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리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폴린 박(Pauline Park)은 한국계 입양인 트랜스젠더 운동가로, 뉴욕 젠더인권옹호연합 회장이자 뉴욕 퀸즈프라이드하우스 운영위원장이다. 1997년에는 '뉴욕 이반/퀴어 한국인들'을 창립한 바 있다. 성소수자 권리 입법 및 성소수자에게 안전한 학교를 위한 다수의 캠페인을 이끌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는 폴린 박의 방한을 맞이하여 <폴린 박이 말하는 미국 성소수자 운동의 오늘>이라는 강연 자리를 마련했다. 강연에서 폴린 박은 21년 동안 미국 성소수자 운동 전반에 대해서 자신이 느꼈던 통찰과 시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폴린 박은 이러한 성찰들이 미국의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한국의 성소수자에게도 기여하는 바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강연의 운을 뗐다.
폴린 박은 강연에서 크게 일곱 가지의 포인트를 짚었다.
먼저 첫 번째 포인트는 갈등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갈등에 대해서 갈등을 안고 다룰 것인지 혹은 피할 것인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운동을 하다보면 모두가 함께 가자는 구호를 많이 외치곤 한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가자는 욕망이 때로는 갈등을 회피하는 경향을 만들어내는 문제가 있기도 하다. 여기서 갈등이라고 말하는 건 여러 차원의 갈등을 내포한다. 단체 내의 갈등, 단체끼리의 갈등, 커뮤니티 내부의 갈등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라, 사회 전체의 갈등을 뜻한다.
두 번째는 책임에 관한 것이다. 성소수자커뮤니티 뿐 아니라 사회에서 주변화 된 다른 어떤 커뮤니티든 간에 어떤 윤리와 강령 그리고 책임을 가지고 일할 것인가 하는 게 중요하다. 구체적인 예로 뉴욕시는 지역이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눠진다. 그 중 브롱크스(Bronx)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이다. 폴린 박이 퀸즈에 LGBT커뮤니티 센터를 만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브롱크스 활동가들도 LGBT커뮤니티 센터를 만들었다. 많은 활동가들이 모여서 센터를 만들고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센터는 작년에 문을 닫았다. 그 주된 이유는 대표를 맡았던 활동가가 센터 예산에서 36만 달러를 횡령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안타까운 건 미국 전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에 있던 유일한 LGBT 센터가 한사람의 잘못된 욕심 때문에 문을 닫고 그것 때문에 전체 커뮤니티가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번째 포인트로도 이어진다. 운동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실질적인 문제이다. 운동에 있어서 기본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것 외에도 정치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어떻게 움직일까 하는 지점이다. 폴린 박이 지금까지 운동을 하면서 만나온 성소수자 활동가 중에는 원칙과 윤리에 굉장히 철저한 활동가도 꽤 있고, 정치적인 처세가 좋은 활동가도 많았다. 하지만 둘 다 잘하는 활동가는 많이 없었다고 한다. 단체나 운동을 운영할 때, 이사회나 감사회 같은 단위가 집합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며 이러한 부족한 점을 보완한다.
뉴욕의 각 지역에는 여러 가지 LGBT 이슈를 다루는 정치 단체들이 있고 이 단체들은 대부분 민주당과 연계되어 있다. 폴린 박은 한국에서도 곧 성소수자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개인, 단체들이 정치적인 의사결정 단계에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지점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러나 폴린 박은 그럴 경우 생기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LGBT 커뮤니티가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경우, 정치적인 처세가 좋은 사람이 커뮤니티에 많이 들어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야망이 많은 사람도 존재하게 되는데, 개인의 욕심이 커뮤니티의 움직임보다 앞서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관련한 사례가 하나 있다. 뉴욕에는 LGBT 정치 단체가 세 개 존재한다. 그 중 두 개는 폴린 박이 공동 창립한 단체이다. 폴린 박이 그 단체에서 목격한 것은, 정치적인 처세가 좋은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개인적인 아젠다를 앞에 둠으로써 커뮤니티의 중요 안건들이 희생되는 상황이다.
네 번째 포인트는 커뮤니티 운동의 아젠다를 어떻게 발전시킬 지다. 성공적인 운동을 위해서는 정책의사결정의 내부자와 외부자로서의 전략을 모두 생각해야 한다. 물론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단계에서는 선택의 여지없이 외부자로서의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역량이 쌓이다보면 변화가 생긴다. 미국에 있는 HIV/AIDS 이슈를 주로 다루는 Act Up이라는 단체를 예로 들 수 있다. Act Up도 처음에는 정책의사결정 바깥에서 운동을 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실질적인 정책의사결정 안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현재 미국의 LGBT 운동은 꽤 발전을 한 단계로, 수천만 달러 이상의 예산 규모를 가진 전국단위의 LGBT단체가 존재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단체가 그만큼 커지다보면 정치 내부 게임에 몰입하게 되어 풀뿌리에 있는 일반회원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예로 Human Rights Campaign(HRC)을 들 수 있다. HRC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가장 예산 규모가 크며 가장 정치 내부 게임에 잘 들어가 있는 LGBT단체라 할 수 있다.
