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최근 사이클 선수 나화린씨는 '성전환 수술 없는 성별정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트랜스젠더 동료들이 적지 않게 당황하고 실망하기도 했는데요, 한편으로는 감정적으로 개인을 규탄하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9월 웹진에서는 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 인권팀원들이 저마다 에세이를 쓰면서 수술 여부에 따른 성별정정의 입장을 짚고 나아가 트랜스젠더가 동료로서 어떻게 이야기를 건넬 수 있을지 고민을 곱씹어보았습니다. |
소하(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 인권팀)
나는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기 까지 오랜 디나이얼의 기간을 보냈다. 처음 위화감을 느낀 건 사춘기가 막 시작되어 성별에 따른 신체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된 무렵이었다. 여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생각이 바로 트랜스젠더로 정체화 할 생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트랜스젠더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만 알았지, 그 외에 어떠한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나와 잘 연결이 안되었던 것 같다. 인터넷이 보급되었던 시기, 인터넷을 통해 트랜스젠더에 대한 정보를 처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혹시, 나도 트랜스젠더가 아닐까?’ 라는 생각과 함께 몇 안되는 정보를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나는 곧 실망했다. 트랜지션 수술을 받아도 여성과 완벽히 같아질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성형수술을 통해 여성스럽게 보이는 데는 어느정도 한계가 있었다. 특히, SRS(성별 재지정 수술 또는 성확정 수술)의 경우에는 여성성기의 외형과 질을 재현하는 정도에 그칠 뿐, 실제 여성성기의 기능을 완전히 구현하지는 못했다. 나는 온전한 여성이 될 수 없다면 트랜지션 수술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나는 일탈적인 행위를 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버릇이 있다. 회사에서 야근을 반복하여 지쳐갈 무렵, 하나의 일탈적 욕망이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깊숙이 묻어 놓았던 여성이 되고 싶다는 욕망.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주변에 퀴어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특히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생기면서 그랬다. 더 이상 트랜스젠더는 화면너머로 봐왔던 존재가 아닌, 내 옆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거기서 용기를 얻었다. 그들은 머릿속에서 그렸던 트랜스젠더와는 다르게, 예쁘기만 해야 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여성과 남성사이에 걸쳐져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얻었다.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겠구나”, “트랜스젠더가 된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지만 끝까지 마음을 붙잡은 게 있었다. “트랜지션을 한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지 못하면 어쩌지?” 옛날에 나를 붙잡았던 ‘진짜 여자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 과 상통하는 고민이었다. 그러자 트랜스젠더 친구가 조언을 해주었다. “트랜지션을 다 할 필요는 없어요. 사람마다 원하는 모습은 다르니까.” 정확히 이 말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그런 의미였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던 나는 이 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여성의 몸은 과거 미디어에서만 그려왔던 것과는 달리 아주 다양한 몸이 있다. 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어도 여성이다. 나는 트랜스젠더가 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시스젠더 남성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바꾸는 '일탈'을 계획했다.
어떤 개념들은 뚜렷한 경계를 가지지 않는다. ‘인종’, ‘민족’ 같은 것들, 더 나아가서는 구체적 사물을 지칭하는 ‘컵’ 과 같은 단어들도 말이다. 3500년 전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미노스 사람들은 일회용으로 토기로 만든 컵을 사용했다고 한다. 1
이 때 사용한 토기 컵은 지금의 형태와 달리 넓적한 그릇과 더 비슷해 보인다. 이후 컵은 진화함에 따라 뿔 잔, 성배, 트로피, 머그 컵, 종이 컵과 같이 다양한 형태로 발달해왔다. 그리고 이 중 몇 가지는 이제 컵인지 아닌지 논쟁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다소 부족한 비교일지도 모르겠지만, 성별 또한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별이 ‘여성’, ’남성’ 두 가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성별에는 무수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서 만인의 생각하는 만개의 성별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내가 정의하는 나의 성별은 어떤 것이고 어떠한 모습일 수 있을까? 2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인간의 신체의 회형을 변형하거나 신체의 기능을 보완하는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제한적이지만 지정 성별과는 무관하게 원하는 모습의 외형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정의한 성별의 모습으로 바꾼다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다. 과학 기술이 여기서 더 진보한다면 SF에서 봐왔던 것처럼 신체를 자유롭게 연성 하거나 기계장치로 대체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는 더 많은 성별 표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때 나는 어떠한 모습의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인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성기가 없을 수도 있고, 두 개가 있을 수도 있다.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이런 재미난 상상을 해보길 권해드린다. 그리고 트랜스젠더 당사자라면 관성에 밀려 특정 성별 표현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진짜로 원하는 혹은 필요한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 이근영, 『3500년 전 고대인들도 ‘일회용 컵’ 사용했다』, 한겨레 신문 칼럼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920967.html [본문으로]
- 윤정원, 『[몸] 섹스도 젠더도 스펙트럼이다.』, 셰어 이슈페이퍼
https://srhr.campaignus.me/issuepapers/?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NTt9&bmode=view&idx=6142916&t=boar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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