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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당 문학상

[우수작]<병균>

by 행성인 2013. 4. 23.

이재영


“왜 나한테 온 거니?”

밖에 비가 온다는 이유로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내가 여자였기 때문일까. 경찰서 안은 남자들의 땀 냄새가 둥둥 떠다녔다. 나는 굳이 내 앞에 선 소년에게 땀과 함께 묻어나오는 짜증을 감추려 애썼다. 퇴근이 한 시간 남은 시점이었다.

소년의 손엔 검은색 접이식 우산이 들려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은 듯 작은 몸에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년이 거쳐 온 바닥마다 빗물이 고여 있었다.

“경찰 아저씨들은”

소년이 잠시 고민하다가 단어 하나를 골라냈다.

“무섭거든요.”

난 빗물에 잠긴 네 다크서클이 더 무서워, 얘, 하려다 꾹 참았다. 소년의 얼굴이 진짜 겁을 먹은 듯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이구나. 소심한 아이들은 참 다루기 쉬웠다. 이거 공무집행 방해죄인거 모르니? 하고 조금만 겁을 주면 달아나기 바빴으므로 어쩌면 제시간에 남은 업무를 다 끝내고 퇴근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꼰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렴.

하지만 경찰서 안쪽 복도로 자리를 옮기는 내내 꺼림칙했다. 소년은 얼마 전 학교에서 자살한 중3 남학생이 ‘성적비관’으로 자살을 한 게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재수사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지나간 사건을 들추는 행위는 언제나 피곤하다. 시작도 피곤하고, 대부분은 결말까지 피곤하다. 재수사는 서장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진작 꼼꼼히 조사했으면 이럴 일이 없지 않았느냐, 그러게 진작 잘하질 그랬냐, 내 너 이럴 줄 알았다, 잔소리는 옵션이었다. 허가를 내어주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증언을 한 목격자의 적이 되어 쓴 소리를 해야만 했다. 허가를 받더라도 쓴 소리를 해야만 했다.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이 따지고 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억지로 수사를 진행해도 맞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증언이 잘못되었음이 서서히 밝혀지면 목격자는 은근슬쩍 사건에서 발을 빼버린다. 말 그대로 시간 낭비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재수사를 꺼려했다. 애초에 시작부터 하지말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동료들이 불쌍하게 됐다는 식의 눈빛을 보내온다. 소년은 그들의 눈치를 피하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뚝뚝 빗물을 떨어뜨린다.

소년이 의자에 앉기 무섭게 매트에 빗물이 번져갔다. 나는 소년과 한 좌석을 사이에 두고 앉아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소년의 옆얼굴에 깊은 그늘이 서려있다. 소년의 긴 속눈썹에 빗물이 아슬아슬 맺혀있다. 소년은 잠시 침묵했다. 나는 그사이 지난 사건을 되짚어보았다. 사건 당일은 장마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서 내 분위기는 날씨만큼 우중충했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옆자리 경사에게 오늘 분위기 왜이래? 하고 물었다. A중학교 중학생이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대나 봐요. 왜? 글쎄요. 유서 한 장 있어야 말이죠. 집안도 화목하고. 멍이 좀 있긴 한데,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지속적인 상처는 아닌 것 같대요. 친구랑 심하게 싸우면 이 정도 멍쯤은 드니까. 성적이 나쁜 학생도 아니라네요. 싸웠다고 자살을 하진 않죠. 별일이네.

“엄만 늘 말씀하셨어요. 여자만이 아냐. 남자도 여자를 잘 골라야한단다.”

소년은 바닥에 고인 자신의 흔적들을 보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소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엄마 말에 틀린 것은 없었어요. 하지만 전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틀린 건 저였단 걸 몰랐거든요. 전 개그 프로도 이상했어요. 보면요, 개그맨들이 실수로 뽀뽀를 하게 되는 그런 게 많이 나오잖아요. 그럼 막 불쾌해하고, 침을 뱉고, 헛구역질을 하잖아요. 관중들은 그걸 보고 막 웃죠. 그래서 전 개그 프로그램을 잘 안 봐요.”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달팽이관이 맨홀뚜껑처럼 귓구멍을 막아버린 것 마냥 소년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오다가 튕겨나갔다. 자살한 남학생의 이야기가 나오려면 한참 먼 듯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요, 쪽지를 하나 받았어요. 우리 반 승준이였어요. 승준이는 반에서 장난기도 많고 수업시간에 말도 많았어요. 승준이가 입을 열면 다들 까르르 웃었어요. 나도 웃었죠. 그런 승준이가 보낸 쪽지를 펼쳤을 때 나는 깜짝 놀랐어요. 나랑 사귈래? 이러는 거예요. 심장이 콩콩 뛰었어요. 나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에요.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요. 나는 수업 종이 칠 때까지 생각했어요.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던 승준이의 장점들이 잔뜩 생각이 나더라고요. 얼굴까지 빨개졌었어요.”

