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표(서울신방학초등학교 교사)
이름은 있으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런 존재를 유령에 비유하곤 한다. 학교라는 공간에도 그런 유령 같은 존재들이 있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들 중에는 욕이 꽤 포함되어 있다. 욕을 사용하는 청소년들이 자기가 사용하는 욕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정말 상대에게 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학생들은 그저 습관적으로, 혹은 재미삼아, 아니면 친구 사이에 친근함의 표현으로 그런 말들을 사용하기도 한다. 욕들 중엔 때로 상대를 경멸하거나 비하하려는 의도로 사용하는 것들도 있는데 그 대부분이 소수자를 빗댄 표현들이다.
“병신”, “미친~” 등의 말은 신체적 장애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빗댄 표현으로 과거 우리 문화가 가지고 있던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이 고스란히 반영된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말들이 사용되는 경우를 살펴보면 그 말이 지칭하는 대상―예를 들어 장애인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경우는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이런 욕은 모욕적 대상을 정해두고 욕하려는 상대방과 비교함으로써 수치심이나 모욕감을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때 모욕적으로 설정되는 대상은 졸지에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인간 이하의 존재로 치부된다. 이런 말들이 사용됨으로써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지위는 무시되고 그들의 존재는 공간 밖으로 사라진다.
학교에서 학생들끼리 “너 게이냐?”, “너 레즈야?”라고 묻는 말 속에도 진지하게 상대방의 성적 지향성을 묻거나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다. 아니 사실 이 말은 질문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게이나 레즈비언이라는 모욕할 대상을 정해 놓고, 모욕하려는 상대를 동일시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수치심이나 모욕감을 주려는 것뿐이다. 이때 성소수자 청소년의 존재는 이미 무시당할만한, 경멸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소수자에 대한 모욕적 의도의 이런 말들은 대상이 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이지 않는 언어의 철창 속에 가둔다. 딱히 성소수자 청소년 당사자를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더라도 “너 게이냐?”라고 묻는 말이 이미 상대에 대한 비하와 모욕을 품고 있을 때 그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지위는 이미 인간 이하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모욕적 의도의 언사들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심리적 바탕에는 그들이 희화화하는 존재들이 현실 속에, 특히 본인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학교에도, 학원에도, 교사들 중에도, 학생들 중에도 성소수자는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성소수자를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디에나 존재하는데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누군가 성소수자 비하 발언을 하는 그 순간 그 자리에도 성소수자는 존재할 수 있다. 성소수자들은 드러내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향하지 않는 모욕적 발언에도 덩달아 모욕당하고 상처받는다. 이럴 때 커밍아웃의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자기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성소수자에 대한 모욕적 발언에 직접적으로 맞서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가 소수자의 드러냄(커밍아웃)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만큼 인권 의식이 발달하지 못함을 속으로 한탄하며 침묵할 수밖에 없다.
성소수자 청소년은 학교 안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그러다가 학교 안에 분명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던 그들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학교는 경악과 공포로 휩싸인다. 학교는 그들의 존재를 감추거나 학교 밖으로 추방하려 애쓸 것이며, 또래집단은 호기심으로 포장된 경멸과 편견의 폭력을 선사할 것이다. 아웃팅으로 인해 학교생활을 중단하거나 학교폭력에 노출되는 청소년 성소수자의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들은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고 교사로부터 무시당하며 학교 당국으로부터 버려진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무지로부터 출발한 편견에서 시작된다.
모든 공포는 무지로부터 싹이 돋고, 무지는 편견으로 귀착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존재에 대해 경계하고 의심하며 결국 배제하고 고립시킨다. 사람들이 성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대부분 그들 자신의 직접적 경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때로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에서, 때로는 교사의 도덕적 훈계로 위장된 편견에서, 때로는 영화 속에서 비일상적 존재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대로 대중에게 각인된다. 때로 성소수자는 성(性)에 굶주린 좀비 혹은 뱀파이어처럼 여겨진다. 하물며 어떤 이들에겐 좀비나 뱀파이어처럼 접촉하면 전염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학생인권조례에 성소수자 청소년에 대한 차별 금지 조항이 들어가면 성소수자 청소년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편견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제대로 된 앎의 기회가 있다면 누구나 편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지는 잘못이 아니지만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거나, 알고서도 바꾸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이제 학교는 앎으로서 인권을 명명해야 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성소수자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성소수자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 학교가 무지로 인해 자행되는 모든 반인권의 폭력에 대해 묵인하거나 방조한다면 이미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보편적 인권에 기초한 현대 사회의 학교는 공적 기관으로서 당연히 보편적 평등을 교육해야 한다. 학교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책임 회피다. 성소수자에 대해 아는 것은 그래서 상식의 범주이며 매우 기본적인 교양의 덕목이 되어야 한다. 교사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지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십년 전 열아홉 살 故육우당은 사회의 편견과 종교적 독선에 반대하며 스러져 갔다. 그가 살아생전 당했을 모욕과 조롱의 언사들은 지금도 우리 사회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학교 안 성소수자가 살아있는 유령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슬픈 영혼이 되어서도 안 된다. 학교와 교사, 이 모두를 포함하는 교육의 주체들은 학교 안 소수자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통렬히 반성하고, 소수자 인권을 위한 반차별 교육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인권교육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편적으로 각인시키는 반차별 교육에 다름 아니며, 모든 교육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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