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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DAHOBIT)에 참여하면서 영어 약자인 IDAHOBIT이 대체 무엇인가, 흔히 ‘아이다호’로 알려져 있는 행사에 뒤의 BIT는 무엇인가 궁금해서 검색을 해 보게 되었다. IDAHOBIT은 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Biphobia and Transphobia의 약자로,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혐오에 반대하는 날을 의미한다. 뒤에 붙은 ‘바이포비아’를 확인하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동성애 혐오랑 양성애 혐오는 조금 결이 다르지 않나?
나는 레즈비언으로 스스로 정체화하고 있다. 게이 클럽에서 남자들이 케이팝 걸그룹댄스 추는 걸 보는 걸 좋아하기는 하는데 남자에 대한 성적 매력을 느낀 적이 딱히 없다. 사실 양성애자로 정체화하지 않는 내가 이 글을 써도 될지 지금도 고민이 들지만, ‘(여성)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느낀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 혹시 이 글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당사자 분들에게는 먼저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으며,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 기탄없이 꼭! 지적해 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처음 흔히 ‘이쪽 사이트’ 이라 불리는 온라인 동성애자 커뮤니티를 만났을 때, 이성애를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생활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지긋지긋함, 여자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과잉된 자의식, 친구/동기/선배 등에 대한 짝사랑 등의 감정을 공유하며 너무나 편안하고 즐겁게 소통했다. 내 2n년 인생에 드디어 같은 페이지를 보고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찾은 것 같았다.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은 때로 건강검진을 할 때, 건강 문제가 생겨서 산부인과에 갔을 때 그놈의 ‘성관계 경험 있으세요?’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야기하곤 했다. 페니스 삽입섹스를 하지 않아도 성병 검사를 해야 하는지 궁금해 하기도 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나도 궁금해져서 자료를 찾았고, 이성 성관계 경험이 아예 없는 동성애자라도 성적으로 활발하다면 자궁경부암을 포함한 성병 검사를 모두 하는 게 맞다는 여러 공통 자료를 발견하고 뿌듯한 마음을 가지며 정리한 내용을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리고 댓글에 당황했다.
댓글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쪽에도 바이섹슈얼이 있으니까 성병 검사를 해야지’, ‘전여친이 남자 만났던 사람이라 내가 성병에 걸렸다’, ‘전여친과 나 둘 다 남자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인데 성병에 걸려서 너무 당황스럽다. 알고 보니 전여친의 전여친의 전여친이 남자랑 사겼더라.’ 등의 이야기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다. 내가 인터넷으로 열심히 참고자료를 찾으면서 알게 된 ‘동성애 여성 커뮤니티에도 당연하게 성병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달리, 많은 사람들은 성병은 전적으로 남성이 옮기는 것이며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성병이 들어오는 이유는 여기에도 남자와 섹스하는 여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제로 성관계를 한 사람 수나 횟수와 관계 없이 한 번이라도 ‘성병’에 걸린 적 있는 여자는 문란하다고 인식되며, 애인의 과거 ‘성병’을 알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별사유라는 편견은 덤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동성애자의 양성애 혐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텍스트로 몇 번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양성애자는 결국 남자와 결혼하는 거 아니냐는 말, 동성애도 할 수 있고 이성애도 할 수 있으면 결국 독자적인 정체성이 아니라 박쥐인 것 아니냐는 이야기. 왜 동성애를 하냐, 너희는 그냥 이성애 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잘 모르는 일부가 하는 말’이라고 점잖게 평가했으나 실제로 실감하지는 못했던 것이었다.
위의 경험담을 쓰면서 갑자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성병과 양성애자에 대한 인식이 어떨까 싶어서 오랜만에 커뮤니티 검색을 했다. 재미있게도 최근까지도 양성애자가 성병을 옮긴다는 인식은 그대로였으며, 심지어는 ‘남자는 더러운데(성병에 많이 노출되고 많이 걸린다는 말) 바이는 남자랑 하니까 확률의 문제’라는 논리에 ‘나도 바이인데 동의한다’는 댓글까지 있었다.
그 댓글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바이를 위한 커뮤니티는 어디에 있는가? 대체 어쩌다가 한국의 양성애자 여성 당사자가 ‘양성애자가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성병을 옮긴다’는 명제에 동의하게 된 것인가?
찬찬히 생각할수록 더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남자와) 결혼한 바이는 성소수자인 척 하지 말고 ‘일반’ 세계로 꺼지라는 논쟁부터, 성소수자 동아리에서도 ‘나 지금 남자랑 사귀고 있어’ 라는 말에 아, 하고 흐르던 불편한 침묵, (게이)클럽에 친구와 있다가 남자(로 패싱되는 사람)와 키스하는 여자(로 패싱되는 사람)를 보고 ‘우와 이런 건 아직 사회적 합의가 안 되지 않았냐?’ 하고 당연하게 이성애자로 생각해 버리던 일.
내가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처음 속하고 느꼈던 충만함과 공감을 양성애자들은 커뮤니티에서 느낄 수 있을까? ‘완전한’ 동성애자 또는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시선, 그저 끌렸을 분인데 끌리는 사람의 성별에 따라 갑자기 완전히 다른 커뮤니티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하고, 그 와중에 나의 일부를 숨기거나 언급하지 않는 게 권장되는 전략. 나의 전부를 이해하며 지지하는 사람들이 잘 없다는 감각. 상상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고, 그저 상상일 뿐인데도 너무 깊은 답답함이 들어 약간 우울해졌다.
양성애자는 성별 정체성을 불문하고 같은 성별 정체성의 동성애자보다 우울, 불안, 자살사고, 섭식장애 등의 유병률이 높다(Fenway guide to Lesbian, Gay, Bisexual & Transgender health, 2nd edition, Chapter 9). 이는 양성애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 기인하고 있다. 위 두 문장은 매우 잘 알려진 내용이다. 나는 여기에 동성애 혐오에 대해 분노하는 동성애자 중에도 양성애 혐오에 일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내용을 덧붙이고 싶다. 이해받지 못하는 감각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 역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씁쓸한 일이다. 양성애 혐오를 그만두자는 캠페인이라도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벌여야 하는 것일까?
양성애자를 위한 커뮤니티가 있을지 주변의 몇몇 양성애자와 범성애자 동료들에게 물어봤지만 딱히 잘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LGBT 프라이드, 호모섹슈얼 프라이드’가 아닌 ‘바이섹슈얼 프라이드’를 의식화하고 고양시키는 커뮤니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치 백마 탄 초인처럼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인가? 바이를 위한 커뮤를 찾으신 분들은 꼭 좀 알려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