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의 말 게이들은 외계에서 온 것 같다. 그래서 지구에 여행 온 외계인의 삶을 기록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참…이 나이에 글을 쓸 줄이야, 가 아닌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제야 풀어 보는구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남자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내 삶을 솔직하게 기록해 본다. |
문수(한국HIV/AIDS감염인인권연합 KNP+)
경상도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볼 수 있는 남자라고는 동네 친구와 학교 같은 반의 친구들이 전부였다. 더구나 우리 동네는 집성촌으로 같은 성씨만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시골 우체부 직에서 퇴직해서 술로 나날을 보내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노름과 술로 가산을 탕진해서 우리 집안은 가난 그 자체였다.
엄마는 일제 치하에서 소학교만 졸업했는데도 머리가 총명하셨다. 재미있는 입담으로 동네 반장 노릇을 하셨고 우리 동네뿐 아니라 다른 동네에서도 찾아와서 제문이나 혼례 축하 사연을 작문해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로 글을 잘 쓰셨다. 동네에 천막 유랑단이 찾아오면 노래자랑대회에 나가서 양은 냄비나 주전자를 상품으로 타오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학교 공부에 대한 불신이 깊어서 4남 1녀 자식들에게 학교 공부를 하지 말고 기술이나 배우라고 강요하셨다. 형과 누나들은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외지에서 생활했고 집에는 막내인 나와 부모님 세식구만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에게도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외지로 나가 기술을 배우라고 말씀하곤 하였다.
그 당시 큰형은 월남전에서 하사로 만기 제대해서 안양 럭키금성 주식회사에 근무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대책도 없이 큰형한테 가서 같이 살아야 한다면서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결국 안양에 있는 큰형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알고 보니 큰형이 먼 친척 고모뻘 되는 여자와 동거 중이었다. 엄마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먼 안양까지 이사를 간 것이었다.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집성촌 보수적인 집안에서 친척과의 연애는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그때 큰형은 마당이 있는 큰집을 전세로 살았는데 남은 방 세 개를 전전세로 놓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그 여자와 헤어지라고 요구하자, 큰형은 방 세 곳의 전전세 금을 들고 그 여자와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졸지에 전세금을 빚으로 떠안게 된 우리 세 식구는 몸만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내려온 우리 세 식구의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당시 74년도에 전깃불이 처음으로 들어올 정도로 시골인 우리 동네는 새마을 운동을 잘했다고 박정희 상장까지 받아서 그마나 빨리 전기가 들어온 거라고 했다. 엄마는 학적부도 없는 나를 위해 동네 육성회장에게 부탁해서 중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게 해주셨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날 아버지는 나의 손을 끌고 이발소로 데려가 이발 기술을 배우라며 그 집에 맡기고 가버리셨다. 뒤늦게 엄마가 그 사실을 알고 나를 다시 데리러 와서 아버지 몰래 다시 학교에 다니게 해주셨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기술을 배우라며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셨고 나는 아버지의 성화를 못 견디고 집을 나와 부산에 있는 친척 집에서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동네 면사무소에서 심부름하는 소사(급사)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열일곱 살의 나이에 면사무소 급사 직으로 취직했다. 그 당시가 1978년도였다.
동네에는 또래 친구가 스무 명이 넘었다. 남자 또래만 15명 정도였고 학교에 다니며 자주 어울렸는데, 다들 어린 꼬맹이 때부터 함께 자란 불알친구들이었다.
1979년 여름방학을 맞아 읍내 고등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 오랜만에 마을에서 모였다. 집성촌인 우리 마을에는 1년에 한 번씩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제실이 있었는데 그 제실은 한옥마을처럼 넓은 마당이 있는 기와집이 여러 채였다.
우리는 제실 빈방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밖에는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고 나와 창ㅇ만 남았다. 창ㅇ이는 키가 크고 늘씬한 몸을 가진 친구였는데 평소에 말이 없는 아이였고 나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우리 마을은 동네가 워낙 커서 ‘아래깍단’ ‘위깍단’이라고 해서 아래쪽 마을과 위쪽 마을을 따로 부르곤 했는데, 우리 집은 아래깍단에 있어서 나는 아래쪽 마을에 사는 아이들과 더 가깝게 지냈고 창ㅇ이는 위깍단에 살아서 평소에 크게 친할 일도 없었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남자에게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근처에 식당 집 주인 아들이 멀리서부터 후광이 비칠 정도로 잘 생겨서 학교에 가면 그 애를 보며 가슴 설레며 짝사랑을 했었다. 그런데 여름 장맛비가 내리는 날, 제실에서 창ㅇ이와 단둘만 남게 된 것이었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창ㅇ이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조금은 어색해서였다. 그런데 창ㅇ이가 슬금슬금 내 곁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눈을 떠보니 창ㅇ이는 자기 물건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창ㅇ이의 츄리닝 바지에 손을 넣고 물건을 만져보았다. 크고 단단한 물건이 내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창ㅇ은 내 바지를 벗기더니 서툴지만 주저함 없이 내 뒤에 뭔가를 바르고는 자신의 물건으로 뒤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기둥이 몸을 파고들자, 그 강렬한 감각이 다른 신경을 전부 마비시켜버렸다. 하지만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덮쳐 누르는 창ㅇ이의 등을 꽉 껴안았다.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육체를 탐닉했고 시간이 흐른 뒤 꽉 다문 입에서 흘러나오던 우리의 신음은 세찬 빗소리에 묻혔다. 그렇게 나의 첫 경험은 끝이 났다.
언젠가 그 녀석은 결혼을 해서 잘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해 가을엔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그해 겨울 전두환의 내란이 성공했다. 1980년 광주에서 항쟁이 일어났고 그해 여름에 아버지가 잠자듯이 돌아가셨다.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그때, 서울에서 동네 형이 면 방위를 근무하러 고향에 내려왔다. 그는 서울 생활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를 통해 서울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는 방위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나에게 오라고 했다. 친척이 하는 가게에 일자리를 소개해준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던 나는 바로 면사무소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