나는 소년의 표정을 살폈다. 푹 숙인 고개에서, 파르르 떨리는 눈에서, 달싹거리는 입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의 시선이 불안을 머금고 나의 걸음을 좇았다. 내가 의자 옆 자판기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안심한 소년의 고개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부끄러웠지만 용기를 냈어요. 그래, 나랑 사귀자! 하고 그 애 앞에 가서 말했어요. 근데, 승준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라고요. 나를 확 밀쳤어요. 병균 옮아, 저리가! 다른 애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어요. 눈물이 막 흘렀죠. 아, 장난이었구나. 결국 나만 그런 거구나.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잘못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미쳤거든요. 그 이후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생활은 지옥이었어요. 뭔 일이 있었는지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머리채도 잡히고, 코피도 터져보고, 애들이 떨어뜨린 김밥을 억지로 집어먹어도 보고, 사물함이 뒤죽박죽이 되어도 보고, 도둑이라는 누명도 써 보고, 오학년 형들의 욕을 들어도 봤다고. 그러면서 진짜 내 속에 ‘병균’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 때부터 슬금슬금 남자애들을 피했다고 했다. 그제야 소년이 왜 경찰 아저씨가 아닌 나를 찾아왔는지 수긍이 갔다. 소년은 기억을 되짚으며 목이 메는 듯 했다. 나는 자판기에서 뽑은 코코아를 건넸다. 마실래?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그래서 중학교는 다른 곳으로 훌쩍 가버렸어요. 저는 아무도 내가 가슴에 병균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기침을 하지 않으면 감기는 옮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억지로 친구들도 사귀고, 어울려서 축구도 했어요. 피시방도 가고. 다른 애들이 그렇듯요. 말 수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웃음이 많은 편도 아니었지만 애들은 절 싫어하지 않았어요. 나는 언제나 무리에 속해 있었어요. 가끔은 여자애들한테 고백도 받았어요. 물론 다 거절해 버렸지만요. 내가 알고 있던 학교생활과는 정말 달랐어요. 진작 이렇게 살 걸. 전, 저의 병균을 깊은 곳에 묻어버렸어요. 다신 꺼낼 수 없도록. 근데, 이준혁 그 자식은.”

이준혁. 자살한 남학생의 이름이었다.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종이컵을 만지작거렸다. 복도에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준혁이는 어떤 아이였니? 소년이 굳은 얼굴을 살짝 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준혁은, 키가 컸어요. 얼굴은 못생겼는데 목소리가 참 좋았어요. 성우를 해도 될 정도로요. 공부도 못하는 편은 아니었고 성격도 털털해서 인기가 많았어요. 남녀공학이었거든요. 운동신경도 좋아서 축구를 하면 꼭 걔네 팀이 이겨요. 그래서 이준혁네 반이랑은 축구 시합을 하기 꺼려하죠. 저도 축구는 잘하는 편이었는데, 걔가 덤비면 다 빼앗아 갔어요. 기분이 나빴죠. 그래서 전 그 자식을 싫어했어요. 뭐가 그렇게 잘났냐. 다른 애들도 이준혁을 싫어라 했죠. 인기가 많아서요. 덕분에 이준혁을 욕할 때면 반 애들이랑 동질감을 느꼈어요. 너도 싫냐, 나도 싫다! 뭐 그런. 그래도 왕따는 아니었죠. 항상 친구는 있었어요.”

소년이 기침을 했다. 감기 걸린 거 아니니? 하는 질문에 소년이 울먹였다. 감기에 걸렸었는데, 그때 축구를 하는 게 아니었어요.