2007년에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HRC가 버니 프랭크라는 정치 선거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HRC와 버니프랭크 사이의 중요한 안건은 반차별법안과 관련된 것이었다. 처음 반차별법안에는 구체적으로 트랜스젠더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버니프랭크는 원안에 있던 성별정체성 언급을 빼기로 했고, 전국의 수많은 LGBT 단체는 언급이 빠지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버니프랭크의 그런 결정에도 불구하고 HRC는 그를 계속해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그 사안을 희생 하더라도 힘 있는 정치인과의 연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라고 폴린 박은 유추하고 있다. 단체가 기성 정치 체제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무엇을 위해 설립되었고 무엇을 위해 활동해야하는지 잊어버린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LGBT커뮤니티 전반에서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를 함께 가는 주체로서 생각하게 되는 전환점이 됐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 전국적으로 LGBT단체들이 모여서 ‘HRC는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순간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이 HRC가 LGBT커뮤니티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한다. 이렇듯 때로는 갈등이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HRC의 사례는 다섯 번째 포인트로 이어진다. 단체의 역량강화와 기업을 대상으로 시장성을 높이는 과정 사이의 충돌이다. LGBT운동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역량강화는 불가피하다. 꼭 필요하다. 초기의 단체들처럼 모든 걸 자원활동에 의지할 수 없게 되고 건물과 예산과 시스템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역량강화를 계속해서 하다보면 많은 단체들이 결국에는 마치 기업처럼 변하게 된다. 위에서 들었던 HRC의 사례가 단체의 기업화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폴린 박의 말을 빌리자면, 재계로 치자면 HRC가 미국 LGBT 운동판의 재벌이 된 것이다. 마치 한국의 삼성처럼 말이다.
여섯 번째 포인트는 리더십과 관련한 것이다. 폴린 박이 생각하기에 미국의 LGBT 운동에서 가장 발전한 것 중 하나는 LGBT커뮤니티와 선출직 정치인과의 관계이며,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할 지점은 선출직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결국에는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현재 뉴욕에는 LGBT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정치인들이 선출직 공무원 자리에 앉아있다. 이론적으로는 굉장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LGBT단체들이 그 정치인들과 함께 일할 때의 환경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폴린 박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로는, 그들도 선출되고 나면 결국에는 다른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게 된다고 한다. 지난 뉴욕시장 선거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후보 중 한명은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밝힌 시의회 대변인이었다. 그 당시 뉴욕의 LGBT커뮤니티 안에서는 그 후보를 지지해야한다는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압력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폴린 박이 그 후보를 개인적으로 만나본 결과 그를 지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후보에게서 정치에 막 뛰어들었을 무렵의 신념을 배반하는 정치를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고민해야할 지점은 공개적인 LGBT가 선출이 됐을 때, 주류미디어는 그 사람을 마치 LGBT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주류미디어를 통해서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알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접 미디어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며 주류미디어가 보여주는 LGBT의 이야기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꾸준히 알리는 게 중요하다.
5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폴린 박 강연
마지막 일곱 번째 포인트는 LGBT운동의 정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관점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선 소위 말하는 ‘정체성 정치’의 잠재성과 한계에 대해서 논의 되어 왔다. 여기서 ‘정체성 정치’란 LGBT뿐만 아니라 인종이나 종족적인 소수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폴린 박이 20년 넘게 LGBT운동판 내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건, ‘정체성 정치’의 힘과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사회에서 주변화 된 커뮤니티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정체성 정치’적인 접근은 하나의 이슈에만 집중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하나의 이슈에만 집중되다보면 다중적인 억압이나 교차성의 지점들을 무시하는 부작용을 불러오기도 한다. 폴린 박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사회정치적 아젠다를 가지고 다른 커뮤니티에 접근할 수 있어야한다고 조언해주었다.
폴린 박의 일곱 가지 통찰 포인트는 미국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의 상황이 다른 만큼 폴린 박의 통찰들을 한국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지점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폴린 박의 20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고민/쟁점들에 대해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국 LGBT 운동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폴린 박의 경험들을 토대로 고민을 확장하고, 올바른 전략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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