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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차별 혐오/동성애 혐오

차이의 철학 - 사람들은 왜 막연히 동성애자들을 싫어할까?

by 행성인 2013. 12. 25.

 

오소리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을 싫어하는 이유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게 종교적인 이유인데, 본인은 종교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고 종교의 혐오에 관한 글들은 웹진 ‘랑’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니, 다른 이유에 대해서 한번 말해보고자 합니다.

 

종교적인 이유를 제외하면 남는 것들은 하나같이 원색적인 비난뿐입니다. 더럽다, 역겹다, 보기 싫다 등등.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을 실제로 보지도, 겪어보지도 않았을 터인데(물론 그들 주변에도 많은 동성애자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주변인들이 동성애자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만요) 어떻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왜 막연히 동성애자들을 싫어할까요?

 

여기서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을 가져와 생각해 보았습니다. 들뢰즈의 철학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차이의 철학’이란 명칭입니다. 저는 이 ‘차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해야 동성애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먼저 ‘차이의 철학’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너웨이의 영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에 보면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면서 언제나 바로크 칸타타 풍의 노래를 보이소프라노로 부르는 소년이 나옵니다. 이 소년의 목소리는 여자 목소리일까요, 남자 목소리일까요? 소프라노니까 여성의 목소리지요. 음색도 여성적이고. 그러나 노래하는 사람은 분명 남자니, 남자 목소리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사람들은 보통 대립을 통해 차이를 포착해냅니다. 위 인용글에서 소년의 목소리는 남성의 목소리 혹은 여성의 목소리로 구분됩니다. 인식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를 대립시킨 후 소년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정작 중요한 소년의 목소리, 그 자체는 잊혀져버린거죠. 이처럼 대립 속에서 고유한 목소리의 차이는 사라지고, 차이가 차이로서 포착되는 게 아닌, 동일성으로 차이를 포섭해버리는데요. 어떻게 하면 차이를 차이로서 포착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것이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이 묻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들뢰즈의 철학은 차이를 긍정하는 태도를 제안하고 촉발하고자 합니다. 이는 차이를 제거해야 할 부정의 대상으로 보는 동일자의 사유와 정반대입니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봤는데요. 그럼 이제 이걸 동성애자와 관련지어 얘기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비난할 때는 보통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척도에 맞춰서 자신과의 ‘차이’를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인데요. 사람들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동일성을 보존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점’을 보게 되면 불안과 초조에 휩싸이게 되고, ‘차이’를 제거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혹은 그 ‘차이’를 자신보다 저급의 성질로 보고 폄하하거나 비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또 다른 ‘차이’를 찾아 없애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성질이 ‘차이’를 가진 성질이 아닌 동일성을 띤 성질이 되니까요.

 

과거, 흑인이 그 차이의 대상이 되었고, 불과 얼마 전까지는 여성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과거 사회지도층은 백인인 남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주(主)’를 이루는 자들과 다른 흑인과 여성은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 결과 ‘차이’로 차별의 대상이 되었죠. 물론 이 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동일성 보존의 본능이 강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인식 수준이 발전하면서 흑인과 여성은 그들의 ‘차이’를 차이로써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다른 ‘차이’를 찾아 제거하기 위해 몰리게 됩니다. 그게 바로 동성애죠. 요즘 동성애반대 단체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는 이유입니다. 또한 이 보존하려는 본능 때문에, 이전에 있던 남녀 간의 결합이라는 관습을 깨뜨리는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거죠.

 

이보다는 좀 낫지만, ‘차이’를 부정할 게 아니라 인정하고 용인하자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이는 종종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과 혼동되는데요. 인정과 용인에서 ‘차이’는 고무되어야 할 것이 아닌 참고 견뎌야 할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부정적인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흔히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 했을 때 이런 말들을 듣죠. “그래, 나는 인정해. 받아들일 수 있어.” 이는 다르게 말하면, “그래, 네가 갖는 ‘차이’를 인정하겠다. 그러니 너도 내가 갖는 ‘차이’를 인정해라.” 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결국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오래된 자유주의적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차이를, 사실은 자신의 동일성을 인정하고 용인하라는 ‘동일성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동성애라는 ‘차이’를 참고 견뎌야하는 것으로 보고 아량을 베푼다는 말이죠. 이는 여전히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에게 이토록 강력한 본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집합적 기억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집단에서 일탈자로 지목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통일성을 만들고 집합적 기억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집합적 기억에서 어긋나게 되면 그 어긋난 것들은 배제되는 거죠. 역사 속에서 소수자의 역사는 모두 배제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속의 소수자들은 역사를 쓰는 잣대를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이니까요.

 

이렇게 ‘동일성을 보존하려는 본능’이라는 집합적 기억으로 뭉친 집단들은 집단극화 현상과 극단이행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집단극화 현상이란 집단 내 각 개인의 태도나 의견이 집단 토론을 하고 난 후에 원래의 입장 쪽으로 더 극단화되는 식의 변화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편견이 강한 집단일수록 더 극단화됩니다. 때문에 동성애 반대 단체들은 나날이 세력이 확장되고 더욱더 극단적인 입장을 보이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계급유지나 생산성 같은 요인들도 자리 잡고 있겠지만 이 글은 ‘차이의 철학’에 관한 글이니 논외 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집단적 의사결정은 개인적 의사결정보다 더 모험적이거나 더 보수적인 극단적 방안의 선택으로 귀결된다는 극단이행 현상이 발생해 끔찍한 동성애 혐오 범죄 등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동일성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강하디 강한 본능을 깨뜨릴 수 있을까요? 이 동일성을 보존하려는 본능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따라하고 열망하는 성질과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그 궤를 달리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새로운 것(자신과는 다른 ‘차이’!)을 긍정적인 것 혹은 우수한 것으로 보는 반면, 전자의 경우는 열등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후자의 경우, ‘차이’에 대한 긍정을 자신도 모르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 ‘차이’를 통해 무언가를 잃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무언가를 얻는다는 건, 자기 자신이 다른 어떤 것으로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이며, 이런 이유에서 자신과 다른 것이 만나서 자기 자신이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통해 내 자신이 다른 무언가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나와 다른 것을 반갑게 긍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들어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그저 ‘차이’를 인정해 달라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때도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오히려 자극시킬 뿐이죠. 앞으로의 성소수자 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사람들에게 더욱더 ‘차이’의 진정한 의미를 상기시켜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보다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방법에 대해선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어봐야겠죠?^^

 

 

참고문헌 -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