“4반과 축구 시합이 있었거든요. 4반은 이준혁네 반이었고 우리 반이 질 확률이 높은 게임이었죠. 미열이 있었지만 내가 빠지면 분명 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뛰었어요. 땀은 줄줄 흐르다가 식더니, 몸에 점점 한기가 들었어요. 그런데 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날씨가 더운데 바람이 세게 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좀 있으면 괜찮아 질 거라고. 그러고 이준혁이 들고 있는 공을 빼앗아 골대로 미친 듯이 달렸어요. 내가 뛰고 있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로 어지러웠고 몸이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웠어요. 곧 이준혁한테 따라잡혔죠. 근처 우리 팀한테 패스한다고 공을 찼는데 영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몸이 기우뚱 하더니 그대로 픽 쓰러졌죠. 하늘이 까매지는 게 눈물이 핑 돌았어요.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정신도 깜빡 깜빡 감겼어요. 누군가 절 업고 가는데 그대로 기절을 해버렸어요. 땀 냄새와 섞인 스킨향이 났어요.

정신을 차렸을 때 양호실에서 절 간호하고 있는 건 양호선생님이 아니었어요. 제가 누운 침대에 머리를 기대로 잠들어있었어요. 땀에 머리가 젖어 축축했죠. 땀 냄새와 섞인 스킨향이 났어요. 엎드려 있어서 얼굴도 잘 안보이고 젖은 티셔츠 뒤에 새겨진 번호판만 보이는데도 두근거렸어요. 이준혁이었죠. 나는 그 놈한테 이불을 덮어주고 한참동안 쳐다봤어요. 아파서 그러는 거라고 변명을 하면서 계속 쳐다봤어요. 감긴 눈, 높지 않은 코, 다문 입을요. 이준혁이 깨어날 때까지. 눈이 마주치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요. 얼굴이 빨게 졌을 까봐 무서웠는데, 고개를 돌리거나 자는 척을 하진 않았어요. 그럼 더 이상해보이거든요. 놈이 제 이마에 열을 짚어보더니 말했어요.

너, 용케도 뛰었구나.

심장이 하도 뛰어서 고개를 푹 숙였어요. 더 이상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왜 내 얼굴을 보고 부끄러워하냐.'고 물을 까봐 두려웠는데, 이준혁은 다행히 아무 말 없이 일어나더라구요. 다 나으면 재대결을 하자고 하면서 밖으로 나갔어요.”

소년이 힐끔 나를 쳐다봤다.

“……더럽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소년의 보조개가 깊이 파였다.

“이해해요.”

소년이 식어가는 코코아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이후로 놈이랑 급속도로 친해졌어요. 물론 친구로서. 전 할 수 있는 장난은 다 쳤어요. 걔 뒤통수도 때려보고, 헤드록도 걸어보고, 다리도 걸어보고요. 걘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요. 근데, 아무리 애써도 친구로 볼 수가 없는 거예요. 간질간질 거려서. 그래서 더 괴롭혔어요. 그러다가 걔 다리가 부러졌죠, 나 때문에요. 계단에서 장난을 쳤거든요. 걔가 계단에 고꾸라졌을 땐 어떻게 해야 될 줄 몰라서 숨이 턱 막히는 거예요. 그래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어요. 친구들도 준혁이 좀 그만 싫어하라면서, 무슨 장난을 그렇게 치냐면서 충고하더라고요. 아무도 제가 이준혁을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걸 새삼 알았죠. 다행이긴 했어요. 근데 눈물은 안 멈췄죠.

녀석이 병실에서 깨어난 건 세 시간 만이었는데 전 삼 일을 기다린 것처럼 펑펑 울었어요. 이준혁이 괜찮다면서 빙긋 웃어주는데, 더 눈물이 났어요. 차라리 화를 내라, 이 새끼야, 하면서 울었어요. 다신 장난을 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녀석은 그 말을 들은 둥 마는 둥 했지만요. 그리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어요. 녀석은 목발을 달라고 했지만 전 마음이 안 놓여서 제가 대신 들고 날랐죠. 언젠가 녀석이 그랬듯 업어서 이동하고 싶었지만, 키 차이 때문에요, 그냥 목발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데려다 줬어요. 고집 참 세다. 그랬어요, 걔가. 제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간질거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시끄러. 그렇게 대꾸했죠. 날이 갈수록 제 속에 있던 병균이 온 몸으로 퍼졌어요. 혼자 있을 때도 걔 걱정이 되는 거예요. 나는 속으로 병신, 병신하고 외쳤어요.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그럴 때마다 한 손으론 이준혁한테 전화를 걸고 있는데.

