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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차별 혐오

동성애를 지지하냐니, '말이야 방구야'

by 행성인 2017. 1. 25.

루카(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 24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전 사무총장 ⓒ 연합뉴스

 

24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기독교 단체를 잇달아 방문했다. 반 전 총장은 이 자리에서 "소수 성 보유자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다"며 자신의 성소수자 관련 행보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았다. 오후에는 보도자료까지 내어 자신의 궤변에 방점을 찍기까지 했다.

 

<프레시안> 보도에 따르면, 반 전 총장 측은 "제가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인권, 인격이 차별받는 것은 안 된다는 뜻이고, 차별을 받지 않도록 여러가지 정책에 대해 지지한 것이다. 제가 권장해서 '당신들 그렇게 해라' 행위를 권장하는 게 아니다"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다. 성소수자 인권이 지지와 합의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수 교계의 표를 의식해 '기름장어'처럼 발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버금가는 화술 실력의 소유자답게, 반 전 총장의 담화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의 문장들로 꽉 채워져 있다. 그래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주장한 것일까, 아니면 '성소수자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정치 언어를 답습하고자 한 것일까.

 

 

 

▲ 2014년 12월, '서울시민인권헌장' 무산 사태에 시장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 인권활동가. ⓒ 오마이뉴스

 

반 전 총장의 의중을 파악하기 전, 비슷한 기억이 하나 떠올라 나누고자 한다. 성소수자를 비롯해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던 어느 정치인의 언행이 바로 그것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임을 강조했던 서울시장이, 절차에 따라 시민들이 직접 만든 인권헌장을 짓밟고, 보수 교계 인사들을 찾아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며 고개를 숙인 사건이 반 전 총장의 모습에 겹쳐져 또렷이 살아난다. 너나 할 것 없이 모인 분노에 찬 수많은 사람들, 6일 간의 농성 끝에 받아낸 서울시장의 사과. 그는 현재도 서울시장으로 재직 중이며, 야권의 대선 주자로도 거론되는 정치인이다. 그의 이름은 박원순이다.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자들은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제멋대로 가부(可否)의 심판대에 올려놓는다. 자신들이 가진 부와 명예, 기득권을 내보이며, 정치인에게는 양자택일 뿐인 문제지를 내민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문제지가 아닌, 그들이 내보여준 것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들이 정해준 답을 고른다. '-지만' 식의 문장을 통해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이들은 편협하고 오만하다. 인간 자체에 대한 지지여부를 묻는 것만큼 기만적인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여성, 빈민, 이주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를 대상으로 계속해서 혐오를 양산해낸다. 그를 통해 자신들만의 커넥션을 점차 강화시켜나간다. 무엇에 대한 지지여부를 묻는 질문은, 사실상의 실력행사임과 동시에, 구태 기득권의 추악한 편고르기인 셈인 것이다.

 

'인권의 수호자'라는 수식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경우라면 더더욱 저들의 심문을 피해갈 수 없다. 반 전 총장의 모습을 보라. '차별과의 싸움에서 작아지지 않는' UN을 이끄는 수장이 되겠다고 선언했던 그는, 사무총장 직을 내려놓자마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조롱을 일삼는 자들에게 사과와 해명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차별과의 싸움에서 작아지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 자신의 힘과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차별을 용인하는 편에 서는 모순을 택한 것이다.

 

어디 반 전 총장뿐이겠는가.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짓밟은 박원순 서울시장, 누더기 차별금지법을 내세웠던 노무현 정부. '혐오세력'을 앞에 두고 저자세를 취하는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 정치인의 모습에 '인권의 수호자'라는 호칭이 무색하고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는 역사를 살아오지 않았나.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논하는 정치인의 입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성소수자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이라면, 성소수자 지지여부에 대해 해명하지 말고,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을 수 있도록 차별적인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는 데 앞장서라고 단호히 외쳐야 한다.

 

▲ 22일, 대선 출마 선언 행사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방송인 홍석천 씨. ⓒ 안희정 페이스북 캡쳐본

 

얼마 전, 홍석천 씨가 안희정 충남지사의 대선 출마 선언 행사에서 한 발언이 뇌리를 스친다. 그는 안 지사가 "어떤 논리로도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정체성과 그들 개성에 대해 재단하거나 뭐라고 할 권리가 없으므로 그 문제에 대해 나는 철저히 리버럴"이라고 발언한 내용을 보고 "혼자 울었다."며 이러한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제가 얼마 전에 선배님 인터뷰를 봤는데 조금 울었어요. 혼자. 왜냐하면, 저희처럼 사회적 약자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정치인으로서는 표 계산법으로 하면 손해거든요. 저렇게 똑똑하신 선배님이 왜 굳이 그런 발언을 인터뷰에서 이야기할까? 많은 정치인이 사실 그 부분에서는 그냥 논외로 넘어가려고 하거든요."

 

"나중에 표 계산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그걸 취소하셔도 돼요. 저희는 다 이해합니다. 아셨죠? (하략)"

 

안 지사가 대권후보로서 성소수자 인권 의제와 관련하여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견지의 입장을 내놓은 것은 '일단' 긍정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 지사의 발언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고,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순간은 안 지사의 입장이 현실로서 실현되는 때다. 그러므로 번복과 부정은 결코 용납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성소수자들이 '무지개농성' 때 외쳤던 구호 중 하나는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이다" 였다. 이 구호는 지금도 물론 유효하다. 목숨은 결코 가볍지 않다. 법적 구속력 없는 인권헌장 무산에 성소수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분노한 까닭은, 정치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헌법의 기본적 가치조차 외면하고, 최소한의 선언을 세우는 일조차 짓밟은 정치인 때문이었다.

 

반 전 총장을 비롯한 정치권에 고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지지 여부를 묻는 어리석은 질문에 결코 답하지 말라. 어떠한 해명이나 변명도 필요 없다. 대신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한 계획과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하라. 지지 여부는 성소수자를 포함한 국민이 답하겠다. 과연 누가, 박근혜 정부 하에 처참히 무너진 민주주의와 인권, 다양성을 되살릴 정책과 비전을 내놓을 것인지를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답습하여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자에게 정권을 다시 내주기에는, 이 땅의 약자와 소수자들이 너무나 많은 눈물과 피를 흘렸으므로.

 

 

※ 편집자 주: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도 중복게재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