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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국내 인권소식

차별과 멸시 속에 살아가는 홈리스

by 행성인 2016. 5. 25.

림보(홈리스행동)

 

 

※편집자 주: 본 글은 故육우당 13주기 추모문화제에서 발언한 홈리스행동 림보님의 발언문입니다. 

 

 
저는 홈리스행동에서 활동하는 림보라고 합니다. 저는 홈리스에 대한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02년 4월 봄이었습니다. 이곳저곳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경기가 어려워 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 피해주기 미안해서 지방에 일 좀 하겠다고 얘기를 하고 짐을 싸들어 서울역에 왔습니다. 그때부터 노숙을 시작했습니다. 며칠 동안 남산 공원 의자에 앉아 있다 졸리면 누워서 자다가, 서울역에서 TV도 보고, 밤 10시 쯤 잠자리를 구하러 남대문 지하도로 갔습니다. 자려고 박스를 찾으러 다녔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인근 빌딩 뒤에 박스가 여러 개 쌓여있어 몰래 두 개를 가져와 남대문 회현역으로 내려갔습니다. 따각따각, 또각또각. 첫날 밤은 하이힐 소리, 구두 발자국 소리, 슬리퍼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지하도에서 자다가 술 취해서 지나가는 젊은 사람이 ‘왜 이런 데서 노숙하냐?’ 고 하면, ‘예전엔 우리도 다 똑같은 일반 사람이었어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아저씨도 똑같이 당해보세요.’  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저는 매일 일을 구하기 위해 노력 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모습 보다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게으르다고, 나태하다고 낙인 찍었습니다. 어느날, 저는 회현역에서 노숙 하는 사람들과 같이 지내던 중 한 어르신이 건네신 술잔을 받았습니다.
 
‘자네 술 한 잔 할 줄 아냐?’
‘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자네 결혼은 했나?’
‘저도 얼마 전까지 사출기 일을 하면서 월 150만원 씩 벌며 3년 동안 생활했는데, IMF가 터져서 회사가 부도가 났어요. 먹고 살기 위해서 동네 주변에 인력 사무실에도 나가 봤지만, IMF라서 그런지 일자리가 없었어요. 한 달에 나가봐야 5번 정도 일당 5만원에 노가다를 뛰었어요. 살기 어려워지니 마누라가 도망가버렸습니다. 2년 동안 기다려봤지만 헛꿈이었습니다. 혹시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럼, 나도 아들 하나 생긴 셈 치지, 뭐’
 
저는 그렇게 어르신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저에게 어르신께서는 물으셨습니다.
 
‘자네 짤짤이 아나?’
‘아뇨?’
‘주머니에서 돈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를 짤짤이라고 해.’
 
어르신은 지하철 1호선 처음 매표소부터 4호선 끝에 있는 매표소까지 다니면서 지하철 무임 승차권을 하나씩 구해다 주셨습니다. 어르신이 ‘오늘은 나만 따라다녀.’ 라고 말 하길래 ‘네. 같이 다닐게요.’라고 응하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수원행 열차를 타고 화석역에서 내려 아침밥을 먹고 금정역에 내려 교회를 찾아다니며 200원, 500원, 1,000원을 받으며 일주일을 함께했습니다. 이후에는 길목을 기억해두고 혼자 다녔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르신을 다시  만났습니다. 어르신은 장애 2급이었습니다. 동행인이 있어야 표 2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과 같이 전철을 타고 다니며 짤짤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같이 소래포구로 가서 낚시를 했습니다. 망둥어 7마리 잡아다가 회현역 화장실에서 손질해 매운탕을 끓여 여러 사람들과 술 한잔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목요일 저녁 8시 쯤 ‘노숙인의 인권과 복지를 실천하는 사람들(노실사)’라는 단체에서 찾아왔습니다. 커피를 타주며 얘기를 나누던 중 나도 같이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해 다음 주 목요일 감리교 신학대학교 4층 도시빈민선교회로 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단체 대표님이 주말 배움터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해서 매주 주말마다 컴퓨터를 배우고 요리도 배우며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성균관 대학교 HPA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2박3일 여름 농활에 가서 농사일도 도와줬습니다.

 

2004년 서울시장 이명박은 노숙인 일자리 사업으로 홈리스분들을 건설 현장에 보내 1년간 일을 하게 했습니다. 당시 월급은 100만원이었습니다. 한 팀 당 7~8명의 홈리스분들이 배치되었는데, 현장에는 ‘홈리스’라는 꼬리표가 붙어 이름을 부를 때에도 노숙자 000씨라고 불렸습니다. 홈리스라는 이유로 같이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안전모에는 홈리스라는 증표로 노란 비표가 붙어있었습니다. 차별의 대상이 된 홈리스들은 현장 일을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홈리스라는 딱지가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故육우당 13주기 추모문화제에서 발언하는 림보님

2010년 ‘홈리스행동’으로 단체 명이 변경되면서, 아랫마을 홈리스야학이 운영되었습니다. 저는 림보라는 애칭을 쓰며 홈리스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야학은 제게 있어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해준 배움터입니다.

 

최근에 저는 건설일용직을 나가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인력사무실에 갑니다. 5시 30분까지 기다리다 문이 열리면 들어가서 기다립니다. 항상 일이 있는 것은 아니며 일주일에 2~3번을 나가면 많이 나가는 것입니다. 건설일용직을 하기 위해서는 안전교육 수료증이 있어야 하는데, 교육비가 40,000원으로 많은 홈리스분들이 교육을 받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행색이 추하다는 이유로 일을 나가지 못하는 홈리스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차별하고 낙인 찍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사자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과연 당신이 홈리스가 된다면 노숙 생활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거리 홈리스들이 노숙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차별과 오해로 물들어진 거리 홈리스의 생활은 현재의 생활을 더욱 힘들게 할 뿐입니다. 홈리스 분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동정과 시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제대로 된 지원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