근데 이상한 게 좀처럼 녀석의 다리가 낫질 않는 거예요. 다신 축구를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어요. 저는 녀석의 반으로 찾아가 물었어요. 왜 이렇게 안 낫냐고요. 근데 녀석이 너무 무성의하게 대답하는 거예요, 신경 끄라는 것처럼. 나을 때 되면 낫겠지. 저는 화가 치밀었어요. 버럭 화를 내고 4반 교실을 빠져나왔어요. 근데 쉬는 시간에 놈이 절 뒤뜰로 부르는 거예요. 전 또 바보같이 갔어요. 멀리서 목발을 짚고 서 있는 놈이 보여서, 뛰어서 갔어요. 화를 낸 것도 잊고. 근데.”

소년의 손이 떨렸다. 소년이 손에 힘을 주자 손에 쥔 종이컵이 구겨진다. 떨지 않으려고 애쓰는 주먹마저 덜덜 떨린다. 소년은 깊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힘들면, 쉬었다 말하렴. 소년은 파르르 떨리는 입 꼬리를 올려보였다. 계속 말할 수 있다는 듯.

“목발을 놓는 거예요. 그리고 두 다리로 걸었어요. 절뚝이지도 않았고, 아파보이지도 않았죠. 그냥 저한테로 걸어왔어요. 그리고 제 위로 고꾸라졌어요. 제 오른쪽 귀에 대고 말했죠.

다 나으면 네가 날 부축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전 덜컥 무서워졌어요. 차라리 그게 녀석의 장난이었고, 서프라이즈라면 좋았을 텐데. 제 병균이 녀석에게로 옮아간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그러면서 스멀스멀 초등학교 때의 악몽이 솟아올랐어요. 승준이의 새파래진 얼굴이 떠올랐고, 친구들의 발길질과 혐오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제 결심도 떠올랐죠. 제 병균을 꾸역꾸역 구석으로 감추던 그 때 했던 제 결심이요. 전 녀석을 밀쳤어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어요. 녀석은 쫓아오지 않았죠. 쫓아와서, 장난이야! 해주길 바랐는데.

그렇게 교실로 돌아오고 나서도 뛰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때, 사물함에 편지 한통이 와있었어요. 우리 반 여자애로부터 온 편지였어요. 예쁜 편지지 속의 내용은 보나 마나였어요. 전 곧장 그 애에게로 갔죠. 그러자, 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자애가 저한테 안겼어요. 무섭게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이 됐어요. 복도 창문으로 교실로 돌아오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어요. 그렇게 녀석과 전 멀어져갔죠.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고 마주쳐도 말을 섞지도 않았죠. 전 4반과 하는 축구시합이라면 참가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창문으로 열심히 뛰는 녀석만 쳐다봤죠. 다리가 다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아선지 녀석은 번번이 넘어지고, 공을 빼앗겼어요. 전 그럴 때마다 안타까워했어요. 우리 반이 아니라 4반을 응원하고 있단 사실을 모르고, 계속 놈만 응원했어요. 여자 친구가 제 옆으로 와선 ‘우리 반이 꼭 이겨야 할 텐데!’라고 했지만 그 말엔 신경을 쓰지도 않았어요. 전 놈을 보기 바빴으니까.

근데,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요, 뒤뜰 청소를 끝내고 교실로 가려고 하는데, 이준혁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거예요. 눈이 마주쳤어요. 전 피해서 지나가려고 했거든요? 근데,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아챘어요. 주위가 술렁거리는 건 제 기분 탓이었을지도 몰라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전 뿌리치려고 했죠. 근데 워낙 힘이 센 놈이라 마음처럼 잘 안 되더라고요. 아니, 제가 힘껏 뿌리치지 않았던 거일 수도 있어요. 여전히 두근거렸죠, 미친 듯이. 녀석이 뭐라고 말을 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반가운 목소리, 듣고 싶었던 목소리를 감상하기 바빴죠. 눈물이 나올 정도로 반가웠어요.”

