를 굴리는 것이 일종의 생존 방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나를 굴리는 건, 어쩌면 이게 전혀 효과가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쭉 이야기 했듯이 나를 찾고자 하는 게 그 이유다. 


  바쁘고 지친다.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알 수 없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고 느낀다. 나 혼자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건 자아성찰이라는 길로 가는 게 아니라 자기비하라는 길로 비틀어져서 내리막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기둥조차 없이 무작정 건물을 쌓아올리고 있었나. 내부 구조는 하나도 생각조차 안한 주제에 겉모습만 번드르르하게 지어놓고는, 혹여나 누군가 들어와 차가운 말을 뱉어낼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한심해. 렛세이에서는 나를 더 드러내고 싶었다. 익명이라는 힘과, 그리고 나를 키워드 잡을 수 있는 단어들이 있는 곳이니까. 하지만 너무나 피상적인 글들뿐인 것 같아서, 겉모습만 번드르르 한, 속은 텅 빈 에세이 같다는 생각에 A4용지 한 면을 가득 채운 글을 보고 나서도 한숨만 뱉어낸다.


그러나 나는 내일도 의미 있는 곳에 도달하려는 의미 없는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렛세이어 나무

<종이박스>


 난 누가 뭐래도 무뚝뚝한 부산 상여자다. 기념일 챙겨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좋은 것을 좋다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 잘 못하는 츤데레 돋는 부산 상여자. 이제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포기했다. 그런 내게 있어서 표현하기 가장 쉬운 날을 고르라고 하면 상술에 넘어간 척 챙겨주는 정도? n백일을 챙기는 부끄러움보다는 아무렇지 않게 특별한 것들을 챙겨줄 수 있는 날인 듯하다. 발렌타인, 화이트, 빼빼로.. 정작 그런 날들에 무언가를 받으면 상술에 넘어간 바보라고 놀리고, 쓸데없이 이런 거 왜 사냐고 잔소리 하면서 몰래 챙겨주는 게 내 본래 성격이다.

 

 렛세이를 쓰면서 그동안 몇 차례 언급했지만, 나는 학창시절 지도부장으로 6년을 지냈다. 특히 고등학교 2-3학년 때의 나는 숏컷인데다가 운동부 친구들이랑 친해서인지 기념일이 되면 무언가를 한껏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고등학교 3학년 화이트 데이였던 것 같다. 그때 기억을 추억해보면 지금도 그저 실소가 터질 정도로 어이없는 기억이기도 하지만,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기분 좋은 추억이기도 하다.


 다른 날처럼 새벽 같이 등교해서 늘 서있던 내 자리로 갔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겠거니 하고 늘 벗어두는 신장에 신발을 넣었는데 왠지 끝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자리를 잘못 잡았나 하는 마음에 숙여본 내 자리에는 안쪽에 약간 찌그러진 종이 박스가 하나 있었다. 학생들이 남몰래 선물해 준 과자를 먹고 탈이 나는 경우가 심심찮게 생겼던 우리학교였던지라 의심을 할 법도 했지만 나는 별 의심 없이 상자를 풀어보았고, 그 안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몬맛 막대사탕이 양껏 들어있었고 빈틈에는 레몬맛 사탕들이 한 가득 있었다. 

 

 누군지 한참을 생각해봐도 생각이 나지 않기에 막대사탕을 얼른 까서 입에 물고서는 장부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을 떼어 "누군지 모르겠지만 잘 먹을게. 고마워" 한 장을 붙이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2교시 마친 쉬는 시간. 내 자리로 누군가 찾아와 잠들어있는 나를 깨웠다. 비몽사몽한 눈으로 쳐다보니 노란색 배지. 1학년이다. "아가야 누구니?" , "언니 저 사탕주세요" 얜 뭐지? 하는 황당함에 쳐다봤더니 이번에 학생회에 들어온 지도부 막내. "아가야 뭐라고?" "사탕 달라니까요?" 사탕...? 왠 사탕...? 하고 애들을 쳐다보니 일제히 달력을 가리켰다. 아.. 화이트데이... 


 "저기.. 내가 너한테 왜 사탕을 줘야 되니 아가야? 난 남자가 아냐.. 가서 남자친구한테 달라고 하렴..." 하고 다시 잠에 들려는 찰나. "언니 여자 친구 있는 거 나 알아요" ..... 정신이 아찔해졌고 아침에 받았던 사탕을 한 줌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걸 기억했지만 이내 안주머니에 있던 딸기사탕을 꺼내어 주었다. "옜다. 이거면 되지? 언니 협박하는 거 아니다." 말한 뒤 다시 잠에 들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찾은 학생회실 막내녀석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마땅히 시킬 일도 없고, 내 교과서나 꺼낼 겸 열은 캐비닛은 나를 당황시켰다.

 

 내 교과서는 온데간데없고 사탕바구니랑 사탕꽃다발, 그리고 아침에 받은 종이상자와 똑같은 종이상자가 가운데 놓여있었다 이번에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쪽지도 들어있었다. "레몬 사탕이 그렇게 좋아요?" 아무래도 막내의 소행인 것 같아 깨웠더니 "이렇게 쉽게 찾으면 재미없어요......" 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 화이트데이에 누군가에게 사탕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게 익숙했던 나였지만 누군가 나를 찾아와 당당히 사탕을 달라고 하는 것도 같은 사람에게 사탕을 받아본 것도 처음이어서 당시에는 매우 당황했었던 추억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귀여웠는데.. " 싶은 미소 지어지는 추억이다.

