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26. 산 - 그리워하다, 사랑하다

2015. 6. 19. 20:26무지개문화읽기/[김비 장편소설 연재]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長篇小說

金 飛

 

 

26. 산 - 그리워하다, 사랑하다

 

 

 “니 진짜 혼자 지낼 수 있겠나?”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말에 오 팀장은 난감해했다. 어머니마저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따라 최 씨 형님만을 남겨둔 채 일찍 퇴근을 해버린 터여서, 자책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엔 짜증이 섞였다

 

 “, 인마뭐가 괜찮노? 까딱하다간 몸뚱이가 날아갈 판국이었구만그게 허리 위쪽으로만 튕겨 올랐어도 니는 지금 여가 이리 누워있지도 몬한다. 허허 거릴 일이 따로 있지, 인마!” 

 

 ‘까딱하는 시간은 얼마나 여러 번 행운과 불운으로 나를 비껴갔던 걸까. 그의 말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까딱의 시간은 어떤 흉터를 남긴 채 나로부터 멀어져갔을까. 다행히 철판은 무릎 인대를 끊어내지 않고 지나갔고, 상처가 깊기는 했지만 뼈에도 이상이 없어 잘 아물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까딱했던 시간은, 고맙게도 이번엔 내 편이었다. 고맙게도, 고맙게도

 

 “정말 아무도 없는 기가? 이 나이 먹도록 여친 하나 없이 모했노? 정말 혼자 지낼 수 있겠나?” 

 

 구급차에 몸을 싣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의사와 간호사들의 손에 병원 침대에 몸을 눕히면서,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긴 했다

 

 “,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물론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움은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이 곧 사랑이라면, 기억이란 모두 사랑일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이나 기억을 여러 번 쓰며 공부하는 것만으로 사랑은 이루어질 것이며, 이별은 그 모든 것들을 간단히 폐기해버리고 마는 한 가지 절차에 불과할 것이다

 갑자기 머릿속이 말개지는 느낌이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들을 헤치고 지나며 까딱하는 순간 우리를 비껴 간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사랑인 것도, 사랑이 아닌 것도, 내가 여기에 살아있으니 어쨌거나 까딱하고 지나 나를 살게 한 그 시간을.  

 지금 이 순간에도 까딱하는 시간이 지나간다. 나는 그것이 이번에는 어느 쪽으로 나를 밀쳐버릴지 알지 못한다. 어떤 흉터일까, 행운일까, 불행일까,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포개져 그제야 여러 겹 아래로 까딱하는 시간의 의미를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지나고 있구나아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까딱하는 시간을 향해, 나는 딱 한 번 끄덕했다



 회사와 보상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서류를 검토하는 아버지와 형의 눈빛은 치밀했다. 사고 당시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올 조사관에게 그들은 어떤 걸 말해야하고 말하지 말아야하는지, 나에게 일러두었다. 두 사람은 내 앞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두꺼운 책 앞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두꺼운 돈 뭉치거나

 한 줄의 문장으로 기록될 시간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시간이나 감정을 요약하는 일은 옳은가? 탈락된 것들을 생각하면 그 몇 줄의 문장이나 단락은 사소하기 그지없는데, 그걸 근거로 결정을 내리고 돌아서고 죽음까지 생각하는 일은 결국 스스로를 요약해버리는 일 아닌가

 자꾸 그녀가 생각난다. 하지만 보고 싶다는 말은 옳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저 그녀의 모습이, 말투가, 그 웃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물론 사랑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만지고 싶은 감정 없이, 생각만 난다. 이런 순간에 그녀는 어떤 말을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고 난 뒤에도 어떤 마음을 숨기고 또 내보일까. ‘까딱하다간 사랑이나 그리움이라고 규정해버리고 말 이 순간은, 어느 며칠 어느 몇 달의 시간을 지나 어느 기억 위에 내려앉게 될까

 침대 위에서 몸을 흔들어본다. 오뚝이처럼 좌우로 기우뚱 앞뒤로 기우뚱, 나를 여기에도 담그고 저기에도 담가본다. 서류를 들고서 의사와 말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는 아버지의 등을 본다.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제일 크게 어깨를 부풀리고서 형이 의사의 뒤를 가로막는다. 무얼 요구하는지 의사의 난감한 얼굴이 보이지만, 앞뒤로 포위당한 그 마음을 나도 알지만, 나는 기우뚱 기우뚱 침대 위에서 허공에 걸린 내 다리를 바라보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멀리 가지 않았는데도, 땀이 났다.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녀도 괜찮나?” 

 “, 딛지 않도록 조심만 하면 된대요.” 

 “니 아버지는?” 

 “어제 왔다 갔어요. 엄마는 안 보고 갔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까딱하는 시간이 그녀에게도 지나쳐가는 모양이었다

 

 “형이 간병인 불렀다고 했는데왔어요?” 

 

 대답도 없이 그녀는 고개만 끄덕했다

 

 “사람은 어때요, 괜찮아 보여요?” 

 “혼자 있을 수 있겠나?”  

 “나요? 난 괜찮아요. 이렇게 움직여 다닐 수도 있는 걸요? 그냥 좀 찢어지고 꿰맨 건데요, . 인대도 그 정도면 괜찮대요. 엄마도 혼자 있잖아요?” 

 

 혼자인 두 사람이, 함께 있다. ‘까딱하고 무언가를 놓친 두 개의 시간이, 함께 있다. 엄마도 나도 아무도 없이 혼자였는데,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니 여자 친구는안 오나?” 

 “?” 

 “연락도 안 했나?” 

 “그런 거없어요, 이제.” 

 “그래? 누가 있는 것 같더니만그럼친구로라도 지내지. 뭐래더라, 여사친, 남사친이라던가요즘 애들 뭐 희한한 이름 붙여갖고 헤어지고도 잘 지내고 하드만.”  

 

 엄마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느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힐난처럼 들릴 게 분명했다. 그랬다면 몽롱한 꿈에 이끌려 창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는데. 사랑도 그녀에겐 어떤 것이었는지 묻고 싶어졌다. 있긴 했는지, 헤어진 아버지에게 있었는지, 기억 속에 묻어둔 누군가에게 있었던 건지

 

 “그때 너좋아 보이드라. 다 나은 것 같더라. 이번엔 정말 달라지나, 그런 생각도 들고연애해라, 니 연애할 때가 젤 이쁘드라.” 

 

 시간 속에서 갑자기 차갑고 뾰족한 것이 튕겨 올라 가슴팍 어딘가를 치고 지나갔다. 피를 흘리거나 붕대를 감거나 끊어지지 않아 다행일 수도 없는 그런 시간이, 기억이

 나는 엄마가 보지 못하도록 부끄러운 손을 들어 어딘가를 매만졌다. 어디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여기저기를 꾹꾹 눌렀다. 꿰맬 수도 없고 흉터조차 남기지 못하는 온통 시큰거리며 아픈 시간이 까딱, 까딱, 까딱숨 가쁘게 연거푸 지나갔다. 느리고 더딘 회복의 시간이었다



 

김비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