소년이 자신이 걸어오면서 떨어뜨린 물 자국을 눈으로 좇았다. 그 끝엔 대원들이 문틈으로 소년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대화를 엿듣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대원들이 허둥지둥 문을 닫았다. 나는 발끈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소년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빙긋 웃으며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병균을, 옮기면 안 되니까요. 괜찮아요, 전. 근데. 소년이 쓰레기통을 향해 구겨진 종이컵을 던졌다. 종이컵은 쓰레기통에 부딪히더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기에 걸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기침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병균을 옮겼단 말이니?”

“더럽다고 했어요, 녀석한테. 침을 뱉었어요. 허공을 가르던 발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녀석의 뒤통수를 가격했죠. 꿈틀꿈틀꿈틀, 지렁이마냥 녀석은 꿈틀거렸어요. 콱 밟으면 진물이 나올 것 같이. 녀석은 진물 대신 침을 질질 흘렸어요. 녀석은 늘 그랬어요. 힘으로 충분히 절 누를 수 있었을 건데,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죠.

……여자 친구가 먼발치서 우릴 보고 있다는 걸 몰랐다면, 그랬다면 뭐가 달라졌을까요?

저는 녀석을 흠씬 패주고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억지로. 그제야 숨어있던 여자 친구가 슬그머니 제 뒤로 왔어요. 뭐야, 쟨? 하면서요. 전 여자 친구의 팔을 잡아끌며

병균 옮는다, 가자.

라고 했어요. 내 뒤로 그 녀석의 실성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어요. 게이 병? 저는 흘끔 뒤를 돌아봤어요. 여전히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큭큭, 웃고 있는 거예요. 미친놈, 나는 한 번 더 침을 뱉곤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서 도망치듯 벗어났어요, 놈을.”

소년이 울기 시작한다.

그 리 고 그 날 밤 놈 이 나 를 벗 어 났 어 요. 아 주 먼 곳 으 로.

소년의 부르짖는 듯한 목소리가 복도 구석구석에 부딪혀 울린다. 습기 탓이었다. 바닥에 고인 물 자국이 증발하지 않는 것도 습기 탓이었다. 벽시계가 일곱 시를 향해 달리고 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소년이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소년은 병신새끼라며 울부짖는데 그것이 자신을 향한 말인지, 그를 향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지쳐 울음을 그칠 때까지 소년은 욕을 토해냈다. 감기에 걸린 듯 계속 기침을 했다.

재수사를, 원하니? 소년이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좋은 여잘 만나야 한다는 부모님께, 이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세상은 아무도 절 인정해주지 않아요. 인정하는 척은 하겠죠. 소년의 고인 눈물이 형광등 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인다. 섬뜩한 걱정이 들었다. 소년은 나의 표정을 읽은 듯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저는 이제, 지지 않아요.”

소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바닥에 흘린 물을 되짚어가며 문을 열었다. 내일이면 물 자국들은 모두 증발할 것이었다. 나는 소년이 적시고간 시트를 쳐다보며 혼자 복도에 앉아있었다. 배웅을 나가지 않았다. 소년이 서를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그곳에 있었다. 충분히 혼자 해내리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

녀석의 상이 끝날 때까지 전 학교에 나가질 않았어요. 학교에 갔을 때 친구들이 제게 말을 했어요. 야, 네 친구 준혁이 있잖아. 걔가 게이였대. 몰랐지? 우리 학교에 어떤 애한테 차여서 자살했다나봐. 전 그 말에 피식 웃었어요. 그리고 곧장 여자 친구에게로 갔어요. 여자 친구밖에 퍼뜨릴 사람이 없었거든요. 팔짱을 껴오는 여자 친구를 뿌리치면서 전 말했어요. 헤어지자고. 여자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왜 그러냐고 물었어요. 하지만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았죠. 애초에 좋아한 적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제가 교실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그녀가 쫓아왔어요. 화가 잔뜩 나있었어요.

“왜, 너도 게이냐?”

나는 침을 꼴깍 삼켰어요. 그리고 웃었죠. 코끝으로 녀석의 스킨향이 나는 것 같았어요.

“병균 옮아.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