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는 doing이 아니라 being이다. 즉,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는 뜻이다.
-「푸른 등불의 요코하마」, p. 85.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이란 족속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많은 부정적 의견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각자 인간들은 자기만의 벽을 가지고 있어서 그 벽을 다 같이 한 번에 없애고 손을 잡기란 참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대일 관계가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얼마든지 둘 사이의 벽은 무너질 수 있고, 새로운 벽이 쌓일 수도 있고, 또 벽 사이에 구멍을 뚫고 손을 넣어 잡을 수도 있다. 그렇게 관계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한다.
우리사회에서 이성애자들의 경우, 그러한 사랑하는 사이로의 발전이 자연스럽게 가능하다. 같이 학교를 다니다가, 혹은 같은 회사에서, 소개팅에서, 정말 영화같이 길에서도 그들의 벽은 문을 열고 닫는다. 물론 그들에게도 장애물들은 있기 마련이겠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극복가능한 장애물들이어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온갖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그들의 관계에서는 비교적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은 장애물들을 만날 때가 많다.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
사실, 동성애가 소설의 소재로 이용되는 까닭은 동성애가 우리 사회에서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애처롭고, 안타깝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반항적인 인식까지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소설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장르들은 동성애를 소외와 반항의 소재로써 이용한다. 결국 우리 사회가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부부와 아들, 딸이 존재하는 4인가족의 형태를 가장 정상적인 형태의 가족 범주로 규정짓는 우리 사회의 교육은 그렇지 못한 가정들에게 끊임없는 소외감을 가져다준다. 그 중에서도 동성애자와 같은 성적 소수자들의 가정들은 이 사회에선 가정도 아닌 터라 소외를 넘어 위태롭기까지 하다.
특히 혈연을 강조하고 아직까지 한 민족, 한 핏줄을 중요시하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입양마저 사회의 운동으로 일궈 내야하는 이놈의 나라에서 동성애자 부부가 혹은 성적소수자 부부들이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핵폭탄보다 더 위험한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성적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입양이나 임신을 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임신을 하고 싶어 하는 레즈비언도 있고,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게이들도 있고, 입양을 하고 싶어 하는 부부들도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선재가 사귀던 애인과 결별한 이유는 바로 그 애인이 ‘애 한번 낳아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인 이 커플이 헤어진 이유는 둘이 지겨워져서도 아니고, 싸워서도 아니고, 결국에 레즈비언인 이들이 임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 사회는 남녀가 만나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남녀가 책임지고 키우는 형태의 가족들을 양산하고, 교육함으로써, 그렇지 못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을 매몰차게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게끔.
사실 여자가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서도 임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소설속의 주인공의 애인인 C는 그럴 경우 아이가 받는 피해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결국 결혼이라는 테두리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걸 잘 알고 있는 의사인 주인공 선재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보통사람들은 동성애자들 스스로 좋아서, 원해서 선택하는 줄 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오해다. 중병 환자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처럼 평생 여자로서의 삶과 완전한 사회인으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불확실하고 암담한 미래라는 부도수표를 내미는데 좋아라 받아들 사람이 과연 있을까. 평생을 몰이해와 차가운 시선에 떠밀려 상처받은 짐승처럼 무리지어 살아야 하는 고독한 삶을.
-「푸른 등불의 요코하마」, p. 85.
이성애자를 사랑하는 동성애자
그렇게 애인과 헤어진 선재는 술로 시간을 보내다가 우연치 않게 자기의 환자로 온 시은이라는 인물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시은은 이성애자였고, 선재는 그녀에 대한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그런 사실을 넘어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진심을 다 해서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전달의 순간에 차갑게 돌아오는 시은의 손길은 뺨을 친다.
사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명명된 사람들 간의 관계들이 특별히 대단한 인연들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같이 있다 보니, 혹은 같이 학교를 다니다보니까, 자주 부딪치다 보니까,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매력을 알아가고, 또 사랑에 빠진다. 동성애자들도 그렇게 이성애자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친구에게서, 형에게서, 혹은 언니에게서, 동생에게서 말이다.
하지만 이성애자들은 그런 동성애자들의 구애가 사랑일 수 있다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해서 그냥 우정이라고 여기고, 의심할 여지조차 두려고 하지 않는다. 혹 의심한다 치더라도 동성애자들의 고백이라도 받는다면, 마치 세상에서 없을 일을 겪은 것처럼 차갑게 거부하고 돌아선다.
우리 사회는 이성애 중심의 사회이고, 성소수자들을 정상의 범주에서 밀어내왔으며, 그것을 끊임없이 제도화하고 이어왔기 때문에 이런 이성애자들의 반응은 예상되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짝사랑 아닌 짝사랑을 우리들은 숙명처럼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결국 사회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지만, 이 소설은 그런 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시하거나 혹은 항의하려 하는 의도로 쓰인 글은 아니다. ‘푸른 등불의 요코하마’라는 서글픈 가사의 노래처럼 그냥 그들의 사랑을 바라보고 슬픈 눈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쓰다듬으려 한다. 그냥 이 소설은 그걸로 족하고 있지만, 그 바닥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 제시는 결국 우리 사회가 동성애자 혹은 성적소수자들의 사랑을 슬프게끔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것은 내가 나의 상황에 맞게 감정이입한 것일 수도 있고.
우리 사회는 그렇게 우리들에게는 맹벽(盲壁-창이나 구멍이 없는 꽉 막힌 벽)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들은 고통과 슬픔을 껴안고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와 같이 흔들려 흔들려’가면서 슬픈 노래를 읊조리며, 사랑을 찾는 슬픈 사랑의 존재들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상황을 깨치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성애자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이성애와 비교해 특별히 변태적인 것 또한 아니며, 사회가 흔히 말하는 미치거나 이상한 것도 아니라는, 그저 사랑하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의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식은 우리사회의 벽에 창문을 만들고, 문을 만들고, 그 창문을 열고, 또다시 문을 열게 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한 의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날을 위해서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이 많음을 새삼스럽지만 슬픈 노래가사처럼 고요하게 중얼거리고 있다.
작가의 두 번째 작품집이다. 자신의 모스크바 유학시절의 생활들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 작품집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으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작가들을 이들을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연대를 통해서 상처가 치유될 것임을 암시하며, 소설들을 마무리하고 있다. 「푸른 등불의 요코하마」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중의 하나로 여성 동성애자의 고뇌와 아픔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욱 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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