 

 화이트 데이에 받고 싶은 선물 1위는 "키스"였다고 한다. 나 역시 같은 생각. 화이트 데이에 사탕보다 더 달콤한 사랑하는 연인의 "키스"를 받는 다면, 상술에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본다.



렛세이어 돌

<또 다른 천사를>


 나에게는 새로운 만남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내가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 낯을 가리는 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친근감 있게 대하는 편이고, 말도 많이 걸어보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새로운 만남이라는 상황이 내게 닥쳤을 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다는 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대인관계에 그리 의욕이 넘치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 지독히도 외로움을 느끼면서 대인관계에 열심히 하지 않는 다니, 이 어찌 모순이 아닐 수 있겠느냐마는 어쩔 수 없는 내 성격인 것 같다. 나는 나의 이런 성격을 고쳐보려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바뀌기는커녕 에너지만 낭비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고, 먼저 말을 걸어주길 원한다. 나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하길 원하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한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많은 것을 원할 때 그 사람이 꺼려지고, 누군가가 내 부탁을 들어줄 때 그 사람을 친근하게 여긴다. 나의 대인관계는 이기적이다. 오로지 나를 기준으로 맞추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내 곁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에너지를 사용해주는, 나를 위해 그들의 에너지를 기꺼이 사용해주는 천사들만이 남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사를 만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아직 다 자라지 않고 편견이 적었던 중학교 시절 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좀 쉬웠다. 하지만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나서부터는 내 주변에서 천사를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천사란, 의외로, 아니, 아주 당연하게도 너무나도 적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나의 친구들은, 지인들은 모두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스스로에게 당당했고, 그와 동시에 타인의 눈치를 보며 소심했다. 겉으로는 필사적으로 웃어넘기며 강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혼자서 삽질하는 사람이었다. 저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제 멋대로 사과하고서는 3초 만에 잊어버리는 이기주의자이기도 했고, 타인보다 내가 더 중요해서 타인이 내게 몇 번이고 강조하며 말한 것도 본인이 중요하다 여기지 않으면 쉽게 기억 속에서 지웠던 이기주의자 중의 이기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 곁에 서서 웃으면서, 그래, 웃으면서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가끔 장난삼아 세게 때리기도 했지만, 언제 어느 때나 내게 힘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천사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 새로운 만남이 두렵다. 현재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너무나도 포근한 곳이라서, 내 주변에서 나를 감싸 안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사람들이라서 나는 이 곳 밖으로 손을 뻗어 새로운 인연들과 손을 맞잡을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내가 야망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기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천사님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안주한 곳은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따스한 곳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과 마주할 용기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곁의 천사들을 잠시 외면하고 그 밖의 세상에 손을 뻗어야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진학해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그때까지 내 곁의 천사들과, 그들과만 지낼 수 없다는 일이었다. 나는 무서웠다. 덜덜 떨면서 손을 뻗었다. 처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에 퍼진 소문에 받았던 아이들의 시선이 떠올랐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한 명의 친구를 만난 것은 정말이지 다행인 일이었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녀였기에 마음고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마음의 위안을 내게 주었다. 그렇게 일 년을 그 아이하고만 지냈다. 반의 다른 아이들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낯설지는 않지만, 익숙하지만 아직 어색한 관계.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것은 나를 방어하기 위한 최상의 거리였다. 아주 가까이 지낸 것은 그 아이 한 명이었지만, 그 아이 한 명으로 나는 일 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와의 생활은 끝났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났고, 나와 그 아이는 다른 반으로 배정을 받았다. 새로 들어간 반에는 온통 낯선 이들이 가득했다. 아니, 익숙하지만 어색한 아이들이 가득했다. 나는 또 다시 어깨가 무거워졌다. 내게는 대인기피증도 없고,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타인에 비해서 지독할 정도로 본인 위주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두려움을 넘어 피곤함마저 느꼈다. 새롭게 배정받은 반, 같은 반의 아이들. 그 중에 나는 또 다시 천사를 찾아낼 수 있을까. 눈앞이 깜깜했다.

 

 나에게 3월은 설렘인 동시에 부담이다. 새 학기, 개학, 새 반. 그 단어들만으로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또 다시 천사를 찾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대답을 확실히 내릴 수가 없다.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또 다시 천사를 만날 수 있을까. 마음이 무거웠다.



웹진 랑은 퀴어 에세이 블로그 LETSSAY의 글들을 기고받아 연재합니다. LETSSAY 블로그에서 더 많은 에세이들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달, 불, 물, 나무, 돌 다섯 레세이어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LETSSAY란? 각양각색의 다섯 명의 여성 성소수자의 솔직담백한 퀴어 생활 에세이입니다. "Let's say"와 레즈비언 에세이(Lesbian Essay)라는 의미처럼 여러분과 공감할 수 있는 퀴어풀한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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